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현
現 구글 플랫폼·디바이스 정책 부문 글로벌 디렉터, 前 에어비앤비 정책 총괄
구글·에어비앤비 등 세계적 빅테크에서 활약해 온 공공 정책 전략가입니다. 미국 에모리대 경제학과를 나와 IT 벤처, 공무원, 글로벌 자산 운용사 등 다양한 산업·직무를 경험한 뒤 2013년 구글코리아에서부터 대관 업무를 시작합니다. 이후 에어비앤비를 거쳐 2019년 구글에 다시 합류, 현재 플랫폼·디바이스 사업 부문 세계 각국의 정책 이슈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2000년 어느 날, 미국 애틀랜타의 한 고급 호텔 식당. 젊은 웨이터 한 명이 테이블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주문을 받습니다.
갓 스물을 넘긴 한국인 유학생이자 웨이터 중 유일한 동양인인 그. 대뜸 “넌 어디서 온 녀석이냐” 묻는 무례한 질문도 제법 능숙히 맞받아칩니다. “지구란 행성에 언제 왔냐 물어보시는 겁니까?”
능청맞고 당돌한 이 한국인 웨이터는 20여 년이 흘러, 세계 최고 테크 기업의 정책 이슈를 총괄하는 글로벌 리더로 성장합니다.
아시아는 물론 미국·유럽·남미에 이르기까지 각국 정부와 민간을 조율, 새로운 혁신 서비스가 안착하도록 직접 정책 환경을 설계하고 조성하는 임무를 리드하고 있죠.
오늘 프롤로그는 바로 이 대관(對官), 즉 공공 정책 전략 분야의 국내외 최고 전문가 중 하나로 손꼽히는, 구글의 글로벌 정책 디렉터 이상현님이 그 주인공입니다.
POINT OF VIEW
“매사에 진심을 담아 일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프로예요. 거래를 넘어 협력을, 혼자가 아닌 모두를 이루는 건 결국 진심이거든요.”
25년 전, 그의 오늘을 상상한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호텔 식당, IT 벤처, 정부 조직을 거쳐 또 한 번의 유학, 곧이어 글로벌 자산 운용사에서의 3년, 그리고 돌연 빅테크 대관 직무자로 변신하기까지, “꽂히면 무조건 직진”이란 그 기질대로 스스로에게조차 예측 불허의 연속이었죠.
하지만 동시에 그 모두는 필연으로도 기억됩니다. 패기 넘쳤던 초년 시절부터 오늘날 각국 정부와의 진지한 협의 테이블까지 매 순간이 그에겐 ‘진심’의 저력을 알려 준 과정들이었기 때문이죠.
웨이터, IT맨, 공무원, 펀드 매니저… 분야를 넘나든 방황 끝에 마침내 글로벌 공공 정책 전략가로 발돋움한 이상현님. 별난 진심으로 뭉친 그의 좌충우돌 커리어 여정을 리멤버가 생생히 엮어 봤습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의 이상현님/리멤버
Act 1.
미국 명문대 유학생, 첫 직업은 호텔 웨이터?!
미국 남부의 명문 사립 에모리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이상현님. 그런데 3학년 무렵인 1999년, 별안간 그는 현지 호텔에 취업해 웨이터로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꽤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나셨어요.
중3 때 유학을 갔어요. 원체 호기심 많고 꽂히면 직진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어려서부터 그랬죠. 혼자 종종 생판 모르는 먼 동네까지 걸어갔다 오곤 했어요. 겨우 8살짜리가요. (웃음)
사춘기가 되고 나서부턴 해외 유학에 로망이 생겨요.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죽은 시인의 사회’ 같은 외국 학원물을 탐닉했거든요. 헌데 부모님이 곱게 보내 주실 리 있나요? 돈도 돈인데 중고생 해외 유학 자체가 그땐 드물었거든요. 겉멋 들어 저러나 의심하고 강하게 반대하셨죠.
어찌 설득하셨나요?
6개월 넘게 죽자 사자 매달렸어요. 그랬더니 어느 날 유학을 왜 가고 싶은지 글로 한번 써 보라 하시더군요. 밤낮으로 온갖 책을 뒤져 그럴듯한 답안을 써냈습니다. 그렇게 끝끝내 허락을 받아 냅니다.
꽂히면 누구도 못 말리는 스타일이시네요.
대학 때도 유명했죠. 입학 첫해 IMF가 터져요. 환율이 너무 뛰어 유학비 부담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연세대와의 교환 학생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여러모로 괜찮겠다 싶어 신청하려 했어요. 그런데 막상 알아보니 본교에도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거예요. 도무지 납득이 안 됐습니다. 무작정 총장실로 찾아갔어요.
학점도 엉망인 녀석이 무턱대고 덤비는데, 미국이란 나라 참 대단해요. 무시할 법도 한데 선뜻 이의 제기 기회를 주더라고요. 기회는 이때다, 밤새 이의서를 써냈고 결국 학칙에 예외 조항이 생겼습니다. 덕분에 연세대에만 학비 내고 한 학기 잘 다녀왔죠. 뒤따라 한국인 후배들도 많이 갔어요.
재학 중 돌연 웨이터 생활을 하세요. 어떤 계기였나요?
3학년 때쯤 영주권이 생겨요. 미국에서 돈을 벌 수 있게 된 거죠. 이때부터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합니다. 당장 학비부터 벌어야 하니 휴학하고 일자리를 알아봤어요.
헌데 막상 막막하더군요. 한국이면 과외라도 뛸 텐데 여긴 할 만한 게 없었죠. 그나마 가장 잘하리라 본 게 웨이터였어요. 신체 건강하고 빠릿빠릿한 편이니까요. 그래서 무작정 도전했는데 웬걸, 연달아 식당 두 곳에서 일주일 만에 잘립니다.
무슨 이유로요?
워낙 못해서요. 고급 식당 웨이터한텐 엄격한 룰이 있어요. 예를 들어, 서빙하면서는 절대 멈춰선 안 되고 뒤돌아봐서도 안 됩니다. 접시도 한 번에 6개까진 들 수 있어야 하죠. 무지 까다로워요. 저 같은 초짜는 발도 못 붙일 만큼요.
그래도 삼세번은 해 봐야죠. 다행히 세 번째인 그랜드 하얏트엔 안착했습니다. 여기가 2년을 동고동락한 제 인생 첫 직장이에요.
이곳도 적응이 만만찮았을 듯합니다.
실력은 점차 나아졌어요. 다만 학생으로서 계속 애로가 컸죠. 웨이터한텐 저녁 타임이 압도적으로 인기가 많아요. 팁이 식사비에 비례하거든요. 그래서 규칙을 정해 며칠씩 강제로 점심을 뛰게 했는데, 그게 저로선 무척 난감했습니다. 틈틈이 복학해 학업 진도도 빼야 하는데 그럼 학교를 아예 못 다니잖아요.
그래도 늦지 않게 학업을 마치셨잖아요?
어느 날 이 사정을 동료들이 알게 돼요. 그리곤 모두 하루씩 더 점심을 뛰어 주기로 했죠. 죄다 형편이 좋지 못한 이들이었는데 기꺼이 손해를 감수해 준 거예요. 그랜드 하얏트가 인생 첫 직장인 건 이처럼 사회를 살아가는 미덕이나 지혜, 그리고 눈치까지 전부 생생히 가르쳐 줬기 때문이기도 해요.
구체적으로 더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웨이터는 작은 행동거지만 봐도 손님이 무엇을 원하고 싫어할지 바로 캐치할 수 있어요. 손님한테 제일 먼저 받는 게 음료 주문이거든요. 이때 “물 주세요”가 곧바로 튀어나오는 분들은 서빙도 빨라야 뒤탈이 없어요. 십중팔구 성격이 급하거든요. 반면 와인 하나하나까지 살피는 분들은 늦어도 괜찮아요. 세상 느긋하거든요.
그리고 임기응변에도 능해집니다. “넌 어디서 왔냐”고 대뜸 물어보는 손님들이 계셨어요. 제가 거기 태생일 수 있는데 무례한 질문이죠. 만약 초짜면 “한국 사람” 정도로 답했을 거예요. 하지만 베테랑은 이렇게 답하죠. “지구란 행성에 언제 왔냐 물어보시는 겁니까?”
순진하게 답하면 인종 차별로 흐르기 십상입니다. 그렇다고 성을 낸다? 무조건 잘려요. 최선은 손님을 피식 웃게 만드는 거예요. 일단 웃기기만 하면 대화는 무조건 유쾌하게 풀리니까요.
일반화할 수 있을까요?
완벽하진 않죠. 다만, 웨이터의 삶은 서바이벌이에요. 하루종일 신경을 곤두세워 온갖 군상을 상대하죠. 그 나름의 결과라 어설프지만은 않을 거예요.
아무튼 그땐 이 시기가 제게 얼마나 값진 건지 미처 몰랐습니다. 그저 정신없이 바쁘기만 한 나날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때 겪고 배운 것들이야말로 제게 일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의 미묘하고 섬세한 차이들을 헤아릴 수 있게 해 준 귀중한 밑거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이상현님/리멤버
Act 2.
좌충우돌 IT 청년, 관료 사회에 뛰어들다!
유학을 마치고 국내 IT 회사에 재직하던 이상현님은 2004년 중앙인사위원회(현 인사혁신처)에 입직, 돌연 중앙 부처의 공무원이 됩니다.
현지 취업 대신 국내 IT 벤처에 다니셨어요.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저만 개인 PC가 있었어요. 인터넷이란 걸 제일 먼저 접한 학생도 저였는데, 거기 홀려 완전 마니아가 됩니다. 온종일 웹 서핑만 하는 건 예사고 나중엔 자체 홈페이지까지 만들 정도로 푹 빠져 살았죠.
그러다 대학 졸업 전 마지막 방학을 한국에서 보내요. 제가 쓰던 웹 페이지 제작 툴이 국산이었는데 한번 거기서 일해 보고 싶더라고요. 다짜고짜 그 소프트웨어 개발사에 연락해 인턴을 시켜 달라 졸랐습니다. 그 패기로 나중엔 정직원까지 됐어요.
그런데 느닷없이 공무원이 되세요.
벤처에서 일하는 거, 진짜 재밌었어요. 온갖 일을 다 해도 전부 주도적으로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회사 생활 4년차쯤 접어드니 슬슬 고민이 되더라고요. ‘계속 이 업계에 머물러야 하나? 아니, 한번 다른 분야에도 도전해 볼까?’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일단 공부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GRE나 LSAT도 준비해 보고 서강대에서 야간으로 경영학 석사 수업도 들었죠. 그러던 어느 날 캠퍼스에서 중앙인사위원회 채용 공고를 발견해요.
당시 제도 개혁 붐이라 민간 경력직도 공직에 활발히 채용했거든요. 왠지 모르게 끌리더라고요. 뭐라도 해답을 찾겠지 하는 심정으로 문을 두드렸어요.
거기선 어떤 업무를 하셨나요?
정책 보고서나 연설문 작성 업무를 주로 맡았습니다. 헌데 처음엔 너무 애먹었어요. 피드백대로 이미 여러 번 고쳤는데 결국 전혀 예상 못한 안으로 최종 결재가 떨어지더라고요. 도무지 종잡기 힘들었죠.
하지만 차츰 깨닫습니다. 관료 사회에서의 일이란 게 단순히 자료를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가다듬는 것만으론 부족하단 걸요. 가벼운 정책 문서 한 장에도 부처마다 너무 다른 이해관계가 얽혀 있더라고요.
여기선 거들떠도 안 보는 조항이 저기선 극히 예민한 쟁점일 수 있던 거죠. 하나의 정책을 수립하려면 얼마나 많은 부처들의 입장을 고려하고, 전략적으로 조율해야 하는지 생생히 배운 순간들이었어요.
원하던 해답은 못 찾으셨나 봅니다. 공무원 역시 3년 만에 관두셨어요.
장관(위원장)님을 모시고 해외 출장을 다니던 일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수십년간 행정학을 연구한 대학자이자 학계-정부를 오가며 숱한 정책 개발 경험을 쌓은 대가셨거든요.
매번 부담도 컸지만 가까이서 이 거인을 보고 배우는 게 참 많았어요. 빈말이 아니라 매사에 진짜 통찰이 남다르셨죠. 그래선지 저도 선뜻 진로 고민을 털어놓게 되더라고요.
하루는 제 꿈이 뭐냐 물으시길래 “해외 대학원 유학을 고민 중”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고시 출신이 아니다 보니 공직에선 한계가 뚜렷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헌데 장관님 반응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이유로요?
대강 그 자리에서 답하실 법하잖아요. 근데 시간을 두고 충분히 고민해 보시겠다는 거예요. 의아해 이유를 여쭸더니, “자네 인생에 큰 영향을 줄지 모르는데 성심을 다해야 할 것 아니냐” 하시더라고요.
그 순간 뭐랄까, 되게 깊은 울림을 느꼈어요. 나랏일을 맡고 계신 큰 어른인데 말단 풋내기 고민도 전혀 허투루 대하지 않으신 거잖아요. 뛰어난 사람이 정말 뛰어날 수 있는 건 매사에 진심이기 때문 아닐까, 지금 제 업에서도 늘 되묻고 되새기는 태도예요.
그리곤 얼마 뒤, 장관님께 유학 관련 긍정적이고 진심 어린 조언들을 듣게 됩니다. 그게 유학 결심을 굳히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물론 좀 더 ‘내밀한 계기’는 따로 있었지만요.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이상현님/리멤버
Act 3.
MIT, 하버드, SSGA… 그러나 다시 출발선?
2007년 이상현님은 다시 미국 유학길에 올라 MIT와 하버드에서 각각 MBA(경영학 석사), MPA(공공정책학 석사) 과정을 동시에 밟습니다.
그 ‘내밀한 계기’란 무엇인가요?
당시 에모리대 총장단이 한국에 출장을 와요. 부탁을 받아 공식 일정에 동행했는데, 그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 예방이었습니다. 대통령께서 에모리대 명예 법학 박사셨거든요.
사저에서 대통령을 뵙고 잔뜩 긴장해 환담을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문득, 대통령보단 곁에 통역사가 더 눈에 들어오더군요. 감탄이 나올 만큼 통역을 잘했거든요.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요.
그러다 며칠 뒤 이 통역사를 다시 마주칩니다. 바로 같은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요! 알고 보니 한 아파트에 살고 있더군요. 그게 인연이 됐습니다. 그 통역사가 지금의 제 아내예요.
한창 아내랑 연애하던 중 유학을 결심했어요. 결혼 시기는 다가오는데 한국에선 쉽지 않겠는 거예요. 유학 가 미국서 살면 형편이 낫겠더라고요. 기숙사로 주거는 해결이고 MBA는 학자금 대출도 엄청 넉넉히 나오거든요. 아내를 꼬셔 함께 유학을 갔습니다.
MBA랑 MPA를 같이 하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MIT 슬론이랑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 연합 프로그램이 있더라고요. 따로 2년씩, 총 4년은 걸릴 과정인데 3년으로 한 큐에 끝낼 수 있어 덥석 응시했죠.
물론 별생각 없이 지원한 건 아니에요. 입학 시험 에세이에 ‘졸업 10년 뒤 무엇을 할 거냐’는 문항이 있었는데 이렇게 답했습니다. ‘공공 영역과 민간 부문이 만나는 데서 일하게 될 것이다.’ 예언처럼 지금 제 업에 꼭 맞는 말이죠.
그런데 그땐 막연히 정부나 기업 조직 경영을 꿈꿨습니다. 뭔진 몰라도 언젠가 앞장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MBA로는 무언가 뚝딱 일궈 내는 법을, MPA로는 넓게 보고 깊이 사고하는 법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MIT와 하버드, 들어가 보니 어떠셨나요?
MIT는 나름 ‘공대’잖아요. 뜬구름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결과물을 중시하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실제로 RISD(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랑 공동 수업을 열어 창업 아이템을 구상하고 아예 시제품까지 직접 만드는 과정도 있었죠.
하버드 케네디스쿨은 수업이 그 자체로 너무 흥미로웠어요. 리더십, 전쟁론, 협상론 등 깊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경우가 많았죠. 한마디로 같이 술 마실 때 훨씬 매력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웃음) 더구나 여긴 시야가 늘 세계로 뻗어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덩달아 제 시선도 좀 넓어진 듯해요.
사실 중간중간 자책도 많이 했어요. ‘왜 학교를 두 군데나 다녀서 이 고생일까.’ 근데 나이 들수록 새삼 잘한 일이었구나 싶어요. 두 곳을 오가려 3000달러에 베스파 오토바이를 장만했는데 졸업 후 4000달러에 팔았거든요. 생애 최고 투자 중 하난데, 그 가치는 지금도 계속 오르는 중이네요.
2010년 이상현님은 세계 3대 자산 운용사 SSGA(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스)에 들어가 펀드 매니저로 근무합니다. 벤처와 공공 부문을 거쳐 이번엔 금융맨이 된 거죠. 하지만 그도 잠시, 3년 만에 다시 관두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뜻밖에 펀드 매니저가 되셨어요.
먼저 끌리는 대로 이것저것 해 봤어요. 처음엔 사업에 관심이 있어 창업 경진 대회도 나갔습니다. 물론 결과는 실패였죠. 국제 기구 로망이 생겨 프랑스 OECD 연구 인턴도 했는데 막상 재미없더라고요. 맛보기로 경영 컨설팅도 해 봤지만 저랑은 전혀 안 맞더군요.
딱히 진로를 못 정한 채 졸업 무렵이 됐습니다. 아내 대학원이 끝나려면 몇 년은 더 남아 서둘러 취업해야 해 닥치는 대로 원서를 넣었죠. 지원 회사가 100군데는 넘을 거예요. 근데 다 떨어졌습니다. 전부 다요.
그 많은 곳들에서요?
당시가 글로벌 금융 위기라 취업 시장이 얼어붙긴 했어요. 근데 초장부터 잘될 턱이 없었죠. IT 회사원이 갑자기 공무원을 하다 어느새 국제 기구 인턴을 하고, 황당한 커리어잖아요?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 가까스로 기회를 얻은 곳이 SSGA였고, 2년 가까이 굴러 겨우 정식 펀드 매니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3년 만에 그만두고 갑작스레 귀국하셨어요.
너무 재미없었어요, 금융맨으로 산다는 게. 매일 쳇바퀴 돌리듯 지긋지긋했죠. 하는 거라곤 주가가 오르든 내리든 변명하는 일뿐이란 자괴감도 컸고요.
그럼에도 어느새 타성에 젖어 단세포처럼 살아가고 있더라고요. 사실 전부터도 아내는 계속 한국에 돌아가길 바랐거든요. 헌데 제가 망설였어요. ‘나는 MBA를 졸업한 펀드 매니저’란 인식에만 갇혀 있던 거죠.
이 바닥이 제가 경험할 세상의 전부일 줄 알았던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관성대로 살아가던 어느 날, 제 인생 흐름을 다시 뒤집어 버릴 일이 하나 닥쳐요.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이상현님/리멤버
Act 4.
구글코리아에서 마침내 천직을 찾다
2013년 이상현님은 구글코리아의 공공 정책 담당자로 합류합니다. 오랜 방황 끝 비로소 천직인 대관 업무의 첫발을 내딛은 겁니다.
무슨 사연인가요?
아내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세요. 아내 먼저 급히 귀국했지만 결국 임종도 못 지킵니다. 아내한테 진짜 각별한 존재셨거든요. 장례를 마치고 오니 단호히 선언하더라고요. “이제 가족들 곁에 있겠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
군말 없이 따르기로 하고 그날부터 이직처를 알아봅니다. 다행히 몇 군데 오퍼를 받았는데 하필 전부 또 금융권이었죠. ‘결국 또 금융맨인가’하던 찰나, 구글 다니는 한 친구 녀석한테 갑작스레 연락이 와요.
어떤 연락이요?
“한국 지사에서 공공 정책 담당자를 찾는다. 너가 적격 아니냐.”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 했는데, 따져 보니 맞는 말이더라고요. 테크업계 출신인 데다 정부 부처 경험도 있고 미국 본사 근무도 해 봤잖아요. 왠지 잘할 것 같은 확신이 들더군요. 가슴에 불이 붙었습니다. 덜컥 지원해 합류했어요.
대관 업무가 익숙지 않은 분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한국에선 여태껏 ‘관청을 상대한다’는 소극적 의미로만 통해 왔죠. 산업이 국가 주도로 발전해 왔다 보니 애먼 규제를 피하고 정부와 호의적 관계를 맺는 일만 대관 업무로 이해된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반쪽짜리 설명이에요. 우리도 민간이 리드하는 산업이 많아졌잖아요. 이제 관청이 산업 현장을 속속들이 알고 대응하긴 어려운 시대인 거죠. 대관 업무자들이 각종 규범을 선제적으로 구상하고 적극 이슈 제기하는 게 중요해진 이유예요.
그래서 사실 공공 정책 업무는 공직과 민간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봐요. 저희도 정부 못잖게, 아니 그 이상으로 공익을 창출해야 하니까요. 새 서비스를 기존 사회에 도입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거든요. 정책 환경을 빠삭히 이해하고 사회에 이바지하도록 나름의 방안을 짜 끊임없이 설득해야 하죠. 이게 현대적 의미의 대관이에요.
2015년 아시아 유일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당시 구글캠퍼스)가 서울에 문을 엽니다. 현지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협업 공간과 전문 멘토링, 글로벌 네트워킹 기회를 제공하는 구글의 글로벌 창업 지원 거점으로, 2020년 말 코로나 여파로 문 닫을 때까지 130개 이상의 스타트업이 선발돼 총 7050억원이 넘는 투자를 유치합니다.
토스·하이퍼커넥트 등 한국 대표 유니콘 기업들이 이곳에서 초창기 성장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죠. 바로 이 스타트업 캠퍼스의 국내 유치를 이끈 핵심 멤버 중 하나가 바로 이상현님이었습니다.
구글 스타트업 캠퍼스의 서울 유치, 어떤 취지로 추진된 건가요?
당시 한국에서도 스타트업 붐이 일었어요. 대단한 청년 사업가들이 너도나도 창업 생태계에 뛰어들었죠. 헌데 현장 목소리를 들어보면 “체계적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거예요.
다른 건 몰라도 구글은 이걸 도울 충분한 역량이 있잖아요. 새 협력 모델을 잘 구축하면 단순 기업 홍보를 넘어 구글-정부-스타트업 간 굉장한 윈윈이 될 거라 봤어요.
기존 스타트업 허브로 꼽혔던 홍콩이나 도쿄, 싱가포르가 아닌 서울이 아시아 유일 캠퍼스로 선정됐어요. 유치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죠. 지금처럼 전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던 때도 아니고 우리 스타트업씬도 걸음마 단계였으니까요. ‘왜 서울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야 했죠. 매일 본사랑 전략 회의를 이어 가며 끝장 토론을 벌였습니다. 현지 시간에 맞추다 보니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죠.
그럼에도 쉽게 풀리지 않더라고요. 결정적 한 방이 무얼까 고민하던 중 문득 깨닫습니다. ‘아, 말로만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겠구나. 현장을 직접 보여 주자.’
곧바로 내부 협의를 거쳐 본사 프로젝트 팀을 한국에 초청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스토리가 있는 여정’이 되도록 일정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기획했습니다. 어렵사리 얻는 기회인데 단순 업무 출장처럼 연출되면 안 되잖아요.
결과는 어떠했나요?
스타트업 창업자, 액셀러레이터, 정부 관계자, 공익 재단, 대학 교수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했고 덕분에 이틀간 20개가 넘는 미팅이 성사됐어요. 그 자리에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에너지와 잠재력을 모두 여실히 보여 주셨고요.
그 진심들이 통해 ‘서울, 생각보다 훨씬 뜨겁다’는 평가가 쏟아졌고, 결국 서울 유치가 결정됩니다. 당시 출범식에 대통령까지 참석해 직접 축하 인사를 전해 주셨고, 구글 내부에서도 대단히 모범적인 글로벌 협력 사례로 기록됐어요.
물론 저 같은 특정 개인이 주도한 결과가 아니라 언급이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한국 스타트업 커뮤니티 전체가 만들어 낸 공동의 성과였으니까요. 저는 그저 여러 팀과 협력하며 그 판을 연결하고 조율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에요. 물론 그것만으로도 자부심을 느끼지만요. (웃음)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이상현님/리멤버
Act 5.
평창에서 빛난 진심의 힘… 에어비앤비를 올림픽 후원사로!
2015년 이상현님은 글로벌 숙박 공유 플랫폼 에어비앤비 한국 지사로 이직, 정책 총괄 역을 맡게 됩니다.
에어비앤비 코리아 합류 계기는요?
그전까진 이미 자리 잡은 대기업들에만 몸담았잖아요. 좀 더 진취적 도전을 할 때 아닌가 싶더라고요. 더구나 여긴 난생 처음 이력서도 안 내고 들어간 직장이었어요. 지인을 통해 스카웃 제의를 받아 입사했거든요. 매번 꼭 뽑아 달라 호소하던 게 엊그젠데 감개무량했네요. (웃음)
에어비앤비를 향한 국내 여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공유 숙박이란 개념 자체도 낯설고 호텔 등 기존 숙박업계 반발도 거셌죠. 정책 총괄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셨나요?
이직 당시 주변에서도 우려가 많았어요. 말씀대로 개념도 생소했고 아예 불법으로 간주하는 시각도 강했으니까요. 하지만 전 이 모델이 한국에서도 충분히 안착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습니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한국 여행 시장은 미국 못지않게 역동적이거든요. 크고 작은 오해만 잘 풀어내면 이런 새 여행 트렌드도 너끈히 수용되리라 봤어요. 게다가 우리한텐 민박, 하숙 같은 익숙한 ‘공유 숙박’ 문화도 있잖아요.
그런 문화적 기반 위에서 친근하게 접근하고 농어촌 같은 소외 지역과 상생 모델도 만들어 가면 기존 숙박업과는 또 다른 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산업으로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2017년 11월 에어비앤비는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공식 후원사로 선정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올림픽 기간, 총 1만5000명 이상의 방문객이 에어비앤비를 통해 지역 숙소를 이용합니다. 에어비앤비의 서비스 신뢰도를 제고하고 국내 여론을 반전시킨 계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바로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인물이 이상현님이었습니다.
올림픽 공식 후원사 선정, 어떻게 이뤄 내신 건가요?
초대형 국제 행사를 치르기엔 평창과 그 인근의 대규모 숙박 인프라가 턱없이 모자랐어요. 때문에 정부도 협업 사유가 충분했죠. 숙박 수요를 최대한 분산해야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그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특히 올림픽 후원사는 분야별 중복 지정이 안 되거든요. 조직위원회 입장에서 저희를 채택하려면 숙박업계 반발을 모두 무릅써야 하는데 얼마나 부담이 컸겠어요.
그 부담을 어찌 해소했나요?
새로운 해결책을 내놨어요. 아예 별도의 카테고리를 만들자고 설득해, ‘온라인 숙박 예약 서비스’라는 신규 부문으로 후원사에 선정됐습니다.
물론 그도 당연히 쉽지 않았어요.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았죠. 헌데 별수 있나요? 진짜 죽어라 하는 수밖에요. “잠깐 얘기 좀 하자”는 전화라도 오면, 저는 언제고 무조건 평창으로 달려갔습니다. 통화보단 직접 만나야 얘기가 훨씬 수월히 풀리니까요.
나중에 조직위 분들이 말하길, 가장 기분 좋게 협업한 후원사 중 하나가 바로 에어비앤비였대요. 평창 올림픽엔 후원사가 정말 많았습니다. 아마 역대 동계 올림픽 중 최다일 거예요. 그만큼 선정 과정은 물론 이후 운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 걸쳐 성심을 다한 프로젝트였어요.
에어비앤비가 국내에서도 입지를 다진 지금, 과정을 함께한 동료로서 어떤 감회가 드시나요?
에어비앤비가 2020년 말 나스닥에 상장했죠. 그때 학자금 대출 수억원을 한꺼번에 다 갚았습니다. 무엇보다, 그 덕에 돌아가신 아버지 명의로 에모리대에 장학 기금도 만들 수 있었고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부모님과 학교란 울타리에서 만난 친구들 덕분이잖아요. 그 작은 보답이 ‘이훈 스칼라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걸 가능케 해 준, 정말 고마운 회사가 바로 에어비앤비였고요.
그리고 또 하나 이 시절에 정말 감사한 게 있습니다. 저 같은 천둥벌거숭이도 진심과 사력을 다하면, 결국 길이 열린다는 걸 깊이 깨달았다는 거예요.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지만 그간 헤매고 부딪히며 얻은 것들이 결코 헛된 게 아니었구나 싶었고, 그래서 더 뿌듯했습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이상현님/리멤버
Act 6.
다시 돌아온 구글, ‘대립’ 아닌 ‘대화’로 갈등을 풀다
2019년 이상현님은 다시 구글로 돌아옵니다. 이번엔 한국을 넘어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반의 플랫폼·디바이스 정책 이슈를 총괄하게 됩니다.
구글에 재차 합류하셨어요.
그때가 아버지 돌아가신 이듬해였어요. 되게 힘들 때라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단 생각이 강할 때였죠. 에어비앤비는 단일한 비즈니스 모델에 집중하기에, 아무래도 제가 맡을 역할의 폭이 좁지 않을까 했거든요.
그러던 차에 예전 구글 상관한테서 다시 합류 제안을 받아요. 이번엔 아시아·태평양 전역을 아우르는 자리였죠. 의지가 솟구쳤습니다. 이틀 만에 미국으로 날아가 인터뷰를 마쳤고, 싱가포르(구글의 아태 지역 거점)로 건너와 여태껏 여기서 일하고 있네요.
부임 직후부터 구글을 둘러싼 다양한 정책 쟁점이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유튜브 망 사용료 문제나 인앱 결제 규제, 조세 회피 논란 등 민감한 이슈들이 잇따랐죠. 이 같은 상황에서 어떤 접근 전략을 취하셨나요?
플랫폼 산업 생태계는 여전히 많은 분들께 생소해요. 그 복잡한 구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 크고 작은 오해가 생기고 거기서 갈등도 싹트기 마련이고요. 이 오해를 이해로 바꾸는 것, 이게 저희의 역할이자 해결의 단초라 봤습니다.
일단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을 만나 대화했습니다. 적극 방어하고 공세적으로 반박하기보단, 지적을 경청하고 그중 오해가 있다면 진심으로 다가가 풀어내려 노력했죠. 민감한 사안은 제도로 해결되도록 다방면에서 힘썼고요.
구체적 예시를 든다면요?
한국웹툰산업협회와의 협력을 꼽고 싶어요. 국산 웹툰이 대단하잖아요. 구글플레이가 해외 진출 교두보가 된다면 서로 큰 윈윈이 될 거라 봤습니다. 물론 처음엔 쉽지 않았어요. 국내 웹툰 산업은 창작자 중심 구조라 플랫폼 기업을 향한 기본적 불신이 있더라고요.
하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찾아뵙고 협력점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협회 관계자들을 인도로 초청해 유망한 AI 기반 웹툰 제작 툴 개발사와의 미팅을 주선해 드리기도 했죠.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기술 협업과 현지 진출 협약이 일사천리로 체결됐어요.
뿐만 아니라 함께 ‘웹툰 산업의 날’을 제정하고 중소 창작자 세미나, 실효적 네트워킹·컨설팅 프로그램이 담긴 중장기 협력 로드맵도 수립했습니다.
일회적 협력에 그치지 않게 정말 온 힘을 다했는데, 그 마음을 알아주신 듯해요. 얼마 전 협회한테 감사패를 받았거든요. 이렇듯 이슈가 터질 때마다 ‘위기는 대립이 아닌 대화의 기회’란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이상현님/리멤버
Act 7.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구글 글로벌 디렉터가 그리는 ‘모두’의 미래
2023년 10월 이상현님은 구글 플랫폼·디바이스 정책 부문 글로벌 디렉터로 승진합니다. 아시아는 물론 미국·유럽·남미 등 전 세계를 아우르는 공공 정책 리더로 도약한 것입니다.
POINT OF VIEW
“프로란 혼자가 아닌 모두를 빛나게 하는 사람”
초일류 기업의 글로벌 리더로 활약하고 계세요. 소회가 어떠신가요?
매일 전투 치르듯 살아요. 여기저기 돌아가는 걸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살필 나라만 십여 곳이 넘다 보니 무지하게 정신없어요. (웃음) 하지만 그만큼 흥미도 보람도 훨씬 크긴 해요. 직무 시야도 넓어지고 보다 전략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글로벌 디렉터로서 향후 목표나 전략은 무엇인가요?
요즘은 AI가 화두잖아요. 국가마다 정책 조율이 핵심 현안이에요. 규제 가이드라인을 선제적으로 제시하거나 필요한 서비스를 적극 제시하는 등 능동적인 협력 모델 구축에 주력하고 있죠. 궁극적으로는 관련 기술이 사회의 신뢰를 얻고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글로벌 정책 프레임워크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대표 사례를 소개해 주신다면요?
작년 브라질에서 가장 먼저 선보인 ‘Android Theft Protection’(안드로이드 도난 보호) 프로그램을 들 수 있습니다. 브라질은 스마트폰 절도가 심각한 사회 문제거든요. 바로 이 문제를 AI 기술로 정면 겨냥한 기능이에요.
AI가 미세한 움직임까지 감지해 도난을 식별하고 자동으로 화면을 잠가 버려요. 그리곤 초기화해도 주인의 구글 계정을 모르면 절대 사용할 수 없게 만들죠. ‘훔쳐 봤자 못 쓰는 폰’이란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전달해 범죄 억제 효과를 극대화하는 거예요.
이 프로그램을 미국도 아닌 브라질에서 먼저 출시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치열한 내부 설득을 거쳐야만 했죠. 하지만 굉장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단지 기술만이 아니라 정책과 고민의 힘을 더해 사회에 꼭 필요한 서비스를 탄생시킨 거니까요.
한국 시장에서의 목표도 있나요?
구글 지도 ‘길 찾기’ 기능, 이걸 한국에선 아직도 쓸 수 없어요. 전 세계 수십억 명이 20년 넘게 매일 쓰는 기능인데 국내는 규제로 사용이 제한돼 있죠. 한국에 올 때마다 해외 지인들이 번번이 물어요. “한국은 왜 이게 안되냐”고요. 바로 이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게 주된 목표 중 하나예요.
물론 우려도 잘 알죠. 그러나 보완이 어렵지 않고 도입한다면 시너지가 분명할 거예요. 당장 외국인 관광도 지방 곳곳까지 더 활성화할 수 있고 소상공인들과의 접근성도 높아질 수 있으니 지역 경제 전반에 긍정적일 겁니다. 곧 한국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데, 디지털 경제 협력에 적극적인 나라라는 인식도 널리 심어 줄 수 있을 거고요. 이런 방향에서 저희도 꾸준히 설득해 나가고자 합니다.
대관 업무에 다소 늦게 발을 들이셨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자리 잡고 탁월한 성취를 이뤄 내고 계세요. 그 이유를 꼽아 보신다면요?
미국의 조직심리학자 아담 그랜트가 저서 ‘Give and Take’에서 강조했죠. ‘진심으로 기꺼이 도울 수 있는 자가 결국 더 폭넓은 협력과 성장을 이끈다.’ 제가 잘하고 있는 거라면 결국 이 태도를 뼛속 깊이 새겼기 때문일 거예요.
나라마다 환경이 다르고 정부, 민간이 직면한 과제도 제각각이에요.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협력을 이끌어 마침내 산업·사회 혁신 동력을 빚어내야 하는 게 제 소명이고요.
그래서 필연적으로 대결이 아닌 조화의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봐야만 해요. 그저 규제를 피하려는 관성적 전략이 아니라, 사안에 얽힌 모두와 진득하게 소통하고 호혜 관계를 구축해 내는 게 절실하죠.
정책이란 건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거나 바뀌지 않거든요. 꾸준한 신뢰로 ‘Give and Take’의 선순환을 만들고 성실한 협력을 지향한 노력들이 조금씩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의 이상현님/리멤버
이상현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프로란 혼자가 아닌 모두를 빛나게 하는 사람==이에요. 우린 늘 어딘가 부족하잖아요.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꼭 빈구석이 있기 마련이고요.
그래서 진짜 프로는 혼자 빛나려 하지 않아요. 오히려 부족함을 인정하고 더 많은 이들에 귀 기울이며 스스로를 확장해 나가죠. 그러면서 동료들과 함께 끝끝내 더 나은 답을 찾고요. 그렇게 모두와 함께 빛나요. 혼자일 때보다 훨씬 밝게요.
일이란 게 그런 것 같아요. 차선, 차악은 몰라도 최선의 결과는 혼자 힘만으로 이뤄지지 않더라고요. 때문에 ‘혼자’를 ‘모두’로 바꿔 낼 힘이 필요하죠.
그건 아무에게나 주어진 능력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믿음을 쌓고 거래를 넘어 협력의 다리를 놓을 줄 아는 사람, 매 순간 겸허하게 진심을 담아 일하면서 모두를 감동시킬 줄 아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죠.
저는 그런 사람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프로라 믿습니다. 결국, 지구란 행성은 혼자서만 밝히기엔 너무 크고 복잡한 곳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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