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선규

‘재야의 야구 덕후 → SSG 초대 단장’ KBO의 새 역사를 쓰다!

2025. 3. 16.

류선규-LG트윈스-SK와이번스-SSG랜더스

류선규

前 SSG 랜더스 단장

평범한 야구팬으로 출발해 프로 야구단 단장에 오른 입지전적 야구 전문가입니다. PC통신 시절 재야 야구 칼럼니스트로 인기를 끌다가 1997년 LG 구단의 스카웃을 받아 야구계에 본격 입문합니다. 2001년 SK 와이번스로 적을 옮겨 홍보·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의 구단 경험을 쌓은 뒤, 2020년 단장에 취임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SSG 랜더스 초대 단장 자리에 올라 2022년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끕니다. 현재는 재야로 돌아와 유튜브 등 다양한 미디어에서 야구 비평가로 활약 중입니다.

90년대 PC통신 시절, 절륜한 ‘덕력’으로 재야 야구계를 평정한 전설적 ‘야구 덕후’가 있습니다. 십수년 ‘덕질’에서 나온 비상한 식견과 예리한 통찰로 그가 쓴 칼럼들은 삽시간에 하이텔 야구판을 뒤흔들고, 야구계 ‘퇴마록’이라 불릴 만큼 인기를 끌죠.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시쳇말로 그는 ‘성덕’, 즉 성공한 덕후였습니다. myLG란 필명에 숨은 그의 진가를 알아본 LG 프론트가 그를 전격 스카웃해 야구단에 직접 ‘등판’시킨 겁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2020년 베테랑이 된 이 재야의 야구 고수는 SK 와이번스의 마지막 단장으로, 이듬해엔 신생 구단 SSG 랜더스의 초대 단장으로 발탁됩니다. 그리고 2022년, SSG는 40년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최초 ‘와이어 투 와이어’ 한국시리즈 챔피언에 등극하죠.

오늘 프롤로그는 열혈 야구팬에서 거물급 야구인이 된 이 전설적 ‘야덕’의 이야기입니다. 3년 전 SSG 창단 첫 우승을 이끈 숨은 주역, 류선규님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POINT OF VIEW

“다시는 ‘덕업일치’로 안 살 겁니다. 덕질엔 자존심까지 걸 필요는 없잖아요. 하지만 업은 다르죠. 진짜 성과를 만들려면 목숨까지 걸어야 하니까요. 비단 야구에만 적용되는 얘기일까요?”

LG 트윈스 ‘가을 야구’의 상징 ‘유광 잠바’를 비롯, 국내 최초의 얼트 유니폼, 야구장 전광판 이벤트 등이 모두 그의 기획에서 탄생했습니다. 덕력에 능력까지 갖춘, 꿈같은 ‘덕업일치’의 정석이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두 번 다신 덕업일치로 살지 않겠다” 역설합니다. “야구마저 지긋지긋해졌다”고까지 말하면서 말이죠.

그럼에도, 재야로 다시 돌아온 지금 그는 여전한 야구 덕후입니다. 그 무대만 PC통신이 아닌 유튜브로 달라졌을 뿐이죠.

무명의 야구팬을 레전드 야구인으로, 필생의 야구 덕후로 거듭나게 한 그 가공할 ‘덕력’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리멤버가 류선규님을 직접 만나 생생히 담아봤습니다.

류선규-LG트윈스-SK와이번스-SSG랜더스
서울 서초구 한 스튜디오에서의 류선규님/리멤버

Act 1. 
성덕이 된 재야의 야구 덕후?!

90년대 PC통신 시절 류선규님은 잘나가는 전국구급 ‘야구 덕후’였습니다. PC통신에 틈틈이 올린 야구 관련 글들이 인기를 끌고 야구계의 ‘퇴마록’이란 별칭까지 얻으면서 재야의 야구 고수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겁니다.

야구를 좋아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1982년 3월 27일, 잊을 수가 없네요. MBC 청룡(현 LG 트윈스)과 삼성 라이온즈가 맞붙은,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첫 경기가 열린 날이죠. 운명처럼 그날의 경기는 초접전이었고 결국 연장까지 갔습니다.

이윽고 10회 말 2사 만루, MBC 이종도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어요. 그리고 그 방망이에서 끝내기 홈런이 터졌죠. 그 짜릿한 장면이 열세살 소년의 심장을 울렸습니다. 일평생 그 장면이 잊히지가 않아요.

그 뒤 PC통신에서 알아주는 야구 덕후가 되셨어요.

대학에 붙고 나선 경기를 정말 많이 보러 다녔어요. 특히 새내기 땐 LG 트윈스 잠실 홈경기는 거의 다 본 듯해요. 가끔 부모님 몰래 지방 경기도 갔죠. 그 시절 대학생이 야구 보러 지방까지 내려가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거든요. 헌데 어느 날 관중석에서 응원하는 제 모습이 뉴스에 나왔지 뭡니까. 어머니한테 걸려 무지 혼났습니다. (웃음)

그래도 대학교 2학년 때부턴 맘을 다잡아 행정 고시를 준비했어요. 2년쯤 나름 열심히 공부했는데 결국 안 되더라고요. 더 늦기 전에 군대부터 다녀와야겠다 싶어 공군 장교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부터 PC통신을 하게 됐어요. 과 동기가 “PC통신에서 활동하는 야구팬이 많다”면서 한 번 해보라 추천했거든요. 마침 입대까지 시간이 남아 시작했는데 재밌더라고요. 입대 후에도 근무를 마치면 야구 보러 갔다가 끝나고 곧장 글을 써 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유명해졌어요.

어떤 글들을 쓰셨길래요?

그날그날의 관전평이나, 갖가지 야구 이슈에 칼럼처럼 나름의 썰을 풀었어요. 저는 순전히 재미로 쓴 건데 꽤 인기를 끌었습니다. “야구계 ‘퇴마록’(당시 인기 PC통신 소설)”이란 소리도 많이 들었어요.

류선규님은 요즘 시쳇말로 ‘성덕’(성공한 덕후)의 전형이었습니다. 그의 PC통신 게시글들을 LG 트윈스 관계자들이 돌려 보다 단장·사장 등 구단 고위층한테까지 보고가 들어갔고, 급기야 1997년 LG스포츠로부터 스카웃 제안까지 받게 된 겁니다.

쓰셨던 글들이 LG 트윈스 사장한테까지 보고가 올라갔다고요.

트윈스가 90년대 중반 PC통신에 일종의 구단 사이트를 개설해요. 거기서도 글을 썼는데 윗분들 지시로 제 글이 곧잘 보고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나중엔 직접 만나 보고 싶다며 연락까지 왔죠. 때문에 공군 장교 시절에도 가끔씩 뵀습니다.

아예 입사 제안까지 받게 되셨어요.

일종의 기획력을 기대하신 듯해요. 아무래도 제가 쓴 글들의 성격상 전략가다운 면모가 부각됐을 테니까요. 동시기 KBO(한국야구위원회)에서도 스카웃 제안을 받았는데 거기서도 기획팀 입사를 권하시더라고요.

처음엔 거절하셨다고요.

아주 여러 차례 거절했습니다. 1년 넘게 고사했어요. 제가 잘났다고 생각해 그런 게 아니에요. 제 유일한 취미가 야구였습니다. 헌데 이걸 업으로 삼으면 귀한 삶의 낙 하나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하지만 제대할 무렵이 되니 세상이 확 변하더군요. 1997년 12월 IMF 사태가 터졌죠. 사실 전부터 전조 현상이 있었습니다. 원래 연세대 경영학도에 공군 장교쯤 되면 웬만한 대기업 취업도 어렵지 않은 시절이었는데, 그해 상반기부턴 떨어지는 친구들이 나오더라고요. 

뾰족한 대안이 없다 보니 저까지 덩달아 초조해졌습니다. 결국, 저도 마음을 바꿔 스카웃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해요.

류선규-LG트윈스-SK와이번스-SSG랜더스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류선규님/리멤버

Act 2. 
LG 가을 야구 상징 ‘유광 잠바’를 기획하다!

1997년 류선규님은 LG스포츠에 입사, 전문 야구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구단 내 전략 기획 업무를 맡게 될 거란 당초 예상과 달리 홍보 조직으로 첫 발령이 납니다.

뜻밖에 기업 홍보를 맡게 되셨어요.

원래 운영팀에 가게 돼 있었어요. 선수단 관리·기획을 맡는 곳인데 ‘야구단의 꽃’이나 다름없는 조직이죠. 예나 지금이나 야구단에 들어오면 모두가 운영팀에 가고 싶어 해요. 

그런데 입사 직전, 구단에 급한 사정이 생깁니다. 갑자기 홍보팀장이 퇴사를 해 버린 거예요. 홍보 전력이 약화되면서 인력 보강이 필요해졌고, 급하게 제가 투입됐어요.

언론 대응 업무가 무척 생소하셨겠습니다. 애초에 신입이기도 했고요.

의외로 스트레스가 없었어요. 보통 기자가 갑이고 기업 홍보는 을이지만, 오히려 저는 기자들한테 살짝 리스펙트를 받았거든요. 나름 PC통신에서 잘나가는 셀럽이었던 덕분이죠. (웃음)

이 무렵 탄생한 LG 트윈스 공식 홈페이지 팬 커뮤니티 ‘쌍둥이 마당’(현 ‘I Love Twins’)을 직접 기획하고 만드셨다고요?

홍보라 해서 꼭 언론 대응만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당시 그룹 차원 공식 홈페이지를 만든대서 그쪽 담당 부서를 설득해 겸사겸사 이것도 만들게 했습니다. PC통신 때 야구팬들이 누린 소통과 즐거움을 인터넷으로도 빨리 가져와야 한다 생각했거든요.

결국 스포츠는 팬들이 만들어요. 팬과 호흡하지 않는 스포츠는 그냥 승부일 뿐이지 스포츠가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우리 팀이 팬들의 입에 더 자주 오르내릴 수 있을까 끊임없이 연구하고 서포트해야 하는 거죠.

‘유광 잠바’, 1994년 이후 30년 가까이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한 LG팬들의 한 서린(?) 염원이 담긴, 자타공인 LG ‘가을 야구’의 상징이죠. 야구팬이 아니어도 특유의 광택은 기억할 만큼 LG 야구를 대표하는 히트 굿즈이기도 한데요. 이 유광 잠바를 처음 기획한 사람이 바로 류선규님이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유광 잠바를 기획하신 건가요?

당시만 해도 LG 잠바가 뭐랄까, 좀 후져 보였어요. 선수단 내부에서도 불만이 많았죠. 때문에 기회가 되면 언젠가 이 잠바를 손봐야겠다 다짐했는데, 마침 2001년 제가 선수단 장비 담당자로 발령이 나 그때부터 기획해 도입하게 됐습니다.

왜 ‘유광’이었나요?

원래 유광 잠바의 원조는 현대 유니콘스였어요. 반짝반짝한 게 되게 멋있어 보였죠. 우리도 저런 걸 만들 수 없을까 궁금해 바로 알아봤습니다. 헌데, 생각보다 도입이 쉽지 않겠더라고요. 제작 비용이 예상을 뛰어넘는 거예요.

당시 현대는 미즈노(일본의 유명 스포츠 브랜드)에서 완제품을 그대로 수입해 쓰고 있었어요. 그 시절에 한 벌당 50만원 정도가 나갔죠. 보통 잠바는 선수들한테 매년 지급하는데 워낙 비싸 현대조차 2년에 한 번씩만 주더라고요.

그럼에도 도입에 성공했습니다.

곧바로 단념하긴 아쉬우니까 기존 잠바 제작 업체랑 이 안건으로 미팅을 해봤어요. 그랬더니 실마리가 보였습니다. 한국에선 이런 잠바가 안 나오는 이유가 바로 원단 때문이라는 거예요. 국내에서도 원단만 확보되면 제작이 가능하다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우리가 직접 일본에서 원단을 수입해 오기로요. 그럼 제조 원가를 20만원 정도로 맞출 수 있었습니다. 완제품 대비 비용이 절반도 안 들게 된 거죠.

오늘날 유광 잠바는 LG 트윈스 대표 굿즈가 됐습니다. 소회가 어떠신가요?

2001년 말 퇴사했으니 아쉽게도 도입 순간을 함께하진 못했어요. 유광 잠바는 2002년에 나왔거든요. 더구나 바로 히트한 것도 아니에요. 차츰 구단과 팬들 사이 여러 서사가 쌓여 인기를 얻은 거죠. 때문에 제 공이 크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사실이 그래요.

다만, 이 시기 경험들이 제게 기획 측면에서의 자신감을 심어줬단 건 확실합니다. 잠바 말고도 제가 직접 아이디어를 내서 바꾼 것들이 꽤 있어요. 스파이크(야구화)도 무거운 미국제에서 우리 선수들 체형에 맞는 일본제로 이때 바꿨죠. 이게 경기력 향상으로 직결됐다고 말하는 건 민망하지만, 선수들이 무척 편해 하고 좋아했던 건 사실입니다.

아이디어 자체가 엄청 빛났다고 보진 않아요. 누구나 깊이 생각해 보면 떠올렸을 거라 봐요. 물론 그만큼이라도 생각을 굴리는 사람들조차 조직에선 귀하다는 걸 갈수록 깨닫긴 했습니다만, 여하간 더욱 드문 건 그 아이디어를 실행까지 옮겨 내는 사람이더라고요. 

LG에 몸담은 기간이 그리 길진 않았지만 기획에 있어 실행이 아주 중요한 요소란 걸, 그리고 저는 실행에 큰 강점이 있는 사람이란 걸 깨달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류선규-LG트윈스-SK와이번스-SSG랜더스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류선규님/리멤버

Act 3. 
새 둥지 와이번스서 이끈 얼트 유니폼 흥행

2001년 말 류선규님은 친정 LG를 떠나 신생 팀 SK 와이번스로 적을 옮깁니다.

오랜 LG팬이셨습니다. 그럼에도 왜 퇴사를 결심하셨나요?

대다수가 야구단에 입사할 때 환상을 가져요. 흥미진진하고 배우고 싶은 게 한가득일 거란 환상이요.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거든요. 원래부터 야구단이 어떤 분위기인지 대강 알고는 있었는데 들어가 보니 알고 있는 그대로였습니다. 교육의 기회가 드물다 보니 배우고 성장하기 어려웠어요. 장기적 비전도 없었고요. 물론 주도적으로 일을 꾸밀 수 있는 건 좋았지만, 우물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때문에 해외 구단에 연수라도 보내 달라 요청했는데 언감생심이었어요. 구단 인력을 다 합쳐도 서른 명이 안 됐거든요.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공백이 엄청 큰 거죠. 가뜩이나 연수 가는 사람은 조직 에이스일 테니 더더욱이요. 그래서 일단 퇴사부터 저지르고 유학을 준비했습니다. 애초에 스포츠 방면 MBA에 도전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결국 유학 대신 SK 와이번스에 입사하셨습니다. 왜 또 야구단이었나요?

그놈의 영어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웃음) 독해는 자신 있는데 회화가 안 되더군요. 좌절하던 찰나에 때마침 SK가 입사 제안을 보냈어요. 밑져야 본전이니 ‘미국 구단 연수’를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흔쾌히 수락하더라고요. 그래서 SK로 가게 된 거예요.

입사 후에도 여전히 LG팬이셨나요?!

에이, 그러면 안 되죠. 프로잖아요.

2002년 8월 24일 인천 문학 구장. 두산과의 홈경기를 맞아 입장하는 SK 선수단 유니폼이 일제히 관중의 눈길을 잡아끕니다. 기존 홈 유니폼과는 완전히 다른, 가슴팍에 큼직한 별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이 복장의 정체는 바로 1982년 KBO 리그 원년 구단이자 인천을 연고지로 둔 첫 프로 야구단, 삼미 슈퍼스타즈의 홈 유니폼을 모방한 얼트 유니폼(제3의 유니폼)이었습니다.

창단 3년 만에 해체한 비운의 ‘인천 선배’를 17년 만에 팬들 앞으로 소환한 이 깜짝 이벤트에 홈 팬들은 열광적 환호로 화답했고, 신생 팀 SK는 인천팬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국내 다른 구단들도 줄줄이 얼트 유니폼을 도입하죠. 바로 이 기념비적 이벤트를 탄생시킨 주역이 류선규님이었습니다.

한국 프로 야구 최초의 얼트 유니폼, 직접 기획하고 도입하셨다고요.

앞서 말씀드렸듯 야구단의 꽃은 선수단 운영이에요. 그 외 마케팅·홍보 등은 비주류입니다. 하지만 전 처음부터 마케팅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 스포츠 마케팅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유학을 가고 싶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지금도 멀었지만 그땐 구단들의 마케팅 인식·역량이 정말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그쪽 분야에서 할 일이 참 많을 거라 봤어요.

SK 입사 때도 “마케팅을 하고 싶다”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때문에 마케팅을 하게 될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어요. 그런데 웬걸, 저한테 홍보 일을 시키는 거예요. 부서 이름이 ‘마케팅·홍보팀’이었거든요. 따졌더니 “이름 그대로 홍보를 시키는 게 뭐가 문제냐” 하시더라고요. 진짜 싫었는데 별수 있나요. 엎질러진 물이니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어요.

그럼 홍보 업무를 하시면서 얼트 유니폼을 기획하신 건가요?

아까 말했듯이 홍보라 해서 꼭 홍보만 해야 한단 법은 없잖아요. 당시 우리 쪽 티켓이 너무 안 팔렸어요. 홈경기마저 좌석이 휑할 정도로요. 때문에 뭐라도 해서 어떻게든 연고지 팬들의 지지부터 이끌어 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죠.

그런데 어느 날, 박찬호 선수가 몸담고 있던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그 전신인 워싱턴 세네터스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뛰는 특별 이벤트를 하더라고요.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습니다. 우리는 ‘선배 인천 팀’ 삼미 유니폼을 한번 입어 보면 좋겠단 생각이 든 거예요. 

다행히 홍보가 마케팅이랑 한 부서다 보니, 중요한 일이 생기면 TF처럼 함께 일하긴 했어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얼트 유니폼은 마케팅의 영역이잖아요? 때문에 원래대로면 저 같은 홍보 담당자가 주도하진 못했을 거예요.

헌데 변변한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마땅히 실행할 사람도 없었고요. 결국 기획도 실행도 제가 맡겠다고 했어요. 내친김에 홍보까지 전부 다 하겠다고 했죠. 그래서 시작된 거예요.


POINT OF VIEW

“그 작은 노력과 정성들이 없었다면 이런 큰 이벤트도 그 감동이 덜했을 거예요. 무엇보다 아이디어도 추진할 실행력도 나오지 않았을 거고요. 절실함이 그래서 중요한가 봅니다.”

원래 계획은 로고에까지 ‘삼미’를 새겨 원본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헌데 왜 불발됐나요?

현대 쪽에서 막았습니다. 그 유니폼 로열티는 삼미의 계보를 잇는 현대에 있었거든요. 때문에 살짝 변형을 가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습니다. 로고에 삼미 대신 SK를 새기는 식으로요. 이벤트 명칭에도 삼미를 내세울 수 없으니 차선책으로 그 상징인 별 문양을 강조했고요.

마침 2002년이 월드컵의 해였잖아요. 그 캐치프레이즈가 ‘꿈★은 이루어진다’였는데, 여기서 벤치마킹해 이름을 ‘꿈★의 유니폼 데이’라고 지었어요. 어떻게든 묻어갈 수 있겠다 싶었죠. 여하간, 꾀를 잘 쓴 덕에 이벤트는 별 탈 없이 성사됐습니다.

이후 다른 구단들도 앞다퉈 얼트 유니폼을 내놓게 됐죠. 그만큼 이벤트가 대성공이었어요.

여러모로 시작에 의미가 있었죠. 그때부터 인천 분들이 야구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하신 거예요. 당시 현대가 서울로의 연고지 이전을 추진하면서, 배신감에 치를 떨고 야구 자체를 안 보게 된 인천 분들이 상당히 많았거든요. 

이 마음을 달래고자 정말 별의별 짓을 다했습니다. 개막전이라도 열리면 부평역 광장으로 나가 직원들 모두가 전단지를 돌렸어요. 구장 주변 아파트엔 초대권도 직접 나눠 줬고요. 

그 작은 노력과 정성들이 없었다면 이런 큰 이벤트도 그 감동이 덜했을 거예요. 무엇보다 아이디어도 추진할 실행력도 나오지 않았을 거고요. 절실함이 그래서 중요한가 봅니다.

류선규-LG트윈스-SK와이번스-SSG랜더스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류선규님/리멤버

Act 4. 
‘연안부두’ 100번 듣고 깨달은 인천의 마음?!

2004년 류선규님은 7개월간 미국 현지 야구단 연수를 가게 됩니다.

유학 대신 야구단 연수를 떠나셨어요.

현지 구단에서 인턴십을 할 기회를 얻었거든요. 메이저 리그 중부 지구에 속한 피츠버그 파이리츠라는 팀이었죠. 2~3월엔 스프링 캠프를 따라가 보기도 하고, 이후엔 제휴 관계인 마이너 리그 알투나 커브란 구단에서 마케팅 인턴 신분으로 일했어요.

메이저 리그부터 마이너 리그 싱글 A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현지 야구장을 다녀 보셨다고요.

이때 아니면 언제 가보겠나 싶었어요. 중고차 하나를 구매해 동부, 중부의 모든 구단 야구장에 가 봤습니다. 도합 50군데는 거뜬히 넘을 거예요.

현장에서 무엇을 중점적으로 보셨나요?

9회까지 쭉 지켜보면서 경기가 전체적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살펴봤어요. 게임이나 선수에 집중했단 뜻이 아닙니다. 경기장 자체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유심히 봤어요. 인상적인 건 사진도 찍고 열심히 메모도 했죠.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을 꼽아 보신다면요?

당시 국내 야구업계에서 이런 말이 많이 돌았어요. “미국 야구의 마케팅을 배우려면 메이저 리그가 아닌 마이너 리그를 봐야 한다.” 실제로 메이저 리그는 그냥 전광판 문화라고 보시면 돼요. 지금은 또 모르지만 그때까진 전광판을 통해 모든 응원과 이벤트과 이뤄졌어요.

그런데 마이너 리그는 확연히 달라요. 온갖 장소를 활용해 다양한 이벤트를 벌입니다. 팬들을 응원 단상 위로 불러 같이 놀거나, 클리닝 타임 땐 그라운드에서 재밌는 놀이 같은 것도 하죠. 명성대로 정말 볼 게 많더라고요. 

치어리더 공연을 빼면 이벤트랄 게 없는 한국 야구인 입장에선 무척 부럽더라고요. 한국에 돌아가면 꼭 써먹어 보고 싶었습니다.

이듬해 미국 연수를 마친 류선규님은 마케팅 전담 팀으로 복귀, 대형 전광판 이벤트 등 연수 시절 경험한 다양한 선진 마케팅 전략을 적용하며 풍부한 현장 경험을 쌓게 됩니다.

문학 구장에서 국내 처음으로 컬러 전광판을 도입하셨다고요.

지금이야 야구장 전광판이 컬러인 게 당연하죠. 영화관 초대형 스크린처럼 다양한 화면을 보여 주니까요. 허나 옛날엔 스코어보드에 불과했습니다. 끽해야 스코어랑 라인업 정도만 나왔어요. 컬러일 필요조차 없었던 거죠. 

문학 구장은 듀얼 전광판이라 좀 발전된 형태긴 했지만 흑백인 건 매한가지였어요. 때문에 저희도 미국처럼 전광판 이벤트를 하고 싶었는데 화면이 흑백이니 단념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해요. 원래 컬러 구현이 가능한데 구태여 흑백 화면을 내보내고 있던 거예요. 알고 나서 바로 컬러로 바꿨습니다.

왜 굳이 흑백 화면을 송출하고 있던 건가요?

별다른 이유가 없었어요. 그저 다른 구장들이 다 흑백이니까 여기도 관성대로 하던 거예요. 갑자기 저희가 컬러를 틀고 번쩍번쩍한 이벤트들도 하기 시작하니 다른 구장들도 줄줄이 컬러로 따라오더라고요.

어떤 이벤트들을 하셨나요?

제가 아예 전광판 행사를 전담했어요. 이때 미국에서 봤던 이벤트들을 많이 들여왔죠.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야바위나 경주 게임 같은 것들요. 뿐만 아닙니다. 응원 단상에서도 크고 작은 이벤트들을 쉴 새 없이 벌였어요. 

헌데, 그러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어느 날부턴가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벤트 때문에 팬들이 화장실을 못 간다’는 민원이 하나둘 올라오는 거예요. 그저 공연만 할 땐 맘 놓고 화장실을 갔는데, 이벤트는 놓치기 아쉬워서 화장실을 못 가게 된다는 얘기였어요.

순간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 내 생각이 잘못됐구나.’ 마케팅이란 게 언제나 고객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저는 제 기준에서만 봤던 거예요. 제 딴에 만족스러운 걸 해 주면 팬들도 그저 좋아해 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결코 아니었던 거죠.

2002년 ‘연안부두’(인천 프로 야구단의 대표 응원가) 사건이 떠오르네요. 원곡 대신 디스코 리듬의 리믹스 버전을 틀었다가 팬들한테 엄청난 뭇매를 맞았죠.

제가 벌인 일은 아니었고 마케팅 쪽에서 ‘노래가 너무 구슬퍼 야구장 음악엔 안 맞는다’는 의견이 나와 진행한 걸로 기억해요. 편곡에 공도 꽤 많이 들인 걸로 압니다. 하지만 이 역시 공급자 중심으로만 나이브하게 추진된 일이었어요.

그때 정말 팬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당시 제가 구단 홈페이지를 관리했거든요. 자유 게시판 ‘용틀임마당’도 제가 만들어 수시로 모니터링하고 있었는데 일부 팬들만의 불만이 아닌 거예요. 원래대로 돌려놓는 게 좋겠다고 급히 건의를 드려 다시 원곡으로 바뀌게 됐습니다.

그 사건 때문인가요. ‘연안부두’를 100번 이상 들어 보셨다고요.

아뇨, 그와 별개이긴 합니다. 그 전부터도 연고지 정서를 더 잘 헤아리는 게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이 많았어요. 서울이랑 가깝다고 결코 인천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좋든 나쁘든 인천만의 지역성이 확고하죠. 어떻게든 그걸 더 잘 파악해 보고자 용을 쓰는 차원에서 그랬던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이벤트에 대한 팬들의 불만도 한편으론 연고지 고유 정서를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어요. 지금은 좀 다를 수 있는데 그때만 해도 인천은 너무 낯선 것을 향한 경계심이 무척 강하게 느껴졌어요. 헌데 서울도 아니고 하물며 미국에서 유행하는 걸 가져왔으니 반응이 좋았겠나요?

다시 얘기하지만 스포츠는 팬들이 만듭니다. 미국 연수 덕에 정말 많은 걸 보고 배웠지만, 좀더 소중한 깨달음은 오히려 팬들과 직접 부대낀 현장에서 얻게 된 것 같아요.

류선규-LG트윈스-SK와이번스-SSG랜더스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류선규님/리멤버

Act 5. 
SK 스포테인먼트의 선봉장, 팬 중심 선진 야구 문화를 개척하다

2007년 SK 와이번스엔 ‘스포테인먼트’라는 새로운 경영 비전이 등장합니다.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가 결합한 선진 마케팅 전략으로, 경기 관람에만 국한된 과거와 달리 다채롭고 폭넓은 즐길 거리를 제공해 야구장을 찾는 즐거움을 배가시키자는 취지였죠. 류선규님은 이 스포테인먼트 전략을 물밑에서 기획하고 실행하는 미션을 맡게 됩니다.

스포테인먼트 전략은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요?

2006년 가을쯤 어느 날 갑자기 사장님이 절 부르셨습니다. 그리곤 대뜸 “내년부턴 스포테인먼트를 해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전 그때 스포테인먼트가 뭔지도 아예 몰랐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단어였어요. 대리 나부랭이가 뭘 알았겠어요. (웃음)

그래서 열심히 자료를 뒤졌습니다. 헌데 아무리 봐도 별게 없더라고요. 데이비드 스턴이란 NBA 커미셔너가 했다는 이 말 한마디 빼곤 아무 것도요. “NBA가 앞으로 도약하려면 스포테인먼트를 해야 한다.”

하는 수 없이 두달간 죽어라 관련 기획에만 몰두했습니다. SK의 스포테인먼트란 어떤 것인지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고 체계적으로 구조화시켰어요.

구체적으로 정의한 SK의 스포테인먼트란 무엇이었나요? 

‘스포츠 퍼노베이션’, 즉 스포츠·펀·이노베이션을 화학적으로 결합했어요. 그중 핵심은 ‘펀’이었죠. 꼭 경기가 아니더라도 팬들을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당시만 해도 야구, 아니 모든 스포츠 선수들이 이벤트 같은 걸 정말 ‘극혐’했어요. 성적이 중요하지 팬 서비스가 뭐가 중요하냔 입장이었죠. 심지어 사인 볼 선물도 거의 안 하려 했어요.

때문에 2007년 SK의 시즌 캐치프레이즈를 아예 ‘팬 퍼스트! 해피 베이스볼!’로 못을 박았어요. 그리고 승부에 앞서 팬들이 있다는 걸 선수들한테도 엄청 주입시켰죠. 구단의 얼굴은 선수들이잖아요. 먼저 선수단에 그런 의식이 제대로 자리 잡혀야 스포테인먼트도 제대로 실현되리라 본 거예요.

2007년 5월 26일 SK와 기아가 맞붙은 인천 문학 구장. SK의 공격이 끝난 5회 말 클리닝 타임, 그라운드에 웬 팬티 차림의 중년 남성이 등장합니다. 

민망해 하던 기색도 잠시 그는 이내 활짝 미소 지은 얼굴로 그라운드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중간중간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드는 여유까지 보이죠. 이 생경한 광경에 객석에 들어찬 3만 관중은 이례적으로 우레와 같은 함성과 환호를 쏟아 냅니다.

이날 사상 초유의 ‘팬티 퍼포먼스’를 선보인 이 남성의 정체는 당시 SK 이만수 수석 코치. 한국 프로 야구 1호 안타·타점·홈런의 주인공이기도 한 레전드 야구인이 팬티 바람으로 관중 앞에 선 이유는 그로부터 한 달 전 내뱉은 폭탄 선언 때문이었습니다. 

“앞으로 열 번 안에 홈경기가 만원이 되면 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돌겠다.” 농담조로 던진 말이었지만 팬들은 열광적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리고 열 번째 홈경기를 맞은 이날, 문학 구장은 마침내 만원 관중을 달성하죠. 2000년 창단 이래 두 번째 홈경기 매진이었습니다.

그해 SK는 첫 한국시리즈 우승과 함께 누적 60만 관중을 돌파, 성적과 인기를 한꺼번에 잡는 쾌거를 이룹니다. 바로 이날의 퍼포먼스는 SK 스포테인먼트의 대흥행을 예고한 상징적 장면으로 지금까지 회자됩니다.

이만수 코치의 파격 퍼포먼스, 어떻게 기획된 일이었나요?

구단과 상의한 일이 전혀 아니었어요. 100% 즉흥 발언이었죠. 당시 워낙 홈경기 흥행이 저조하다 보니, 코치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거예요. 헌데 반응이 이렇게 폭발적일 줄은 코치님도 저희도 몰랐습니다. 

시한이 다가올수록 공약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엄청 커졌어요. 사실 레전드 야구인으로서 체면이 있으시니까 한 발 빼실 법도 한데, 나중엔 아예 언론에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고 공언까지 해 버리셨더라고요. 

하지만 본인이 하겠다고 무조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거든요. 구단 차원에선 꽤 심각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POINT OF VIEW

“그 어떤 뛰어난 마케팅 전략도 팬들을 향한 진심 어린 애정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걸 여실히 배운 순간이었습니다.”

무슨 우려였나요?

경찰에서 연락이 왔는데 자칫 경범죄에 걸릴 수 있다는 겁니다. 당시 코치님은 구단에서 다음 감독감으로 눈여겨보고 있던 분이셨어요. 그런 분을 어떻게 공개 망신을 당하게 하겠어요. 저를 비롯해 구단 모두 말리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코치님께 전화를 걸어 “안 하면 안 되겠냐”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런데 굉장히 완강하게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코치님 별명인 ‘헐크’ 복장을 입고 뛰시면 안 되겠냐 설득했는데 그것마저 거절당했습니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대신 인조 엉덩이가 우스꽝스럽게 뒤에 붙은 사각 팬티를 입으시게 했습니다. 팬들이 선물한 팬티인 데다 코믹스러우니 그나마 괜찮을 듯했어요. 

그리고 코치님의 선수 시절 등 번호인 22번에 맞춰 팬티 차림으로 같이 뛸 22명의 팬들도 모집했습니다. 팬들과 함께하는 유쾌한 이벤트로 간다면 훨씬 분위기가 좋을 거라 판단했어요. 덕분인지 아무 탈 없이 아주 잘 치러졌습니다.

‘팬티 퍼포먼스’, 당시 온갖 미디어에서 대서특필할 만큼 화제였죠. 팬들의 반응도 뜨거웠고요.

우리나라 스포테인먼트의 아이콘처럼 남게 된 이벤트라 할 수 있죠. 스포테인먼트를 성공시킨 1등 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하지만 당시엔 이 정도 파급력이 생길 거라곤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 어떤 뛰어난 마케팅 전략도 팬들을 향한 진심 어린 애정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걸 여실히 배운 순간이었습니다.

2009년 9월 SK는 인천을 연고지로 둔 구단 최초로 누적 관중 80만을 돌파합니다. 연이은 호성적과 더불어 팬 서비스를 극대화한 스포테인먼트 전략 역시 시너지를 냈다는 평이 나옵니다. 

야구단 최초로 전속 모델인 ‘와이번스 걸’을 도입하셨습니다.

제가 LG에 있다 왔잖아요. LG는 인기 구단이라 별다른 흥행 수단이 필요 없었어요. 헌데 SK는 비인기 구단이잖아요. 그러니 정말 다양하게 이것저것 다 해 봐야죠. 남들 하는 대로만 하면 언제 LG를 따라잡겠냔 생각이었어요.

‘불꽃투혼! SK!’란 새 팀 응원가도 만드셨어요. 하이브 방시혁 의장의 작곡 참여로 유명하죠.

초대 와이번스 걸이었던 이현지씨의 소속사가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였어요. 그 인연을 계기로 작업을 맡아 주신 거죠. 그땐 그리 유명한 사람이 될지 미처 몰랐습니다. (웃음)

2009년엔 ‘야구장으로 소풍 가자’는 슬로건하에 대대적인 문학 구장 시설 개편을 주도합니다. 이때 도입한 프리미엄 존은 지금까지도 큰 인기죠.

그해까지 스포테인먼트를 제가 기획했으니 거의 마지막 프로젝트였네요. 야구를 정말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와 결합해 팬 서비스를 극대화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그 결과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바베큐존은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기가 정말 좋아요. 

하지만 구단이 사랑받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 무엇보다 성적이죠. SK가 2007·2008년 모두 우승하고, 2009년도 준우승을 했죠. 그 이듬해에도 우승을 했고요. 성적이 뒷받침됐으니 그만한 인기도 가능했던 거예요. 

다만, 그 성적과 맞물릴 마케팅 기반을 잘 구축했다는 자부심은 있습니다. 그리고 팬 분들께 단순히 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즐거움뿐 아니라 그 이상의 다채로운 재미 또한 선사해 드린 것 같아 그 점도 뿌듯합니다.

류선규-LG트윈스-SK와이번스-SSG랜더스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류선규님/리멤버

Act 6.
‘홈런 군단’ 리빌딩으로 와이번스 왕조 중흥을 견인하다

2014년 말 류선규님은 SK 와이번스의 전략기획팀장으로 발탁됩니다. 야구단 입문 17년 만에 드디어 선수단 전략 전반을 디자인하는 중책을 부여받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의 주도 아래 SK는 약점으로 지목된 거포 자원을 확충하고 홈구장 이점을 십분 살리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그 결과, 2017년 역대 최다인 234개의 홈런을 쏟아 내며 자타공인 ‘홈런 군단’으로 거듭납니다.

홍보·마케팅에서 벗어나 이때부턴 구단 전략 기획을 전담하게 되셨어요.

사실 이전부터도 선수단 업무는 하고 있었어요. 다만 겸직 때문에 고생이었죠. 홍보팀장을 계속하면서 육성팀장, 전략기획팀장을 차례로 겸임했거든요. 헌데 이때부턴 집중이 필요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자리는 내려놓고 전략기획팀장 일에만 몰두하기로 했습니다. 

보통 구단 요직은 주로 선출(선수 출신)들이 맡습니다. 선출이 아니라 약점도 뚜렷했겠지만 기획 면에선 어느 정도 두각을 보여 온 만큼 선뜻 기회를 주셨던 것 같아요.

장타력을 높이는 데 전략을 집중하셨습니다. 어떤 이유였나요?

당시 문학 구장은 목동 다음으로 홈런이 많이 나오던 곳이었어요. 헌데 SK는 그 덕을 못 보고 있었습니다. 홈런보다 피홈런이 더 많았던 거예요. 때문에 내부적으로 강력하게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장타력을 높이는 쪽으로 선수 구성을 바꿔야 한다고 계속 어필했어요.

당시 민경삼 단장과 의견이 엇갈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민 단장님은 저와 LG 시절 함께 있었던 분이에요. 그분은 전형적인 잠실 구장 스타일의 선수 구성을 선호했습니다. 넓다란 야구장을 커버할 우수한 투수와 발 빠른 야수 중심의 야구를 추구하셨죠.

그러나 저는 그게 문학 구장과는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어요. 잠실보다 크기가 작으니 좀더 장타력이 있는 선수들을 포진시켜야 한다고 봤죠. 데이터는 거짓말을 못 하잖아요? 열심히 보여 드리면서 설명을 했고, 결국 큰 어려움 없이 설득에 성공했습니다.

전략이 적중하셨습니다. 2013~2016시즌 내내 지속된 슬럼프 극복에 장타력 개선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단 평이 많죠. 특히 그해 234개 홈런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어요.

선수단 빌드업이 아주 주효했죠. 정의윤(2015), 김동엽(2016), 제이미 로맥(2017) 등 영입 선수들이 줄줄이 성적을 잘 냈습니다. 

특히 로맥 영입은 아주 적절했다고 봐요. 이전까지 SK는 타격보단 수비가 중요한 유격수를 외국인 야수가 맡고 있었거든요. 이걸 바꿔 거포인 로맥을 발탁해 1루수를 맡기자 했습니다.

그 결과 2017시즌엔 최정-한동민-김동엽-로맥으로 구성된 타선이 완전히 불붙게 됐습니다. ‘정동맥 쿼텟(사중주)’이란 유행어까지 나올 정도로요. 바로 그 클라이막스가 홈런 234개였던 거고요.

2018년 SK 와이번스는 통산 네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8년 만에 왕좌를 탈환합니다. 그리고 이 우승엔 슬럼프에 허덕이던 SK를 단 두 시즌 만에 강팀으로 성장시킨 트레이 힐만 감독의 탁월한 리더십이 주효했다는 평인데요.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외국인 우승 감독이자 2010년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이 힐만 감독을 발탁한 인물이 바로 류선규님이었습니다.

트레이 힐만 감독을 직접 추천하셨다고요.

딱 한 분만을 추천했던 건 아니에요. 내외국인을 망라해 여럿을 추려 단장님께 제안했습니다. 물론 그중 힐만 감독님을 가장 적임이라 보긴 했죠. 커리어상 원톱이었고 급도 워낙 높으셔서 저희로선 ‘한국에 오실까?’하는 우려가 컸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합류해 주시더라고요.

왜 힐만 감독이 가장 적임이라 보신 건가요?

이전까지의 감독님들은 김성근 감독님의 레거시에서 잘 벗어나질 못하셨거든요. 말씀으로는 “김성근과 다른 야구를 하겠다”고들 하셨지만 실제론 그게 안 됐죠. 때문에 여기서 자유로울 외국인 감독 선임이 반드시 필요하겠더라고요.

힐만 감독님은 닛폰햄 파이터즈를 이끌고 2006년 일본시리즈 우승하실 때, 제가 직접 삿포로돔까지 가서 3·4·5차전을 다 봤습니다. 그때 받은 인상이 무척 강렬했어요. 

더구나 SK랑 닛폰햄이 교류를 많이 해 그쪽 대표한테도 “힐만 감독을 추천하느냐”고 직접 물었는데 아주 적극적으로 긍정하더라고요. 여러모로 최적이란 판단이 들어 힐만 감독님을 1순위로 추천했습니다.

단 두 시즌 만에 영입 성과가 나왔습니다. 부임 첫해인 2017년 곧바로 포스트시즌에 진출(5위)했고 2018년엔 우승까지 달성했죠.

이분을 모시면서 가장 크게 기대한 게 성적에 앞서 팀 컬러 구축이었어요. 당시 SK는 “무색무취하다” “팀 색깔이 뭔지 모르겠다”는 얘길 많이 들었거든요.

물론 성과야 따라오면 좋겠지만 ‘홈런 구단’ ‘빅볼 야구’ 등 팀 컬러를 입히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그런데 우승이란 최고의 성과까지 내면서 목표를 달성했으니, 그야말로 대성공인 영입이었던 거죠.

류선규-LG트윈스-SK와이번스-SSG랜더스
서울 서초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류선규님/리멤버

Act 7.
SSG 초대 단장, 프로 야구 최초 ‘와이어 투 와이어’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다!

2020년 11월 류선규님은 SK 와이번스의 역사상 마지막 단장에 취임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신세계 이마트가 구단을 인수하면서 류선규님은 새롭게 출범한 SSG 랜더스의 첫 단장 자리에 오릅니다.

SK의 마지막 단장이 되셨어요. 발탁 배경이 궁금합니다.

깜짝 발탁까진 아니었어요. 구단에서 저도 나름 많은 일을 해 왔기에 꾸준히 후보군엔 들어와 있었습니다. 다만 선수 출신 단장을 선임하려는 관성이 셌다 보니 크게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실제로 제가 12년 만의 비선출 단장이기도 했죠.

아무래도 팀이 위기였으니 변화를 원하신 듯해요. 그해 10개 구단 중 9위로 떨어질 만큼 망가져 있었잖아요.

이마트의 구단 인수는 미리 알고 계셨나요?

공개 직전에야 알았습니다. 저도 듣고 너무 놀랐는데 팬들은 오죽했겠어요. 그래서 가능한 한 팀 컬러(빨강)라도 유지하자고 건의드렸어요. 이마트 대표 색상은 노랑이잖아요. 빨강을 유지하게 돼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2년 안에 팀을 재건하고 우승도 이뤄 내겠다”고 공언하셨어요. 자신 있으셨나요?

재건에 방점이 찍힌 말씀이었어요. 반짝 성과보단 내실 있고 유망한 구단으로 다시 탈바꿈하는 게 훨씬 중요했으니까요. 아무래도 자신감보단 책임감과 부담감을 훨씬 더 많이 느꼈습니다.

출범 직후부터 SSG는 발 빠른 구단 정비에 나섭니다. 같은 해 10개 구단 중 가장 먼저 선수단 연봉 협상을 마무리한 데 이어 과감한 투자로 주력 선수들과 비FA 다년 계약을 체결, 안정적으로 전열을 유지해 냅니다. 나아가 추신수·김광현 등 스타 플레이어 영입에도 성공해 전력 강화에도 더욱 힘을 싣습니다.

부임 첫해와 이듬해 모두 연봉 협상을 제일 빠르게 마쳤습니다.

팀 안정화가 급선무였으니까요. 다행히 선수단도 충분히 공감했어요. 아무래도 성적이 나빴으니 상승폭도 제한적이었는데 다들 수긍하더라고요. 서둘러 매듭짓고 빨리 내년을 준비하자는 데 에너지가 잘 모였죠.

2021년 메이저 리그 FA 신분으로 나와 있던 추신수를 영입합니다. 막전 막후의 상황을 들려주세요.

“SSG였기에 추신수가 합류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틀린 얘기예요. 아직 SK 시절인 그해 1월부터 얘기가 긍정적으로 오가고 있었습니다.

단장 취임 한참 전부터도 저는 야수 전력을 더 보강하고 싶었어요. 저희 야수들이 너무 순하고 거칠지를 못했거든요. 때문에 단장이 되고선 눈여겨본 FA 2명을 얼른 데려오려 했는데, 한 명(최주환)만 잘되고 나머진 불발됐습니다. 그런 와중에 추신수가 마침 텍사스랑 계약이 끝나 있던 거예요. 

당시 저희한테 1순위 지명권이 있던 터라 추신수가 한국에 온다면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대형 선수잖아요. 한국행 자체를 장담 못하겠는 거예요. 때문에 콘택도 아주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인연은 인연이었어요. 처음부터 반응이 너무 괜찮았어요. 오히려 고마워하면서 굉장히 호의적이었죠. 계약 막판엔 메이저 리그 구단에서 저희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오퍼도 보냈는데, 딱 잘라 거절하면서 의리를 지키더라고요. 덕분에 무사히 영입할 수 있었습니다.

2022시즌 직전 김광현 영입에도 성공합니다. 스마트한 영입 작전이 주효했다는 평을 받아요.

2021년 저희가 6위를 합니다. 더 확실한 전력 보강이 필요했죠. 처음엔 FA를 데려오려 했어요. 그런데 몸값들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더구나 샐러리캡(팀 총 연봉 상한제) 시행이 1년 앞으로 다가오기도 했고요.

그래서 저흰 FA를 포기하기로 합니다. 차라리 그 돈을 아껴 우리 선수들을 지키는 데 쓰는 편이 낫다고 봐 일부 주전들과 비FA 다년 계약을 맺어요. 

헌데, 그러다 보니 마침 그 이듬해 김광현한테 쓸 쏠쏠한 실탄이 마련된 거예요. 계획한 건 아니지만 운이 절묘하게 따라준 거죠. 

광현이는 원래 MLB 잔류 의지가 강했습니다. 때문에 국내로 돌아온다면 확실한 1인자로 인정받으려 했어요. 그래서 이대호가 받은 종전 최고액(4년 150억원)에 1억원을 더 얹은 역대 최고 계약액을 제시합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성공이었죠.

2022년 11월 SSG 랜더스는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합니다. 시즌 내내 단 한 번도 1위를 내주지 않은, 40년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의 ‘와이어 투 와이어’ 챔피언이었죠.

당초 2023년 우승이 목표셨다고요.

맞아요. 일부 주전들의 부상도 있고 해서 2023년을 목표로 했었죠. 헌데 김광현이 합류하면서 시점을 앞당겼습니다. 승부수를 건 거예요. 그리고 다행히 승부수가 통했죠. 모두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 줬거든요.

심지어 사상 첫 ‘와이어 투 와이어’ 챔피언이었습니다.

2018년 SK 우승은 ‘업셋’이었어요. 다들 “어우두(어차피 우승은 두산)”라 했던 시즌이죠. 때문에 별로 부담이 없었어요. 한국시리즈에서도 망신만 당하지 말잔 마음이었는데 우승까지 했으니 마냥 기뻤습니다.

그런데 2022년은 완전히 달랐죠. 처음부터 계속 1위만 하다 보니 그 자리를 꼭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시즌 내내 엄청 컸습니다. 언젠가부턴 잠도 안 와서 정신과에서 수면제를 받아 먹어야 했어요. 때문에 우승을 했을 때도 기쁨보단 안도감이 더 컸습니다.

사실 2022시즌 개막 전까지 어느 누구도 SSG를 탑독으로 꼽지 않았어요. 헌데 쭉 1위를 하고 있으니 어느새 눈높이가 다들 너무 높이 올라가 있는 거예요. 모그룹도 이걸 당연시했고요. 

하지만 실상은 참 어려웠거든요. 그럼에도 이걸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 없는 노릇이잖아요? 결국 이 악물고 결과로 보여 줄 밖에요. 그걸 알기에 선수도 감독도 프론트도 사력을 다했고, 그 노력들이 모여 최상의 성적이 나온 듯합니다.

류선규-LG트윈스-SK와이번스-SSG랜더스
/리멤버

Act 8.
전설이 된 야구 덕후, 그가 쏘아 올릴 역전 만루 홈런?

우승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인 2022년 12월, 류선규님은 돌연 SSG 랜더스 단장직을 사임합니다.


POINT OF VIEW

“프로란 오로지 승부만을 위해 자존심을 내걸 줄 아는 사람”

최고의 성과를 낸 순간에 돌연 사퇴하셨어요. 일각에선 자의가 아니었단 말도 나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죠. 새로 들어온 구단 입장에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싶었겠죠. 그걸 제가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다른 보직을 제안하시기도 했는데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어차피 제 소임을 다했다고도 생각했고요.

더구나 그때 너무 지쳐 있기도 했습니다. 내년엔 어떻게 해야 하나 당장 두려움도 컸죠. 그래서인지 더 잘 해낼 자신이 없더라고요. 물론 애초에 더 잘할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요. (웃음)

물론 SK가 그대로 있었다면 얘기가 다를 수도 있어요. 아마 더 오래 다녔을 겁니다. SK에서 많은 걸 배웠는데 구단이 매각돼서 아쉬웠어요. 매각한 SK는 원망해도 인수한 SSG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저 인연이 다한 걸로 받아들였어요.

혹시 다른 구단에서 영입 제의가 오진 않았나요?

잠깐 있긴 있었죠. 그런데 제가 나올 때 워낙에 평지풍파가 일어났거든요. 한 3주쯤 매일매일 기사가 나더라고요. 김성근 감독님 잘릴 때보다 더 많이 났죠. 저도 야구판에 오래 있었지만 누가 나갔다고 이 정도까지 난리 난 경우는 없었어요.

그러니 누가 데려가겠어요? 저라도 부담스러울 듯해요. 사실 저도 조용히 나가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처럼 안 됐습니다.

재야로 돌아온 류선규님은 여전한 ‘야구 덕후’로서 활발히 활약 중입니다. 다만 이제 PC통신이 아닌 언론·포털·유튜브 등 다양한 미디어 영역이 그의 무대입니다.

다시 재야의 야구 덕후로 돌아오셨습니다.

어릴 적 제게 야구란 ‘재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신나고 좋아서 야구를 봤어요. 그런데 30년 가까이 야구단에 몸담다 보니 야구에 ‘성적’이라는 굴레가 따라붙더군요. 어느새 재미는 완벽히 뒷전이고, 오로지 더 좋은 성적만 좇는 경주마처럼 살게 된 거예요.

이젠 그런 굴레를 다시 벗어 던질 수 있는 시점이 됐는데, 그게 한순간에 되진 않더라고요. 때문에 야구를 보면 약간 허깨비를 보는 느낌이에요. 그나마 다시 ‘덕질’을 하면서 흥미를 조금씩 되찾는 중입니다.

30년 전보다 덕질 무대가 훨씬 다양해지셨어요. 신문 칼럼도 쓰시고 유튜브까지 하십니다.

제가 먼저 제의한 것들은 아니고 권유가 와서 시작한 겁니다. 때문에 처음엔 별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헌데 갈수록 나름의 사명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어떤 사명인가요?

구단 프론트를 향한 오해와 편견이 너무 많아요. 대중한테 프론트는 그저 ‘힘 있는 나쁜 놈’이에요. 팀이 잘하면 선수나 감독이 잘한 거고 못하면 프론트만 나쁜 놈이죠. 사측으로 몰리면서 욕만 먹을 뿐입니다.

하지만 절대 아니거든요. 사측은 오너지 프론트는 졸개일 뿐이에요. 오히려 요즘엔 조직 내 기여도 제대로 인정 못받습니다. 오죽하면 이제 프론트 경험이 아예 없는 해설 위원들을 단장에 앉히겠어요.

저는 프론트의 존재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게 하고 싶어요. 그래서 프론트만이 가질 수 있는 전문적 시각·경험도 팬들한테 열심히 공유하고 있는 거고요. 아마 저보다 더 힘껏 떠드는 프론트 출신 야구인은 없을 겁니다.

나아가 후배 프론트들이 참고할 수 있는 새로운 길들도 제시하고 싶습니다. 여지껏 프론트들은 그만두면 다들 소리 소문 없이 야구판에서 사라져 왔거든요. 이제 프론트 출신도 충분히 여러 영역에서 활약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싶어요.

전형적인 ‘덕업일치’의 삶을 살아오셨어요.

덕분에 좋았던 건 야구를 원 없이 봤다는 거예요. 지긋지긋하다 할 만큼 무지하게 봤죠. 공짜로 돈까지 받으면서요. 하지만 웬만하면 덕업일치를 추천하진 않습니다. 특히 야구는요.

저는 배움을 향한 갈증이 엄청 커요. 그런데 야구, 특히 스포츠 구단의 세계는 무척 작습니다. 일단 인원부터가 너무 적어요. 때문에 다양한 기회를 부여받기도 어렵죠. 순환을 잘 안 시키니까요. 

더구나 프론트는 전문성을 잘 인정해 주지도 않아요. 마케팅을 잘해도 끽해야 “야구단 마케팅 아니냐”면서 무시하고, 야구에 관해서도 “선출도 아닌데 야구를 뭘 알겠냐”면서 몰아붙이죠. 여기 와도 무시, 저기 가도 무시인데 어떻게 추천하겠어요?

저는 정말 운이 좋은 특이 케이스였던 거죠. 지금 같은 구조였다면 절대 안 했을 겁니다. 앞으로도 지금과 같다면 저 같은 사람은 나오기 힘들 거예요.

그럼에도 25년 넘게 야구단에만 몸담으셨습니다.

사실 그 이유는 별 게 없어요. 야구가 너무 재밌어서? 감동이 있는 스포츠라서? 아닙니다. 그저 제 삶의 한 부분이 돼 버렸기 때문이에요. 못해도 절반쯤은요. 야구에 반응하는 일이 본능처럼 몸에 밴 거죠. 

그래서 지금도 야구를 보면 딱 보여요. 흘러가는 모든 게요. 구단에 있었다면 야구 운영에 쓰였겠지만, 밖에 있으니 칼럼이나 유튜브로 풀어내는 거죠. 결국 큰 맥락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라 봐요.

류선규-LG트윈스-SK와이번스-SSG랜더스
서울 서초구 한 스튜디오에서의 류선규님/리멤버

류선규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2009년 SK 신인 선수들 대상으로 PR 교육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프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 선수가 이렇게 답하더라고요. “돈값을 하는 존재 아니냐.” 맞는 말입니다. 돈값을 해야 프로죠. 

하지만 딱 그만큼만, 100%만 하는 건 제대로 된 프로가 아니라 봐요. 승부의 세계는 진짜 냉정하거든요. 26년간 거저 얻은 승리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스트레스도 그만큼은 안 받았겠죠.

이기고 싶다면 100%이 아닌 120%를 해야 합니다. 모든 걸 짜내 부딪혀야 해요. 이길 수만 있다면 자존심이 대수겠나요? 프로의 자존심은 오직 승부에만 달려 있어요. 결국 진짜 ==프로란 오로지 승부만을 위해 자존심을 내걸 줄 아는 사람==이에요.

덕과 업의 차이도 여기에 있습니다. 덕질에 자존심까지 걸진 않죠. 하지만 업은 달라요. 진짜 결과를 만드는 사람은 거의 목숨을 걸잖아요. 꼭 야구에만 적용되는 얘기일까요?

프로의 자존심, 그게 승부의 열쇠라 봅니다. 각자 승부에 자존심을 걸어 보세요. 그럼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9회 말 2아웃에도 역전 만루 홈런이 터지는 게 야구, 그리고 인생이니까요.

프로들의 경험을 공유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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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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