조운호
現 하이트진로음료 고문(前 대표이사), 前 세라젬그룹 부회장, 前 웅진식품 대표이사
10년차 은행원 때인 1990년 돌연 웅진식품으로 이직해 입사 9년 만에 최연소 CEO 자리에 올랐습니다. 아침햇살·초록매실·하늘보리·자연은 등을 연달아 히트시켜 누적 450억원의 적자 기업을 연매출 2700억원대 흑자 기업에 올려놨습니다. 2017년 하이트진로음료에선 블랙보리·하이트 제로 등을 성공시키며 또 한 번 흑자 전환의 신화를 써 ‘한국의 음료왕’ ‘음료계 미다스의 손’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가을대추·아침햇살·초록매실·자연은… 누구나 한번쯤 마셔봤을 이 초히트 음료들을 직접 기획해 탄생시킨 음료왕이 있습니다. ‘출시 7개월 만에 1억병 판매‘ ‘판매 첫해 1000억원 매출’ 등 국내에선 코카콜라도 넘보지 못한 대기록들을 남기고, 자신이 만든 음료(하늘보리·블랙보리)끼리 시장 1위를 놓고 다투게끔 만들었죠. 바로 한국 최고의 음료 기획자이자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 조운호님의 이야기입니다.
대기업이 앞다퉈 신제품을 찍어내고 광고를 쏟아부어도, 음료 하나로 연간 1000억원의 매출고를 올리기란 극히 어렵다는 게 업계 중론입니다. 그러나 이 음료왕은 음료 사업의 불모지인 작은 기업에서 메가 히트작들을 연달아 탄생시킵니다. 450억원의 적자 기업을 연매출 2700억원대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면서 말입니다.
<“한국의 음료로 코카콜라를 이겨보자… 음료에 미친 내 30년 휘모리를 이끈 사명입니다.”>
그야말로 전설적 이력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아침햇살이란 초대박 음료를 탄생시킨 기쁨도 잠시, 상사와의 갈등으로 1년 만에 부서에서 쫓겨나야 했고, 직접 창업한 회사에선 봉급 줄 돈을 꾸러 다니다 결국 사업체를 떠나는 아픔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불운을 뒤집고 재기에 성공합니다. 바로 음료로 말이죠. 30년 넘게 천재적 영감과 인사이트를 식지 않게 한 이 음료왕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조운호님/리멤버
Chapter. 1
잘나가던 10년차 은행원은 왜 사표를 냈을까?
가정 형편상 판검사 꿈도 포기, 상고 진학
매일 코피 터지게 공부해 은행·대학 동시 합격
은행원 10년차 때 돌연 웅진그룹으로 이직
원래는 은행원이셨습니다.
15살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공부를 잘해 늘 전교 상위권을 안 놓쳤고 판검사가 되고 싶었는데 그 순간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 3남1녀의 맏이인 제가 빨리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대학도 사치라 인문계를 포기하고 부산상고에 입학했습니다. 따박따박 돈 잘 버는 은행원이 되려고요.
그런데, 대학에 가셨잖아요?
고등학교 2학년 어느날, 가장 친한 친구들이 전부 대학에 가겠다는 거예요. 실업계에서도 집안 형편이 좋아지면 대입으로 진로를 바꾸는 경우가 있었거든요. 무조건 취업해야 했던 저도 너무 대학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담임 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놨더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방법이 하나 있더라고요. 바로 야간 대학이었습니다.
1년간 죽어라 공부했습니다. 은행 시험과 학력고사는 준비 과목이 아예 달랐거든요. 매일 버스 첫차를 타고 등교했어요. 교문이 열리기 전이라 학교 앞 그네를 타면서부터 공부하기 시작해, 경비한테 쫓겨날 때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반년쯤 지나니 매일 코피가 나더군요. 간혹 안 터지는 날엔 ‘제대로 공부하는 거 맞아?’란 걱정까지 들었죠. 제일은행과 대학(부산 경성대)에 모두 붙었습니다. 대학만 노렸던 친구들은 모두 재수했는데 말입니다.
<“무언가에 무아지경으로 몰입한다는 감각이 조운호의 나머지 인생을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0년간 잘 다니던 은행은 왜 관두신 건가요?
훗날 다른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은행에서도 언제나 가장 일찍 출근했어요. 제때 월급 주지, 일만 잘하면 일찍 퇴근해 대학까지 다닐 수 있지… 얼마나 감사합니까. 게다가 동료와 결혼해 가정까지 꾸리게 해줬으니 그저 고마운 직장이었죠.
그런데, 참 엉뚱한 곳에서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옵니다. 은행원 8년차 때 대학 졸업 여행으로 전국을 돌다가 민속촌에서 우연히 풍물패와 마주친 적이 있어요. 풍물패가 뿜어내는 미칠듯한 신명에 별안간 심장이 멎을 것 같더라고요. 부산으로 돌아오자마자 홀린듯 장구를 배웠어요. 사내 풍물패 동아리까지 만들어 연습했죠.
장구에서 제일 빠른 장단이 휘모리인데 그걸 꼭 치고 싶더라고요. 엄청 짧은 박자들 사이에 수없이 많은 잔가락들을 채워야 하는 초고난도 장단인데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고요. 하루는 진짜 죽을 때까지 해보잔 생각으로 옥상에 올라가 연습했어요. 한여름이라 탈수 지경으로 땀이 났고 손마디엔 피가 철철 났죠. 정말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더라고요. 그래도 계속 쳤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는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리 속이 하얘지더라고요. 그때, 마법처럼 휘모리가 됐습니다. 고통을 포함한 모든 잡생각이 사라지고, 제가 쪼개고 싶은 박자와 잔가락들만 남아 들리더라고요. 무아지경의 몰입과 희열, 그때 뼈가 저리도록 깨달았습니다. 이토록 무언가에 무아지경으로 몰입한다는 감각이 조운호의 나머지 인생을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0년 딱 10년차 은행원이 되던 해, 이직 제안을 물리치지 못한 것도 바로 그 감각의 순간 때문이었어요. 당시 은행은 일반 기업보다 훨씬 좋은 직장으로 인정 받았어요. 헌데 새 회사는 경력 인정도 안 해줘 사실상 연봉을 깎더라고요. 하지만 상관 없었습니다. 은행은 군대로 치면 후방 부대지 전투 부대는 아니었거든요. 무아지경으로 일할 거리가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에 웅진그룹으로 이직하게 됩니다.
모두 말렸는데 아내만 혼자 찬성했어요. 딱 이 한마디 해주면서요. “은행원 같지 않아 결혼했는데 내가 잘봤구만!”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조운호님/리멤버
Chapter. 2
대박 음료 터뜨리고도 1년 만에 쫓겨난 사연?!
시음료도 없는 시장조사 끝 강행한 가을대추
출시 첫달 40만개 판매, 첫해 매출 170억원
대성공에도 내부 갈등으로 다시 본사 발령
웅진그룹에선 바로 음료 기획을 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첫 5년간은 본사에 있었어요. 기획조정실에서 경영을 지원하는 업무를 했죠. 저 빼고 전부 서울대 출신이더라고요. 질 수 없잖아요? 3년반 만에 특진 2번에 총괄팀장이 됐습니다. 지방대 은행원 출신이 아주 야무지게 일하니까 회장님 눈에 들어왔나봐요. 어느날 예상치 못한 명령이 떨어져요. “차장 특진시켜줄 테니 웅진식품 가서 신제품 만들어봐라.”
본사에서 잘 자리 잡고 있는데 적자만 연 50억원 이상인 계열사로 가라니 처음엔 섭섭했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는 회사더라고요. 사연은 이랬어요. 웅진식품은 회장님이 채권으로 돈 대신 받은 업체였어요. 인삼으로 드링크, 티백을 만들어 팔았는데 10년 가까이 적자라 속을 썩였죠. 보다 못해 회장님이 나서 단번에 150억원 넘는 매출을 냈는데, 웬걸? 다음해 매출이 원점으로 돌아와버린 거예요.
웅진의 성장 비결 중 하나인 방문 판매를 활용한 전략이 먹혔던 건데, 감사해보니 방판 조직이 인센티브를 노리고 사재기를 한 바람에 매출 거품이 잔뜩 꼈던 거죠. 이미 회장님 고향에 화려한 새 공장까지 올리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개망신 위기였던 겁니다.
사정을 듣고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1년 안에 히트 상품 들고 공장 앞에서 사진 찍게 해드리겠다.” 이 말, 부임 직후 바로 후회했습니다. 1만평 부지에 커다란 2000평 공장 건물이 떡 하니 올라와 있는데 사업 계획은 완전 백지 상태이니 막막하더라고요. 명색이 식품 회사이니 음식을 만들긴 해야겠는데 된장을 만들어야할지, 고추장을 찍어내야할지…
왜 하필 음료 사업을 시도하신 건가요?
음료는 어떤 제조 사업보다 리스크가 작더라고요. 보통 제조업에선 기존 제품이 실패해 다른 걸 만들려면 설비를 다 바꿔야 하는데 음료는 그럴 필요가 없었어요. 용기 업체들이 표준 규격의 용기를 생산해, 음료 제조사들은 거기에 내용물만 서로 다르게 담아 팔았으니까요. 리스크가 작아 윗선 설득도 일사천리였죠.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과연 어떤 음료를 만드느냐.’
어느날 한 영업직 동료에게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자사 약국용 대추 드링크가 요즘 잘나간다는 거예요. 조사해보니 다른 드링크 매출은 그대론데 유독 대추만 오름세더라고요. 이걸 음료화한 게 제 인생 첫번째 히트작, ‘가을대추’였습니다. 당장 시제품을 만들어 테스트하려 했죠. 그러나 곧바로 벽에 부딪혔습니다. “삼계탕에나 들어가는 대추를 누가 돈 주고 음료로 사먹겠냐”고 다 반대했거든요. 연구소장은 아예 시음료 개발도 안 해줬습니다.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조운호님/리멤버
<“내가 만들 제품에 몰입하니 디자인도, 광고 키카피도 절로 떠올랐죠. 그런데 시제품 테스트조차 못 한다? 도저히 못 배기겠더라고요.”>
그럼 어떻게 출시하신 건가요?
분명 성공할 거란, 아니 성공을 뛰어넘어 사랑 받을 거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저 같은 30대 남성 직장인들에겐 마땅히 찾을 일상 음료가 없었어요. 애들이 좋아하던 콜라·사이다는 입맛에 영 안 맞고, 인삼 음료 같은 건 고리타분해 잘 안 마셨거든요. 타향살이에 일도 가장 많이 하는 고단한 사람들인데 헛헛함을 달래줄 가족들도 없어 대강 술이나 마시고 뻗는 게 다반사였죠.
하지만 일상을 언제나 술로 달랠 순 없잖아요? 가을대추가 충분히 이들의 마음과 일상을 파고들 거라 봤어요. 어느 고향에나 있고 적적한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게 대추나무잖아요. 당시 30대 남자들한테 묘한 감상을 자아낼 거라 믿었죠. 가을대추를 즐기며 남모를 적적함을 묘하게 공감 받을 거라 충분히 확신했어요.
이렇게 언제 어디서든 가을대추 생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잘 익은 대추를 연상케 하는 붉은 라벨 디자인도, ‘가슴을 적시는 음료’란 광고 키카피도 절로 떠올랐죠. (지금도 엄청 성공한 디자인과 키카피로 업계에서 종종 회자됩니다.) 이 모든 게 아른거리는데 시제품 테스트조차 못 한다? 도저히 못 배기겠더라고요.
결국 시음료 없이 외부 소비자 조사를 감행했습니다. ‘꼭 맛이 1순위 구매 기준일까?’란 의문이 퍼뜩 스쳤거든요. 시음료병엔 울며 겨자먹기로 진한 대추 드링크를 채웠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의외로 반응이 너무 좋았습니다. “왜 이런 음료가 진작 안 나왔냐”고들 반기는 거예요. “너무 진해 맛이 없으니 안 사먹겠다”는 반응은 없었어요. “맛이 가벼워지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의견만 있었죠.
회장님을 비롯한 본사 경영진을 다 모시고 신제품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위의 조사 결과를 기습 공개하면서 말이죠. 연구소장이 그 자리에서 왕창 깨졌습니다. 이후 부랴부랴 음료를 개발해오더라고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출시 첫 달에만 40만개가 팔렸고, 첫 해 매출을 170억원이나 올렸어요. 거의 30년 전이니 지금 물가론 400억원쯤 되죠. 만년 적자 계열사가 100억 넘는 이윤을 남겼으니 회장님 기분은 째졌죠 뭐. 1년 전 회장님과의 그 약속도 멋지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왜 성공 1년도 안 돼 본사로 돌아오신 건가요?
성공에 탄력을 붙이려고 영업 이사를 한 명 뽑아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런데 해태제과에서 사장을 지낸 거물급 인사가 내려오더라고요. 아예 대표로 말이죠. 그분의 경영 방침과 제 의견이 너무 엇갈렸습니다. 해태 제품 따라잡기에 급급해하시더라고요. 저는 차별화된 우리 음료를 자리 잡게 하는 게 먼저라고 봤는데… 회장님께서는 34살의 어린 저보단 그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제가 본사로 쫓겨오게 되죠.
1995년 출시된 가을대추/웅진식품
Chapter. 3
아침햇살로 화려한 복귀! 60점짜리 음료의 연매출 천억 반전?
격렬한 내부 반대에도 보란듯 아침햇살 대성공
맛뿐 아니라 주식과 조화 중요하단 힌트 얻고
“한국 음료로 코카콜라 이기자!” 필생 사명 돼
3년 만인 1998년에서야 웅진식품으로 복귀합니다.
그간 웅진식품은 누적 450억원의 적자 회사가 돼 있었어요. 어떤 구원 투수가 와도 실패했고, 모두가 자포자기였죠. 3년간 와신상담하던 제게 드디어 웅진식품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헌데 직책이 영업부장이었어요. “더이상 신제품 개발 투자는 없으니, 영업으로 기존 제품들만 살려놓으라”는 거였죠.
신제품 없인 죽도 밥도 안 될 거라 봤어요. 하지만 그걸로 핑계 댄다고 할까봐 더 죽어라 일했습니다. 3개월간 전국을 밤낮 없이 돌았어요. 귀·코·편도선에 염증을 달고 살았고, 쓰러지면 링거만 잠깐 맞고 다시 나갔습니다. 그래도 안 되더라고요. 이젠 신제품 개발이 필요하다고 경영진에게 강변했죠. 겨우 조건부 허가를 받았습니다. “제품 출시회나 광고는 물론 소비자 조사조차 못한다. 초도 생산 이외에 내줄 비용은 없다.” 음료 사업에서 차, 포는 물론 졸까지 떼버린 건데… 별 수 없이 넙죽 오케이 했습니다.
복귀 반년도 안 돼 메가 히트작 ‘아침햇살’을 만듭니다. 그런데 시음 뒤 병을 집어던지는 분도 있었다고요?
누가 봐도 한국향이 물씬 나는 ‘한국의 시그니처 음료’를 만드는 게 콘셉이었어요. 이 콘셉에서 주 원료, 이름, 디자인을 다 잡았죠. 쌀을 주 원료로 삼았고, 이름은 한국의 대표 이미지인 아침과 쌀(그중 햅쌀)에서 따왔죠.
3개월 만에 시제품을 만들어 회장 승인을 받고, 부회장한테도 보고차 갖다드렸어요. 그런데 웬걸? 맛을 살짝 보더니 병을 던져버리지 뭡니까. “망해가는 회사 정리하라고 보내놨더니 듣도 보도 못한 음료로 고집 부린다”고 언짢아하면서요. 다른 경영진들도 다 비웃었어요. ‘두고 보라’고 다짐하며 나왔습니다.
출시 첫달 매출 25억원. 광고가 없던 걸 감안하면 쾌조의 스타트였습니다. 특히 다음달 재구매 반응이 좋았어요. 광고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소비자 조사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상부에선 그조차 못하게 했다면서요?
밤새 고민하다 꾀가 떠올랐어요. 가을대추 때 소비자 조사를 맡겼던 그 회사한테 찾아가 “무비용으로 조사 좀 다시 해달라. 나중에 대신 광고를 맡겨주겠다”고 설득했습니다. 흔쾌히 수락해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100점 만점에 60점을 받게 됩니다. 팀원들 모두 기대 이하로 받아들였죠.
하지만 저는 ‘옳거니!’였습니다. 조사 결과를 정리하면 이랬어요. ‘처음 보면 쌀뜨물 맛이 연상돼 기대가 낮다. 그런데 마셔보니 맛은 괜찮더라.’ 재구매 반응이 좋았던 이유가 분명히 이해되잖아요. 기대치가 낮으니 ‘혹시나?’ 하고 마셔본 고객들한테 더 큰 짜릿한 반전감을 준 거였죠.
광고를 잘해서 한번 마시게끔만 하면 대성공이겠단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고부터 쳤습니다. 회장님 결재도 받기 전에 무작정 광고를 준비한 거예요. 당대 최고 스타인 김국진·강호동까지 섭외했습니다. 빌고 빌어서 촬영 3일 전에야 겨우 결재를 받았습니다.
결과는 어땠나요?
온동네 꼬마애들이 아침햇살 CM송을 따라불렀어요. 그야말로 열풍이 불었죠. 출시 10개월 만에 1억병이 나가고 판매 첫해엔 400억원, 이듬해엔 1000억원 이상의 매출이 났습니다. 매년 150억원 적자를 내던 계열사가 1년 만에 대반전을 이룬 거죠. 아울러 이 성공은 단순한 승승장구의 계기에 그치지 않았어요. 평생토록 몰입할 필생의 사명을 깨닫게 해줬습니다.
<“우리 음료로 코카콜라 이길 수 있겠단 믿음을 준 게 아침햇살 성공이 가져다준 가장 큰 기쁨입니다.”>
그 사명이란 무엇이었나요?
당시 국내 음료 90%가 전부 외산이었어요. 코카콜라 같이 직접 등판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라도, 대기업들이 썬키스트·델몬트처럼 판권을 구매해 파는 제품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나머지 10%마저 일본산 짝퉁 제품들이었고요.
사업을 하면서도 이해가 안 돼 화가 많이 났습니다. ‘왜 유독 우린 남의 나라 음료를 즐겨 마실까?’ 며칠간 이 궁리만 했어요. 한번 궁리에 빠지면 나름의 답을 얻을 때까지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거든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음료의 탄생으로까지 거슬러 갔습니다. 거기서 마침내 해답을 찾았어요.
음료는 캔·페트병 같은 용기가 나오고서야 발명된 개념이잖아요. 이 용기에 각 민족은 가장 먼저 무엇을 담았을까요? 바로 주식과 가장 잘 페어링되는 걸 담았겠죠. 미국은 느끼한 햄버거와 어울리는 콜라, 일본은 생선 음식과 잘 어울리는 떫은 맛의 녹차를 말이죠. 두 음료는 그 문화권의 오랜 시그니처 음료로 자리 잡게 됩니다.
결국, 하나의 음료가 널리 사랑 받기 위해선 단순히 맛이 아니라 문화적 코드까지 헤아리고 아울러야 하는 것이었어요. 헌데 국내 음료사들은 이걸 놓쳐 그저 해외 음료 따라잡기에 급급했고, 그 결과 우리가 사랑할 시그니처 음료가 전무하단 깨달음을 얻게 됐습니다.
내 손으로 제대로 된 한국인의 시그니처 음료들을 만들어 코카콜라를 이겨보자는 꿈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가을대추와 아침햇살의 성공은 작지만 확실한 그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배우 송혜교와 함께 직접 아침햇살 광고에 출연했던 조운호님/본인 제공
Chapter. 4
38세 최연소 대표 등극! 대리점 100군데 아우른 리더십은?
매출 고속 성장 비결은 조운호식 리더십
쌓여 있던 재고 전량 회수해 대리점 불만 덜고
인센티브 방식 개편해 성취 욕구 끌어올려
아침햇살 출시 직후인 1999년 3월, 38세로 웅진식품 최연소 대표이사가 됩니다.
아침햇살 판매 기세가 막 오를 때 임명됩니다. 기호지세라고 하잖아요. ‘한번 호랑이 등에 탔으면 주저하지 말고 더 자신있게 나아가야 한다’는 회장님의 취지였던 거죠. 어리다고 주눅들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첫 회의 때부터 회장님이 앉던 상석에 앉아버렸습니다. 원래 웅진식품 회의엔 못 미더우셨는지 회장님이 매번 참석하셨거든요. 대표는 사이드에서 회의를 주재하고요. 회장님도 제 의도를 헤아리셨는지 회의에 더는 안 오시더라고요.
하지만 더 큰 난관은 100군데가량의 대리점들이었어요. 여기서 열심히 발벗고 뛰어줘야 매출이 탄탄히 오를 수 있었거든요. 어린 저를 향한 불신들은 느껴지는데 일일이 개인적 라포를 쌓는 것도 물리적인 한계가 있겠더라고요.
<“경영도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일이더군요. 왜 더 열심히 일하지 않는지,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 정확히 꿰뚫어 보는 게 필요했습니다.”>
어떻게 대리점들을 콘트롤하셨나요?
경영이란 것도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하는 일이더군요. 직원들 위로해주고 껴안아주고 눈물 한번 닦아준다는 뻔한 얘기가 아닙니다. 왜 더 열심히 일하지 않는지, 열심히 하려 해도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 그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게 필요했단 얘기입니다.
취임하자마자 대리점들의 불만을 접수했어요. 가장 큰 불만을 단숨에 처리해주겠다고 공언했죠. 그게 바로 처치 곤란의 재고들이더군요. 이 재고들을 전량 회수해주기로 결정했어요. 그만큼 취임 첫달 매출이 고스란히 깎이니 뼈아팠지만요. 대표도 새 출발하는 마당에 대리점들도 홀가분하게 새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봤어요. 대신 매출이 검증돼 가고 있던 아침햇살을 더 받아가게 했죠. 대리점주들 입이 귀에 걸리더라고요.
다음으론 인센티브 체제를 개편했어요. 원래 대리점들이 매출 목표를 달성하면 각자 매출에서 4%를 떼 줬는데, 이제 목표를 2배로 높이되 회사 전체 매출의 3%를 나눠갖기로요. 노릴 수 있는 파이가 커지니까 구미가 당겼나 봅니다. 목표가 커졌는데도 달성률이 6개월 만에 9배나 늘게 됐어요. 더 나중엔 대부분이 목표를 채웠고요.
매출을 더 키워야 하니 이제 목표를 더 올려야 했는데, 그럼 사기가 저하될 게 뻔하더라고요. 열심히 일 잘했더니 더 큰 압박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니까요. 궁리 끝에 현금 인센티브를 폐지하기로 했습니다.
왜 현금 인센티브를 없앴나요?
대리점들도 압니다. 매출을 확 키우려면 트럭을 1대라도 더 동원해 영업을 돌리는 게 능사라는 걸요. 하지만 매출이 올라도 아무도 트럭을 더 사질 않더라고요. 하루는 대리점주 한명한테 그 이유를 물어봤어요. “몇년간 적자만 보다가 이제야 돈 좀 만지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트럭에 돈을 씁니까?” 돌아온 답이었어요.
그 순간 묘안이 떠올랐어요. ‘인센티브로 현금을 주지 말고 영업 트럭을 사주자!’ 인간은 번민의 동물이잖아요? 원래 자기 손으론 못 사는 물건도 남이 돈 받아가서 사오면 잘 받거든요. 자기 돈 나가는 건 똑같은데도요. 새 방침이 나오니 자신감이 다들 부족해 반신반의들 하더라고요. 목표 달성을 전제로 첫 트럭들을 먼저 사줘봤어요. 결과적으로 도로 트럭을 뺏긴 대리점은 거의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취임 4년이 지나자 회사 매출이 2700억원 규모로 40배 이상 껑충 뛰었습니다.
사실 위 제도들은 사재기 우려가 커 상당히 리스크가 있었습니다. 좋은 제품이 뒷받침돼 잘 풀려서 다행이었죠. 하지만 거꾸로 보면 아침햇살에서 초록매실, 하늘보리 등으로 이어지는 제품들의 연타석 성공도 이 리더십 콘트롤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성공은 천재적인 영감만으로 이뤄지는 게 절대 아니거든요.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조운호님/리멤버
Chapter. 5
연이은 성공, 음료 문화도 바꾼 ‘한국의 음료왕’
아침햇살 넘은 초록매실…후식 음료 다양화 계기
일본 녹차 시장 착안해 만든 하늘보리도 성공
현지 제품 안 만드는 코카콜라도 따라와
1999년엔 아침햇살뿐 아니라 초록매실도 만드셨습니다.
초록매실은 매실청에서부터 탄생한 아이디어였어요. 어느날 홈쇼핑 납품업자가 매실청을 대량으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넣었어요. 잘 팔릴 것 같다더라고요. 솔깃했지만 개봉하면 금방 상해버린대서 없던 일로 됐죠. 그런데 그날부터 자꾸 매실이 아른거렸어요. ‘왜 그 업자는 매실청이 성공할 거라 봤을까?’ 또 궁리가 시작됐죠.
매실은 동북아에서만 재배되는 거진 고유 과일이었어요. 옛부터 생과일로는 절대 안 먹는데 절여서라도 즐겨 먹었더라고요. 한국인한테 묘하게 끌리는 맛을 가진 과일이란 확신이 들었죠. 매실청은 상품화할 수 없어도 매실 음료는 가능하지 않겠나 싶었어요.
국내 최초로 출시 첫해 1000억원 매출이란 초대박을 쳤습니다.
코카콜라도 아직 못해본 기록입니다. 아침햇살이 출시 10개월 만에 1억병을 돌파했는데, 초록매실은 7개월 만에 넘었어요. 기세가 처음부터 엄청났죠. 광고 모델이었던 조성모도 “널 깨물어주고싶어”로 국민 스타 반열에 오르고. (웃음)
매출 대박보다 더 기뻤던 게 있습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식당 후식으론 사이다·콜라·커피만 나왔어요. 그런데 초록매실 이후론 매실차 등 국산 음료로 다양화되기 시작했어요. 제가 초록매실 원액을 식당마다 납품한 게 시발점이 됐습니다. 하나의 문화를 형성했단 자부심이 제겐 더 큰 기쁨을 줬어요.
웅진식품 앞에서 초록매실을 들고 있는 조운호님/본인 제공
<“입가심이 필요할 때 콜라·주스가 아니라 우리 보리차 음료를 마실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단 게 가장 설렜어요.”>
이듬해인 2000년엔 최초의 보리차 음료인 하늘보리도 히트시킵니다. 왜 차를 음료로 만드셨나요?
이미 일본에선 녹차 소재 음료가 엄청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차를 참 즐겨 마시는데 왜 이걸 음료로는 만들고 있지 않을까 의아했죠.
특히 잘만 만들면 하나의 문화를 형성할 만큼 대단한 파급 효과를 가질 시장이겠더라고요. 처음 하늘보리를 만들 땐 다들 보리차 티백 시장 정도의 크기로 시장 잠재력을 추산하던데 완전히 잘못됐다고 봤습니다. 일본은 차 음료 시장만 10조원인데 한국은 생수까지 포함한 전체 음료 시장 규모가 고작 5조원이었어요.
인구차를 감안해도 너무 큰 차이잖아요. 그렇다고 일본 사람들이 유달리 음료를 많이 마셔대는 건 아닐 테고요. 이건 한국에 차 음료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라 해석됐어요. 연간 보리차 티백 판매량을 500ml 음료로 치환해 잠재 시장 규모를 따져보니 최소 1조원은 나오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하늘보리가 히트를 치니까 롯데, 해태, CJ, 광동제약 등 난다 긴다하는 음료 업체들이 전부 보리차 음료로 따라오면서 시장이 팽창하더라고요. 심지어 로컬 제품은 절대 안 만들던 코카콜라마저 보리차 음료엔 손을 댔습니다. 물론 이들한테 하늘보리가 여지껏 진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웃음)
이렇게 시장 전체를 흔드는 성공은 하나의 문화를 형성할 수 있더라고요. 옛날에 집집마다 입가심으로 늘 숭늉을 마셨듯, 오늘날에도 언제든 입가심이 필요할 땐 콜라나 오렌지가 아니라 우리만의 보리차 음료를 마실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단 얘기입니다. 이 사실이 절 가장 설레게 했어요.
2000년 출시된 하늘보리/웅진식품
Chapter. 6
짧은 외도 후 창업과 좌절… 천일간의 108배 끝 확인한 초심은?
웅진식품과 7년 동행 후 의료기기사 세라젬행
건식 음료 사업 도전하고자 2009년 창업
덤핑·광고 공세 못버텨 7년만에 회사 넘겨
2004년 과채 주스(자연은) 출시로 3번째 1000억원 연매출을 달성합니다. 그런데 이듬해 갑자기 대표에서 물러났어요.
어느날 회장님이 제게 부회장 자리를 제안하시더라고요. 그게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정중한(?) 표현이었던 겁니다. 고문보단 영광스러운 예우 아니냐며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사실 제가 왜 물러나야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주변의 질시를 받아 회장님께 안 좋은 얘기가 꾸준히 흘러들어간 것 같긴 한데… 어디까지나 추측이에요.
2006년, 웅진식품을 떠나 별안간 의료기기로 유명한 세라젬그룹에 부회장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계기였나요?
한창 때인 44살이었어요. 여기저기서, 심지어 정치권에서도 러브콜이 왔어요. 죄다 거절한 상황이었는데 어느날 세라젬 회장님이 저를 몹시 만나고 싶다고 지인을 통해 연락을 주시더라고요. 예전에 골프도 한번 같이 친 사이라 나갔죠.
제게 신사업을 좀 꾸려달라고 강력히 요청하시더라고요. 저를 3년이나 유심히 지켜봤다면서요. 잘나갈 땐 절대 안 올 것 같아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골프도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 쳐봤었다는 거예요. 좀 섬뜩했어요. (웃음) 그래도 얼마나 맘에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지켜봤을까 싶었어요.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하지만 3년 정도만 있다가 금방 나오셨습니다.
신사업으로 건강 음료를 강력히 제안했거든요. 회장님은 찬성했지만 나머지 경영진이 반대해 결국 채택이 안 됐습니다. 몇백만원짜리 기기만 팔던 와중에 몇천원짜리 음료를 팔자니 구미가 안 당겼을 것 같아요. (지금은 음료도 하고 있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음료가 이미 운명이 됐는지 음료 이외엔 아무 것도 하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나왔습니다.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조운호님/리멤버
<“사명은 바래지고 생계형 일꾼이 돼 있더라고요. 결국 후배한테 회사를 넘기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직접 차리신 건가요?
2009년 ‘얼쑤’란 이름의 음료 회사를 창업해 7년 정도 운영했어요. 음료에도 인도어(indoor)와 아웃도어(outdoor)가 있다고 봤어요. 아웃도어가 흔히 생각하는 용기에 담긴 액상 음료라면, 인도어는 물에 타 먹는 음료였죠. 이 시장을 제대로 타겟한 음료 회사가 없다고 판단해 도전했습니다. 친환경을 특색으로 해 ‘자연한끼’란 이름으로 신제품을 내놨어요. 이게 터졌습니다. 일본 홈쇼핑에서까지 연락이 와 방송 7번에 100억원 매출도 올렸어요.
그러나 이어진 경쟁사들의 덤핑과 광고 공세를 당해낼 재간이 없더라고요. 어느새 매출은 줄고 직원 봉급 걱정만 하게 됐습니다. 돈을 빌리러 다니기도 하고요. 한국 시그니처 음료로 세계 시장에 도전하겠단 사명은 바래지고 그저 그런 생계형 일꾼이 돼 있더라고요.
초심을 찾고자 1000일간 108배를 했습니다. 도중에 점점 양을 늘려 200배, 300배, 급기야는 하루 3000배까지도 했습니다. 12시간에 걸쳐 3000배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과거 장구를 치며 휘모리를 칠 때와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됐어요. 머리가 하얘지면서 ‘음료’ 두 글자만 남더라고요. 그때 다시 깨달았죠. ‘나한텐 오너로서 이름을 빛낼 회사가 필요한 게 아니구나. 내가 몸바쳐 일할 사명이 더 중요하구나!’ 결국 후배한테 회사를 넘기고 나왔습니다.
2009년 출시된 자연한끼/본인 제공
Chapter. 7
돌아온 음료왕! 조운호의 라이벌은 조운호?!
한국만의 숭늉 문화서 착안해 출시한 블랙보리
본인 작품 하늘보리가 20년 독주한 판 흔들고
보리차 음료 시장 규모 2배 성장 이끌어
2017년, 11년 만에 드디어 액상 음료 업계로 복귀합니다. 하이트진로음료의 대표이사가 되신 건데요. 어떤 계기였나요?
1000일 기도를 다 마칠 무렵, 절묘하게 하이트진로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아시다시피 주류로 유명한 회사인데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고민이 좀 깊더라고요. 소주는 여전히 잘나가는데 맥주는 선두 탈환이 쉽지 않았던 거예요. 음료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려 했는데 자체적으론 잘 안 됐던 거죠. 이쪽 전문가를 찾다가 저하고 연결이 된 겁니다.
음료에 목말라있던 저로서도 이 기업이 참 맘에 들었어요. 거진 100년간 술·물 같은 범음료만 다뤘더라고요. 뚝심 있게 한길만 판 거죠. 여기 음료 사업을 키우러 하이트진로음료의 대표로 가게 됩니다.
부임 직후 블랙보리로 연매출 250억원의 성공을 거둡니다. 하늘보리에 이어 왜 또 보리차 음료였나요?
하늘보리는 약 20년간 보리차 음료 왕좌에 있었어요. 온갖 회사가 경쟁에 나섰지만 전부 점유율 10% 이상을 못 가져갔죠. 그런데 시장 규모는 연간 수백억원으로 제자리였습니다. 앞서 제가 차 음료 시장을 1조원으로 내다봤잖아요. 이쯤 되면 3000억원쯤은 팔아야 했거든요.
마침 블랙보리가 나온다니까 웅진에서 저한테 푸념을 늘어놓더라고요. 그래서 한마디 해줬죠. “그간 뭘 했길래 그거밖에 못하고 있었냐. 걱정 말고 두고 봐라. 우리끼리 뜯어먹는 게 아니라 코카콜라랑 싸우고 있을 테니까.”
장담은 어느 정도 실현됐습니다. 출시 직후 블랙보리가 점유율 30%를 먹었어요. 헌데 하늘보리의 파이를 뺏는 방식이 아니었죠. 보리차 음료 시장 전체가 2배 가까이 커진 겁니다. 출시 2년 만인 2019년엔 보리차 음료가 옥수수 수염차·헛개차 음료를 누르고 전체 차 음료 시장에서 1등을 차지합니다.
롯데·코카콜라·동서식품·CJ 등 보리차 음료에 뛰어들었던 경쟁사들은 다 난리가 났죠. 20년간 용을 써도 흔들리지 않던 판인데 조운호가 돌아오니 단박에 판이 바뀌었다고. (웃음)
2017년 출시된 블랙보리/하이트진로음료
<“보리차 음료 시장의 잠재력을 제대로 고찰한 것. 그게 블랙보리 성공의 비결입니다.”>
후발주자였던 블랙보리만 유독 발군이었습니다. 무엇이 주효했을까요?
일단 쉽게 말하면 차별화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육종을 통해 탄생한 최초의 검은 보리를 주 원료로 쓴 게 주효했죠. 기존 누런 보리에 비해 식이섬유랑 항산화 물질이 몇배씩 많으니 “이젠 까만 보리의 시대가 왔다!”는 메시지가 통한 거죠.
하지만 너무 단순한 설명이죠? (웃음) 기존 경쟁사들은 왜 이런 차별화에 실패했을까를 봐야합니다. 이들은 보리차 음료 시장이 왜 부상했고, 왜 더욱 부상할 잠재력이 있는지를 제대로 고찰해내지 못한 거예요. 고작 디자인이나 맛 등 협소한 관점으로만 봤기 때문에 그저 그런 경쟁작들을 내놓은 겁니다.
쌀·보리 숭늉은 한국인의 주식과 잘 어울리는 명실상부 최고의 페어링 음료예요. 밥이 주식인 나라는 많지만, 숭늉을 끓여먹는 건 한국밖에 없어요. 김치나 젓갈 등 발효 음식을 즐겨 먹는 우리한텐 입냄새를 잡아주고 개운하게 입가심해줄 숭늉이 찰떡이었으니까요. 오죽하면 쌀, 보리 한톨이 아까운 가난한 시절에도 굳이 밥을 눌러붙여 숭늉을 만들어 마셨겠어요.
게다가 다른 음료들과 달리 건강에도 좋습니다. 콜라·주스는 물론 스포츠 음료들까지 전부 설탕과 카페인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홍차·녹차는 카페인이 많습니다. 그러나 보리차 음료는 몸에 아무 부담을 안 주고 오히려 이롭습니다. 저는 숭늉을 음료화해낸 걸 평생의 자부심으로 느끼며 살고 제 음료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보리차 음료와 그 시장을 바라보는 것과 아닌 것은 진정 천지차이일 겁니다.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조운호님/리멤버
Chapter. 8
‘K-음료 세계화’ 꿈은 계속된다
주인처럼 일해도 진짜 주인될 순 없어
후배 직장인들은 오너십 대신 아너십 가졌으면
한국 음료로 코카콜라 밀어내는 꿈 계속 꿀 것
블랙보리 성공 이후에도 진로토닉워터 리뉴얼(2018년), 무알콜 맥주 하이트제로 리뉴얼(2020년) 출시에도 성공합니다. 그럼에도 작년 여름 대표에서 고문으로 물러나셨습니다.
임기는 다 마치고 나온 겁니다. 실적도 한창 좋았고, 제게도 정말 좋은 경험과 결과물을 만들 수 있던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다만, 오랜 시간 조직 생활을 하면서 느낀 건 무턱댄 오너십(ownership)이 능사는 아니란 점이었습니다.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건 언제나 좋은 것 아닌가요?
저도 그렇게 믿었어요. 늘 제가 진짜 주인인 것처럼 일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오너가 아니고서야 진짜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명백한 물리적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걸 멘탈로 뛰어넘을 순 없어요. 오너십을 뛰어넘는 자기만의 존재 가치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하며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있는 조운호님/리멤버
<“인생 이모작이라 하는데 왜 이기작, 삼기작은 안 될까요?”>
그럼 이 시대 샐러리맨들은 어떤 멘탈리티로 일해야 할까요?
샐러리맨도 주인처럼 온마음을 다해 일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주인보다 더요. 제가 찾은 해법이 바로 ‘아너십(honorship)’입니다. 자기가 일생을 바쳐 몰입할 사명을 찾고 그걸 언제나 존중하고 거기에 자부심을 느끼는 게 바로 제가 정의하는 아너십이에요. 오너십보다 못한 개념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주인은 회사에 묶여서 아너십을 제대로 향유하며 일하기 어려워요. 샐러리맨은 오너십에서 자유롭다 보니 가슴 떨린 과업에 더 충실히 집중할 수 있습니다.
초년부터 지금까지 전혀 다른 업종으로 이직도 해보고, 제 손으로 살린 회사에서 쫓겨나오기도 하며 여러 소속을 전전했어요. 하지만 뚜렷한 저만의 과업에 몰입하며 무아지경으로 살 수 있었기에 늘 설레고 행복했습니다. 후배 직장인 분들도 모두 가슴에 아너십을 새기며 일하실 수 있다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울러 은퇴를 앞둔 동료 직장인 분들, 인생 이모작이라 하는데 왜 이기작, 삼기작은 안 될까요? 나이가 든다고 사명을 바꿔야 할까요? 저는 아닙니다.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한국 시그니처 음료를 세계적으로도 성공시켜 코카콜라를 밀어낸다는 꿈을 계속 꿀 겁니다. 제 생에 안 된다면 후배들이 해낼 수 있게 든든한 발판이라도 마련하고 죽을 거예요. 제 인생의 휘모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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