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암

기업인이 된 레전드 농구인, 불굴의 ‘리바운드’로 역전을 경영하다

2025. 1. 21.

최희암-고려용접봉-서장훈-연세대-문경은-이상민
최희암-고려용접봉-서장훈-연세대-문경은-이상민
최희암-고려용접봉-서장훈-연세대-문경은-이상민

최희암

現 고려용접봉 부회장, 前 전자랜드·동국대·모비스·연세대 농구 감독

한국 대학 농구의 한 획을 그은 전설적 농구 감독이자, 국내 용접재 전문 제조사 고려용접봉을 이끄는 기업인입니다. 1986년 모교 연세대 농구부 지도자로 부임, 1994년 사상 최초 대학팀 ‘농구대잔치’ 우승을 이뤄 내며 90년대 대학 농구 전성시대를 이끕니다. 이후 프로팀 감독을 거쳐 2009년 고려용접봉에 합류, 현재 부회장으로서 대외 세일즈와 신사업 개발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응답하라 1994’ 한국 농구 사상 최전성기였던 이 시기 만화 ‘슬램덩크’,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더불어 전국을 신드롬급 농구 열풍에 몰아넣은 주역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연세대 농구부입니다. 

‘국보급 센터’ 서장훈, ‘람보 슈터’ 문경은, ‘컴퓨터 가드’ 이상민 등을 필두로 연세대는 쟁쟁한 실업팀들마저 꺾고 파죽지세로 연전연승, 사상 최초 ‘농구대잔치’ 대학팀 우승이란 전설을 써냅니다.

오늘 프롤로그는 이 전무후무한 ‘독수리 군단’을 조련해 90년대 대학 농구의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레전드 농구인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국내 굴지의 제조사를 경영하는 베테랑 기업인이기도 하죠. 전 농구 감독이자 용접재 전문 기업 고려용접봉 부회장, 최희암님이 그 주인공입니다.

<“적중률 100%짜리 슛은 없습니다. 그러니 슛에 실패했다고 포기해선 안 되죠. 농구든 인생이든 결국 승리는 리바운드에 달린 법입니다.”>

17년간 대학 농구를 호령하던 ‘살아 있는 전설’인 그였지만, 뒤늦게 밟은 프로 무대는 쉽지 않았습니다. 총 전적 112승 129패, ‘전설’답지 않은 부진한 성적에 5년이 채 안 돼 불명예 퇴진을 해야 했죠.

30여 년 농구 인생을 뒤로하고 경영인으로 출발한 인생 후반전, 위기는 더 가혹했습니다. 해외 지사 파견 3년 만에 핵심 거래처가 파산, 덩달아 부도 위기에 휩쓸리는 절체절명의 궁지에 몰리게 된 겁니다.

하지만 그의 별명은 ‘아카징키’(‘빨간 약’의 일본식 표현). 선수 시절 발목이 나가고 머리가 깨져도 약만 바르고 훈련을 거르지 않았다는 특유의 근성으로 위기를 극복, 경영 입문 5년 만에 CEO 자리까지 오르는 역전의 ‘리바운드’를 잡아 냅니다.

과연 만년 벤치 선수를 정상급 지도자로, 위기의 초짜 경영인을 베테랑 기업가로 성장하게 한 그 근성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리멤버가 최희암님을 직접 만나 90년대 그 시절 흥미로운 농구 이야기와 함께 생생히 담아 봤습니다.

최희암-고려용접봉-연세대
서울 중구 퇴계로 고려용접봉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희암님/리멤버

Chapter 1. 
농구 대신 펜으로 Y대 합격한 레전드 농구인?!

$[최희암님은 ‘농구 명문’ 휘문 중·고교, 연세대 체교과를 졸업한 엘리트 체육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그의 연세대 진학을 결정지은 건 운동이 아닌 공부였죠. 74학번 농구부 동기 중 유일하게 체육 특기생 선발에서 탈락, 입학 시험을 치르고 들어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연세대 농구부 74학번 중 혼자서만 본고사를 치른 멤버셨어요.

중1 때 키가 168cm이었습니다. 또래 중 장신이었죠. 포지션도 키 큰 아이들이 맡는 센터였고 실력도 괜찮았습니다. 헌데 고등학교 올라갈 무렵부터 키가 더 안 크더라고요. 중3 때 176cm이었는데 이게 평생의 키가 됐지 뭡니까. 상대적 단신이 되면서 센터에서 포워드로, 다시 가드로 포지션이 여러 번 바뀌었어요.

그럼에도 농구를 관두지 않으셨어요. 공부도 곧잘 하셨다면서요.

대성하긴 어려워도 노력하면 나름 괜찮은 선수가 될 거라 믿었거든요. 그래서 어떤 포지션을 맡든 무작정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타고난 역량차를 뒤집기란 쉽지 않더군요. 지망 대학 스카웃에서도 줄줄이 떨어졌어요.

그럼에도 포기만 하지 않으면 살아날 길은 언제나 있는 것 같아요. 운동부 치곤 공부를 게을리 하진 않았는데 덕분에 벼락치기가 통해 연세대 본고사에 붙었습니다. 물론 실기도 중요하니 공부만으로 입학한 건 아니지만요.

농구부 입성도 만만찮았을 듯합니다. 박수교·신선우 등 쟁쟁한 실력자들이 많았어요.

제가 휘문고 농구부 주장이었거든요. 주장까지 하던 애가 동급생 중 혼자 낙오된 게 안쓰러웠나 봅니다. 감독님은 물론 교장 선생님까지 나서 절 받아 달라 부탁하고 다니셨어요. 다행히 교장 선생님이 연세대 출신이셔서 얘기가 잘됐던 모양입니다. 사실 스카웃 TO를 쓰는 게 아니니 농구부 입장에서도 딱히 손해 볼 건 없기도 했고요.

그럼에도 벤치 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고요.

신입생 때까진 주전이었어요. 그해 연고전 베스트 멤버로 뛰기도 했죠. 그런데 2학년 때부턴 쉽지 않더라고요. 75학번 후배로 같은 가드인 신동찬·박인규가 들어왔는데 전부 190cm에 가까운 장신이었습니다. 나중에 전부 국가 대표로 활약하기도 했죠. 점점 제 설 자리가 줄어들더라고요.

최희암-연세대-고려용접봉
서울 중구 퇴계로 고려용접봉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희암님/리멤버

Chapter 2. 
만년 벤치 ‘아카징키’, 국가 대표를 이기다!

$[벤치 신세에 머물던 3학년 말 최희암님은 자신의 농구 인생을 바꿔 준 지도자, 도널드 휴스턴을 만납니다. 당시 이화여대 교환 교수로 한국에 와 있던 그는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을 기른 전설적 감독 딘 스미스에게 사사한 농구 전문가였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최희암님을 비롯한 연세대 후보 선수들의 기량도 급성장해, 비록 연습 경기지만 국가 대표팀을 2차례나 꺾는 이변을 일으킵니다.]

<"당장 성과가 안 나도 진득히 인내하고 버티면, 그 덕에 비로소 보이고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으로 도널드 휴스턴 교수를 꼽으세요.

정식 농구 지도자는 아니고 민속학을 연구하던 분이셨어요. 그래도 대학 때까진 선수 생활을 하셨고 한국 농구에도 관심이 커 연고전도 보러 오셨는데 그게 인연이 돼 저희 지도를 맡게 되셨습니다. 아마 이분이 노스캐롤라이나대 출신이라서 연세대를 택하셨을 거예요. 상징색이 둘다 파란색이니까요. (웃음)

영어 실력이 발군이라 통역을 전담하셨다고요.

잘하진 못했어요. 영어 사전을 끼고 다니며 겨우 통역을 했죠. 대신 기록을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이야 NBA 경기도 누구나 쉽게 보는 세상이라지만 그땐 아니었잖아요. 그분의 가르침이 저희한텐 하늘이 내린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어요. 하나라도 놓칠까 노트에 빠짐없이 적어 기록했고 그걸 죽어라 훈련해 체계화했죠. 덕분에 당시 한국에선 접하지 못한 다양한 최신식 전술을 국내 그 어느 팀보다 더 빠르고 꼼꼼하게 익혔어요.

더구나 코치님 덕에 실전 경험도 주전과 대등할 만큼 충실히 쌓았죠. 그때 주전들은 대부분 국가 대표로 차출돼 코치님께 직접 지도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코치님은 본인이 합을 맞춰 본 선수들 위주로 경기를 치르려 했거든요. 때문에 학교와 왕왕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아랑곳 않으셨죠. 여러 면에서 제가 훗날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큰 밑거름을 주신 분입니다.

최희암-도널드휴스턴
1977년 연고전 경기에서 최희암님(왼쪽에서 세 번째). 등 번호 15번을 단 유니폼을 입고 있다. 정면 오른쪽에 서 있는 외국인이 도널드 휴스턴 교수/본인 제공

그 덕분일까요. 연세대 후보 선수들이 국가 대표팀을 두 번이나 이기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죠.

연습 경기를 3차례 했는데 앞선 2번을 승리했습니다. 크게 이긴 건 아니고 막판에 한두 골 차이로 겨우 이겼습니다. 하지만 승리는 승리죠. (웃음) 당시 대표팀 공격이 우리 수비에 막혀 거의 풀리질 않았어요. 코치님께 전수받은 전술들이 제대로 먹힌 거죠. 짜릿했습니다.

$[최희암님은 1977년 현대 실업 농구단 창단 멤버로 입단, 대학 졸업 후에도 선수로서 경력을 계속 이어 갑니다. 그러나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채 1982년 짧은 선수 생활을 마감합니다.]

지금에 비하면 은퇴가 좀 이른 편이셨어요.

그땐 서른만 돼도 노장 소리를 들었어요. 은퇴 때 제가 스물일곱이었으니 아주 빠른 편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더 빨리 은퇴하고 싶었어요. 훈련은 훈련대로 힘든데 실업 선수로 뛴다고 수당을 더 받는 것도 아니라 얼른 관두고 넥타이를 매는 게 나았거든요. 그래서 군 복무를 마치고 곧장 은퇴하려 했는데 팀에서 “딱 1년만 더 있어 달라” 부탁하더군요. 그때 이충희·이원우 등 아주 쟁쟁한 신인들이 들어왔거든요. 기강을 잡아 줄 고참이 필요하다 해 의리로 남았습니다. 벤치 신세였던 건 매한가지였지만요.

훗날 지도자 경력과 비교하면 선수로서의 아쉬움은 크셨을 듯합니다.

아닙니다. 아쉬움이란 잘할 수 있었는데 잘 안 됐을 때 드는 감정이잖아요? 제 선수로서의 한계를 충분히 인정한 터라 아쉬울 건 하나도 없었어요. 다만 부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잘나가는 애들처럼 저도 명문대 스카웃을 바랐고 국가 대표도 꿈꿨지만 전부 안 됐으니 말예요.

하지만 그 시절을 돌이킬 때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아쉬움도 부러움도 아닌 바로 다행스러움이에요. 농구는 결코 쉬운 운동이 아니거든요. 중도 포기한 친구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저 역시 말 못 할 숱한 위기들이 있었죠. 그럼에도 포기 않고 할 수 있는 데까진 다 해 본 듯해 참 다행입니다. 선수 때 제 별명이 ‘아카징키’였거든요. 발목이 나가도 머리가 깨져도 약만 바르고 훈련이나 시합을 절대 거르지 않아 붙은 별명이죠.

사실 세상일이 그래요. 당장 성과가 안 나도 진득히 인내하고 버티면 그 덕에 비로소 보이고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요즘엔 빠르게 포기하라고들 하죠?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죄다 미련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최희암-고려용접봉-연세대
서울 중구 퇴계로 고려용접봉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희암님/리멤버

Chapter 3. 
연세대 지휘봉 잡고 코트 복귀… ‘독수리 군단’을 빌드업하다

$[현대 계열사에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던 최희암님은 입사 4년 만인 1986년 돌연 직장을 관둡니다. 그리고 같은 해 모교인 연세대 농구부 지도자로 부임, 갓 서른을 넘긴 최연소의 무명 감독으로 코트에 복귀합니다.]

<"사람 다루는 노하우가 있냐고들 묻는데 별 게 아닙니다. 농구든 경영이든 제 스스로 이유를 찾게 해 주면 됩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일이 안 맞아서 관둔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농구보다 편해서 좋았죠. 스포츠는 반복의 연속이잖아요. 직장에서 맡은 업무들도 비슷했어요. 성실하면 곧잘 적응해 잘할 수 있는 일들이었죠. 처음만 힘들지 나중엔 업무 시간도 두세 시간씩 남았습니다.

그러다 1985년, 이라크 파견을 간 게 화근이었어요. 승진하려면 해외 파견을 한번은 다녀와야 한대서 갔는데 하필 그때가 이라크랑 이란이 전쟁을 벌일 때였지 뭡니까. 통신 두절로 가족들과 연락도 거의 못한 데다 설상가상 휴가마저 통으로 잘렸죠. 처자식 걱정에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아예 관두고자 이듬해 한국에 와 버렸습니다.

연세대 농구부 감독엔 어떻게 발탁됐나요?

귀국 시점이 1986년 8월이었어요. 9월 정기 연고전 코앞이었죠. 그런데 연세대 농구부 감독 자리가 4개월째 공석이었습니다. 학교 측도 발등에 불이 떨어져 “연고전까지만 팀을 맡아 달라” 제게 통사정을 했죠. 이전부터 후배들 코치 노릇을 종종 해 주고 있던 터라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니 모른 척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였는데, 연고전이 끝나니 아예 정식 감독직을 제안하더라고요. “후임이 올 때까지만 하겠다”고 했는데, 그게 17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웃음)

$[문경은(90학번)·이상민(91학번)·우지원(92학번)·서장훈(93학번)에 이르기까지, 연세대는 당대 최고의 특급 선수들을 줄줄이 영입합니다. 여기에 ‘호랑이 감독’ 최희암님 특유의 혹독한 트레이닝과 기민한 용병술이 더해지며 연세대 농구부는 90년대 대학 농구의 전성시대를 이끌 최강팀으로 거듭납니다.]

그야말로 당대 최강 진용을 꾸리셨어요.

냉정한 얘기지만 부임 당시 전력을 살펴보니 훈련만으로 될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땐 대학들이 고교 농구 대회 4강 안에 든 선수들을 스카웃해 갔어요. 그런데 저흰 앞서 스카웃한 아이들 상당수가 마이너 대회 출신들이었죠. 속된 말로 ‘낙엽을 주웠다’고 해요. 당시만 해도 메이저 대회에서 활약한 강팀들은 마이너 대회엔 출전조차 않는 부조리가 있었습니다. 약팀들도 스카웃을 받게 해 주려는 일종의 꼼수였죠. 제아무리 건축술이 뛰어나도 재목이 형편없으면 건물은 무너지죠. 스포츠도 똑같습니다. 팀 전력 70%가 선수 역량으로 결정돼요. 때문에 88학번부턴 스카웃에 제대로 공을 들였습니다.

원래 문경은은 경희대, 이상민은 고려대로 갈 뻔했다면서요.

당시 경은이가 다닌 광신고 출신들은 경희대 진학이 관례였어요. 체육부장, 감독이 죄다 경희대 출신이었거든요. 헌데 감독이 경은이만큼은 연세대를 보내고 싶어 했어요. 제자 애정이 강한 양반이었는데, 우리한테 보내야 경은이가 더 클 수 있다고 본 거죠.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나머지 졸업반 애들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게 생긴 거예요. 경은이가 경희대로 가면 무난히 함께 스카웃될 애들인데 저희 때문에 난처해진 거죠. 그래서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습니다. 나머지 아이들도 전부 스카웃하기로요. 다른 대학들이 제시한 안보다 훨씬 과감한 결정이었죠. 우리한테 꼭 필요한 건 경은이 같은 에이스인데 우물대다 실기할 순 없었어요.

사실 스카웃에 매번 성공할 순 없어서 운도 참 중요합니다. 상민이는 운이 잘 따라 준 경우예요. 그땐 모든 면에서 우리가 불리했어요. 조건도 고려대가 훨씬 더 좋았고 상민이 아버지마저도 고려대 진학을 더 희망했죠. 그럼에도 본인이 완강히 연세대를 고집했어요. “고려대 가면 농구를 아예 관둔다”고 선언할 정도로요. 덕분에 이상민이란 대어를 저희가 낚을 수 있었습니다.

에이스 영입이 한둘에 그치지 않았어요. 나름의 전략을 꼽는다면요?

선수들이 청소년 대표팀에 뽑혀 해외 원정 경기에 갈 때마다 한 200달러쯤 쥐여 줬어요. 그러곤 특별히 당부했죠. “내 선물 사 오란 게 아니다. 이 돈으로 후배들한테 맛있는 빵을 사서 나눠 줘라.” 사실 대학에서 좋은 고교 선수를 스카웃하려고 온갖 일을 다 합니다. 헌데 이 어린 친구들한테 가장 먹히는 건 학교도 부모 말도 아닌 바로 선배들이에요. 같이 뛸 형들이 미덥고 좋으면 결국 그 학교에 가고 싶어 해요. 

(서)장훈이가 그런 케이스 중 하나였어요. 개인 기량은 아주 뛰어난데 다른 친구들이 받쳐 주질 않아 답답함이 큰 친구였거든요. 그런데 대표팀 경기만 뛰면 날아다녔습니다. 이상민 같은 다른 에이스 형들이 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때문에 나중에 모교(휘문고)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저희한테 오더라고요. ‘상민이 형과 함께 뛰고 싶다’는 게 이유 중 하나였죠.

혹독한 훈련을 고집하셨습니다. 기합을 견디다 못해 “차라리 농사나 짓겠다”면서 농구부를 무단 이탈한 서장훈의 일화도 유명하죠.

맞습니다. 굉장히 엄하게 했어요. 무작정 이유 없이 그랬던 건 아닙니다. 캠퍼스가 신촌에 있잖아요? 교문만 나서면 바로 유흥가예요. 때문에 한번 기강이 풀어지면 무너지기 십상이라 봤습니다. 아이들한텐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을 겁니다. 그만큼 초반엔 튕겨져 나가는 애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제 방식을 구태여 바꾸진 않았습니다. 어차피 대부분 돌아올 거라 낙관했거든요.

어떤 이유로요?

저도 선수 생활을 해 봤으니 잘 알았죠. ‘돈 떨어지면 돌아온다.’ 이게 공식이에요.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만 그땐 아르바이트도 흔치 않던 시절이잖아요. 부모가 맘이 약해져 따로 보살펴 주지 않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뒤 한 6개월이면 아이들이 적응을 마쳐요. 연고전 같은 큰 경기 한번 치러 보면 제 스스로 욕심을 내거든요. 그땐 꾸준히 관리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종종 저한테 사람 다루는 노하우가 있냐고들 묻는데 별 게 아닙니다. 농구든 경영이든 제 스스로 이유를 찾게 해 주면 됩니다.

인성 교육도 굉장히 강조하셨습니다. “볼펜 한 자루라도 너희가 만들어 봤냐. 생산성 없는 공놀이를 주업으로 삼으면서 돈 벌고 대접도 받는 건 팬들 덕에 가능한 거다. 팬들에게 잘해야 한다”는 명언은 아직도 종종 회자됩니다.

선수한테 실력이 쌓이고 유명세가 따르면 그만큼 별별 일이 다 생깁니다. 하다 못해 경기장에 들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온갖 곤욕을 치러요. 옷을 잡아당기거나 몸을 할퀴는 건 물론 머리채를 잡아 뜯거나 쌍욕을 퍼붓기도 하죠. 그럼 어느 순간부턴 팬들이 귀찮아지고 심지어 싫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코 본질을 잊어선 안 됩니다. 스포츠의 존재 이유가 뭡니까? 곧 죽어도 팬들한테 있는 거 아닙니까. 대학 선수들은 선수이기에 앞서 어린 학생들이에요. 그저 남들보다 재능이 많아서, 경기를 잘 뛰면 돈을 크게 벌 수 있어서 농구를 시작했을 수 있죠. 하지만 그건 곁가지입니다. 결국 어느 순간에도 본질을 붙들 수 있는 사람만이 롱런하는 법이에요. 아이들이 그걸 하루라도 더 빨리 깨치길 바랐습니다.

최희암-고려용접봉-연세대
서울 중구 퇴계로 고려용접봉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희암님/리멤버

Chapter 4. 
농구대잔치 3연패! 한국 대학 농구의 전설을 쓰다

$[1990년대, 한국 농구의 최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 시기 만화 ‘슬램덩크’,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더불어 온 국민을 신드롬 수준의 농구 열풍에 몰아넣은 주역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대학 농구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연세대 농구부가 있었죠. 대학 리그 하위권을 맴돌던 연세대는 최희암 감독 부임 4년 만인 1990년 4개 대회를 석권하며 대학 농구 전관왕에 등극, 급기야 4년 뒤인 1994년 대학팀 최초로 실업팀을 꺾고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머쥐는 전설을 써냅니다.]

농구대잔치 3연패(프로 농구 출범 이전 2번)를 이뤄 내셨습니다. 지도자로서 그 비결을 꼽는다면요?

코치 임명 문제로 학교랑 옥신각신한 일이 있었어요. 이우재 선생을 저희 코치로 모시려 했는데 그 양반이 고려대 출신이었거든요. 그럼에도 제 뜻대로 밀어붙였습니다. 선수들이 보다 더 다양한 농구를 배웠으면 해서요. 그리고 이듬해 연세대가 농구대잔치 첫 우승을 했습니다.

겨울이면 선수들을 용산고, 휘문고, 송도고로 ‘유학’ 보낸 것도 마찬가지였고요. 경은이든 장훈이든 너나 할 것 없이 다요. 제가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들을 배워 오란 취지였죠. 더 잘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배움이든 부끄러워 해선 안 된다는 게 제 철학이었습니다. 그 철학이 비결이라면 비결이죠.

전략적 측면에서 가장 주효했던 건 무엇인가요?

농구는 혼자 하지 않죠. 5명이 함께 만드는 스포츠예요.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이 역할 분배입니다. 저는 포지션마다 선수를 2명 이상 두지 않았어요. 가령 포인트 가드는 리딩과 패싱력이 걸출한 상민이가, 골밑은 장악력이 뛰어난 장훈이가, 3점슛은 슈팅이 좋은 경은이가 책임지는 식이었죠. 물론 올라운드 플레이가 가능한 친구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철저히 선수들 간 비교 우위가 우선이었습니다.

자기 만족적 플레이도 철저히 금지했습니다. 농구는 완벽히 리듬 게임이에요. 어설프게 겉멋 든 기술 한두 개 배웠다고 혼자 튀는 행동을 해 버리면 팀이 탄 리듬이 꺾일 수 있고 곧 패배로 이어질 수 있어요. 쓸데없는 짓들은 못하게 했습니다.

연세대-농구부-서장훈-문경은-이상민-최희암-우지원
1994년 3월 ‘농구대잔치’ 결승전 승리 직후 자축 세레모니를 하고 있는 연세대 선수들/본인 제공

‘잘하는 걸 책임지고 잘해라’, 특유의 분업 농구군요.

역설적으로 훈련 땐 로테이션을 돌리듯 여러 포지션을 뛰어 보도록 시켰습니다. 제대로 된 분업을 하려면 선수들 각자가 자기 본업만 잘 알아선 안 되거든요. 센터는 가드를 볼 줄 알아야 하고, 가드는 센터를 볼 수 있어야 해요. 상대 포지션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답답해 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어야 하는 거죠. 그래야 본인 포지션의 강점도 약점도 120% 파악할 수 있고, 정말 찰떡 같은 분업 농구가 됩니다.

여담이지만 훗날 하게 된 경영이란 것도 참 비슷하더라고요. 저는 종종 직원들한테 “유능한 감독이 돼라”고 강조했어요. 자기 능력·권한 바깥의 일로 끙끙 앓지 말고 누가 적임일지 판단해 유연하게 처리하란 거죠. 그러려면 자신은 물론 다른 동료들의 역할이나 역량, 태도 등을 속속들이 잘 알아야 합니다. 아주 똑똑한 분업이 될 때 기업도 잘 굴러가더라고요.

90년대 연세대 농구부는 그 시대를 풍미한 그야말로 전설적인 팀이었죠. 감독으로서 소회를 여쭙습니다.

떠들썩했다는 건 당연히 압니다. 하지만 피부로 와닿진 않았어요. 코트 바깥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이 저와는 아무 상관없는 거라 생각했거든요. 애초에 즐길 여력부터가 없었죠. 오늘 우승했다고 다음 대회도 우승한단 보장이 있습니까? 감독은 늘 다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즐기고만 있을 수가 없죠. 참 고된 일입니다.

그럼에도 17년이나 한 팀을 이끄셨어요.

즐기지 못한다고 즐겁지 않은 것만은 아니거든요. 즐겁지 않았다면 17년이나 못 했을 거예요. 새파란 청춘들이 모여 오직 한 가지 목표만 고집하며 죽어라 땀 흘리는 일보다 더 즐거운 게 어딨겠습니까? 살아 보니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은 정말 몇 없습디다. 잊지 못할 90년대, 참 즐거웠습니다.

1994년 3월 ‘농구대잔치’ 결승전 승리 직후 인터뷰 중인 최희암님/리멤버

Chapter 5. 
늦깎이 프로 감독, 좌절을 맛보다

$[2002년 최희암님은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현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에서 프로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대학 농구에선 전설로 대접받는 그였지만 늦깎이 프로 감독으로선 쉽지 않았습니다. 직전 최하위(10위)였던 모비스를 부임 직후 6위까지 올려놓으며 나름 선전했지만, 바로 다음 시즌에선 부진한 성적으로 중도 사퇴하며 쓰라린 신고식을 치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프로 감독과 저는 그때 연이 아니었던 거예요. 시절인연이란 게 그런 것을요.">

당초엔 프로 출범을 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그만큼 미운 털도 세게 박히셨죠.

실업은 은퇴해도 직장이 보장되지만 프로는 미래도 불투명한 데다 못하면 곧바로 백수가 돼 버리잖아요. 잘하는 선수들은 훨씬 더 대접받지만 끽해야 1년에 한두 명이죠. 대학 지도자 입장에선 당연히 걱정이 컸습니다. 

백번 양보해 농구 발전에 도움만 된다면야 환영했을 겁니다. 그러나 실상은 구단들이 선수를 훨씬 더 쉽게 콘트롤하기 위함이란 얘기들이 공공연했어요. 실제 선수 계약에 크고 작은 독소 조항들도 많았고요. 누군가는 소리를 쳐야 하는데 누가 소리를 치겠어요? 우리 제자들이니 우리 감독들이 나설 수밖에요. 그래서 반대 목소리를 냈던 겁니다.

그럼에도 결국 프로 농구에 합류하셨습니다.

연봉이 프로팀 감독 반절만 됐어도 학교에 남았을 거란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단연 경제적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하지만 돈 때문만은 아니에요. 대학은 길어야 선수를 4년밖에 못 씁니다. 팀 빌드업 주기가 너무 짧죠. 반면 프로는 잘하기만 하면 얼마든 더 데리고 있을 수 있잖아요. 훨씬 더 안정적으로 팀 전력을 구축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게 지도자로서 좀 탐이 났습니다.

하지만 모비스 시절 성적은 기대 이하였단 평입니다.

제 경험 부족이 컸다고 자평합니다. 일례로 취침 때면 선수들이 죄다 휴대폰을 복도에 내놓고 자게 했어요. 밤새 휴대폰하며 노는 친구들이 있을 줄 알았거든요. 용병도 굉장히 엄하게 관리했고요. 그러나 완벽한 기우였습니다. 다들 프로답게 자기 콘트롤을 어느 정도 잘하고 있더라고요. 대학생과 프로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건데 리더십 측면에서 이걸 너무 간과했던 것 같습니다.

무리한 선수 리빌딩이 패인이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중앙대 출신 주력 선수들을 내보내고 연세대 OB들로 팀을 채운 게 악수였다는 거죠.

그건 저도 할 얘기가 있어요. 부임 전 모비스 승률이 33%였고 성적은 꼴찌였어요. 팀은 이 지경인데 서로 남 탓만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팀은 백약이 무효해요. 어떻게든 패배할 이유를 스스로 계속 만들거든요. 기업에도 통하는 얘기입니다. 전 파산한 회사 출신은 뽑지 않아요.

선수 리빌딩에 주력한 것도 그래서예요. 일단 승리에 익숙한 친구들이 들어와 분위기를 어떻게든 일신해 주는 게 급선무였거든요. 물론 연세대 출신이 많았지만 학교를 가렸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 정인교 같은 고려대 친구도 데려왔는데 그건 말을 안 하더라고요. 여하간 안팎으로 반대가 심했지만 밀어붙였고 첫 시즌은 결과도 나쁘지 않았죠. 이듬해 리빌딩에 더 박차를 가하려 했는데 뜻대로 안 됐고 성적도 안 좋으니 스스로 내려놨습니다.

$[2006년 최희암님은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현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감독으로 부임하며 3년 만에 프로 농구로 복귀합니다. 두 시즌 연속 꼴찌였던 전자랜드는 그의 지도 아래 2007-2008시즌 7위에 오른 데 이어 2008-2009시즌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 그해 챔피언이 된 전주 KCC 이지스(현 부산 KCC 이지스)를 5차전까지 몰아붙인 강팀으로 거듭나죠. 그러나 끝내 재계약이 불발되며 2009년을 끝으로 최희암님은 지휘봉을 내려놓습니다.]

호성적에도 재계약이 불발됐습니다.

부임 전 고작 8승밖에 못했던 팀이 부임 첫해 23승, 다음해 29승, 그 이듬해 29승을 했어요. 나름 뚜렷한 성과를 냈다고 자부합니다. 물론 부족함은 있었겠죠. 하지만 연세대 때도 우승엔 3년이 넘게 걸렸어요. 우승이 하늘에서 곧바로 뚝 떨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이제 좀 뭔가 만들어 보려 하는데 나가게 돼 아쉬웠습니다. 좀더 있었으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아무도 몰라요. (웃음)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니 어쩌겠습니까? 제 뜻대로만 안 되는 건 기본이고 모든 걸 이해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그래서 사람은 세월을 잘 만나야 하나 봅니다. 프로 감독과 저는 그때 연이 아니었던 거예요. 시절인연이란 게 그런 것을요.

최희암-고려용접봉-연세대
서울 중구 퇴계로 고려용접봉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희암님/리멤버

Chapter 6.
코트 떠난 농구 감독, 기업 경영에 도전하다?!

$[2009년 코트를 떠난 최희암님은 농구인으로선 매우 이례적 도전에 나섭니다. 바로 ‘코끼리표’로 유명한 국내 굴지의 용접 재료 전문 제조사 고려용접봉에 합류, 중국 다롄 지사 경영을 맡게 된 겁니다.]

전혀 뜻밖의 도전이었습니다.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전자랜드 구단주 친형이 바로 고려용접봉 회장님이셨어요. 덕분에 전자랜드 감독 시절 셋이서 저녁 식사를 몇 차례 같이한 적이 있죠. 그때마다 전 식사를 마치고 곧장 숙소로 갔습니다.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 숙소에서 그냥 살았거든요. 나중에 듣기론 제 태도가 열정적이라며 높이 평가해 주셨다고 해요. ‘농구 감독을 저 노력으로 하면 우리 공장도 맡겨 볼 수 있겠다’ 판단하시고선 제게 덜컥 제안을 주신 거예요.

운동과 경영, 언뜻 서로 너무 이질적인 분야들 같습니다.

얼마든 배우면 되죠. 첫 직장 때랑 마찬가지로 하다 보면 수월해질 거라 봤습니다. 더구나 농구와 제조업은 서로 통하는 게 많아요. 제조업은 반복이잖아요. 매일 하는 일이 똑같고 똑같아야만 합니다. 그래야 오류 없이 안정적으로 갈 수 있죠. 농구도 마찬가집니다. 자유투 잘 던지는 뾰족한 수가 있을까요? 아니죠, 매일 똑같이 골백번씩 연습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보면 결국 전체를 아우르는 메커니즘을 익히게 되고 앞으로 무엇을 고민하고 개선할지도 보이게 됩니다. 둘이 다를 게 없어요.

고려용접봉
고려용접봉의 영문 명칭 ‘KISWEL’이 새겨진 최희암님의 회사 점퍼/리멤버

$[고려용접봉은 1973년 설립된 범고려제강계 중견 제조 기업으로, 건설·조선·자동차 등 국내외 다양한 산업에 용접재를 납품하고 있습니다. 유독 수입 의존도가 높은 용접재를 무려 2000종 이상 자체 생산하는 국내 1위 수출사로 ‘용접재 국산화에 가장 앞장선 기업’으로 평가됩니다.]

용접재 사업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먼저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요?

용접은 철과 철 혹은 철과 비철을 붙이는 겁니다. 접합엔 크게 2가지가 필요해요. 접합용 금속인 용접재와 그걸 녹이는 가열 도구 용접기. 이중 저흰 용접재를 만듭니다. 형태는 봉, 와이어 등 여럿으로요. 

아쉽게도 국내 1위는 아니고 2위쯤은 되는 기업입니다. 아무래도 대기업 모회사를 납품처로 둔 경쟁사를 따라잡긴 힘들더라고요. 하지만 수출 규모에선 저희가 1등입니다. 물량 절반 이상이 해외로 팔리죠. 수출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만 50년이 다 돼 갑니다. 그만큼 짱짱한 거예요.

$[지사장 부임 3년 만인 2012년 최희암님과 다롄 지사엔 최악의 위기가 닥칩니다. 연간 생산 물량의 35% 이상을 납품하던 주거래처 STX다롄 조선소가 조선업 불황에 급격히 흔들리며 파산 위기에 직면한 겁니다. 막대한 규모의 대금 회수가 어려워지면서 급기야 최희암님은 사의를 표명합니다.]

매출 3분의 1 이상이 날아간 위기였습니다.

저희 지사가 독점 공급하다시피 한 핵심 거래처가 파산한 거죠. 아찔했습니다. 회수가 어려운 자금이 3800만위안(80억원)쯤 됐어요. 중국 정부에서 세금을 일부 면제해 준 덕에 손해를 30%쯤 보전했지만 역부족이었죠. 이 조선소를 살리고자 청와대 앞에서 시위도 하면서 저도 백방으로 뛰었는데, 결국 파산해 중국 헝리 그룹에 넘어갔습니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이 좀만 나서면 살릴 수 있었는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지금은 다시 배를 잘 만들고 있으니까요.

결국 스스로 관두겠다 하셨다고요.

직원이 112명에서 74명으로 줄었어요. 결국 구조 조정을 했거든요. 직원들 얼굴 보기가 미안해 매일 아침 체조도 중단했습니다. 모든 게 제 탓인 것 같아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려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회장님 한마디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하더라고요. “시즌 도중에 감독 바꿔 성적 나는 팀 봤어요?” 따지고 보면 그만두는 게 곧 책임을 지는 건 아니잖아요. 어려움을 무릅쓰고 뭐라도 해내야 그게 책임이죠. 다시 마음을 다잡고 대오 각성했습니다.

$[최희암님의 경영 아래 다롄 지사는 반전을 만들어 냅니다. 규모 축소와 더불어 거래처를 폭넓게 다변화하며 수익 구조를 안정적으로 개선, 코로나 사태에도 최근 2~3년간 흑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부도 위기였던 회사가 흑자 경영을 일궈 냈습니다.

당시 회장님이 주신 또 다른 말씀이 “잃어버린 35%를 만회하려 무리 마라. 그러다 탈 난다. 대신 살림살이를 그만큼 줄여라”였어요. 그 35%를 얼른 되찾으라던 다른 경영진과 달랐죠. 덕분에, 구조 조정은 뼈아팠지만 무리하게 판 벌리며 요행수를 바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가령, 거래처를 확장하면서도 국영 조선소 등 대금 지급이 아주 원활한 곳들을 잘 선별해 내실을 다진 거죠. 경기도 안 좋은데 무리했다면 훨씬 더 위험해졌을지 몰라요. ‘위기일수록 기본에 충실하자’가 고려용접봉 철학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정도만 걸은 게 고비를 넘긴 묘수가 아니었나 합니다.

최희암님과 고려용접봉 민원식 사장. 이 사진을 촬영한 이가 고려용접봉 홍민철 회장/리멤버

Chapter 7.
CEO가 된 레전드 체육인, 영업과 R&D로 기초 체력을 키우다

$[2014년 봄 귀국한 최희암님은 부사장을 거쳐 같은 해 가을, 고려용접봉 대표 이사 자리에 오릅니다. 최희암표 경영의 첫 화두는 바로 영업 혁신이었습니다.]

경영 입문 5년 만에 CEO가 되셨습니다. 당시 소회를 여쭈어요.

전임자들께서 정년이 되셔서 제가 맡았던 것뿐이에요. 스스로도 정말 그렇게 생각했고요. 때문에 제가 대표가 됐다고 부러 판을 뒤엎거나 독단적으로 처리한 건 없었습니다. 다롄에 있을 때처럼 그저 정도대로, 잘하고 있는 건 더 잘하게, 못하고 있는 건 고치는 일들만 하려 했어요.

취임 일성으로 영업 체질 개선을 강조하셨습니다.

제조업의 뿌리가 생산이면 꽃은 영업이죠. 저흰 생산 쪽은 잘하고 있었지만 영업이 문제였습니다. 기존 영업 조직은 권역별로 나뉘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가 바뀔 때마다 대응이 빠삭히 안 되는 거예요. 나름 준전문가가 돼야만 대화가 되고 영업도 풀리는 건데 그게 구조상 어려웠던 거죠. 

어떻게 개선하셨나요?

산업별 담당을 두는 식으로 영업 조직을 개편했어요. 가령, 부산에 발전 설비 프로젝트가 생겼다? 그럼 담당자는 서울에 있다가도 부산에 가는 겁니다. 사실 동종 프로젝트마다 투입되는 숙련자들이 엇비슷하거든요. 인연을 잘 맺어 두면 영업도 일회용에 그치지 않는 거죠. 

그 반대도 마찬가집니다. 갓 대학을 졸업한 신참 기사는 용접을 더더욱 몰라요. 이때 현장 경험이 많은 저희 담당자가 쏠쏠히 코칭해 주는 거예요. 그럼 그 신참이 성장할수록 저희 영업 네트워크도 단단해지고 풍부해지는 윈윈이 됩니다. 이렇듯 여타 영업 관행을 개선해 놓으니 그 자체로 1년 만에 기본 매출선만 1% 이상 오르더군요.

$[최희암표 두 번째 경영 화두는 연구·개발(R&D)이었습니다. 그 상징격으로 2016년 고려용접봉은 ‘한국형 히든 챔피언’ 육성을 위한 R&D 국책 사업 ‘월드클래스 300’에 선정됩니다. ‘월드클래스 300’이란 정부로부터 세계 최고 전문 기업으로의 성장 잠재력·혁신성을 인정받은 중견·중소기업으로, 2년마다 자격 유지를 결정하는데 고려용접봉은 10년째 타이틀을 지키고 있습니다.]

벌써 10년째 ‘월드클래스 300’ 자격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 도전하지 않아도 당장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어요. 처음엔 뭐하러 나서냐고 내부 반대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걸 하면 나라에서 연구 실적이나 그에 따른 매출, R&D 인력 등을 평가받아요. 그만큼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봐 주는 눈이 많아지는 거죠. 발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는 거예요. 실제로 이후부터 우리 제품 구성이나 품질이 향상됐단 평가가 많아요. 잘한다고 멈춰 있으면 안 되죠. 한번 챔피언 됐다고 영원히 챔피언 하는 거 아니거든요.

최희암-고려용접봉-연세대
서울 중구 퇴계로 고려용접봉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희암님/리멤버

Chapter 8.
40년 名將 “농구든 인생이든 슛보단 리바운드”

$[‘소비재보다 국가 발전에 필요한 기간산업을 키우자.’ 고려용접봉의 창업 정신입니다. 최희암님의 경영 아래 고려용접봉은 아직 국산화가 더딘 각종 고부가가치 용접재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 결과 40년 가까이 수입에만 의존해 온 K2 전차 용접재를 2020년 현대로템과 공동 연구 끝에 완전 국산화한 데 이어, 이듬해 육상 LNG 저장 탱크에 활용할 니켈강계 용접재 역시 포스코와 공동 개발하는 등 차세대 산업 소재 국산화에 혁혁한 성과를 올립니다.]

<"프로란 슛에 실패해도 인내하며 리바운드를 노릴 줄 아는 사람">

방산·에너지 등 차세대 산업 부문에서의 국산화 성과가 눈에 띕니다.

남의 나라 좋은 일만 시킬 수 없잖아요. 일례로 육상 LNG 저장 탱크의 핵심 소재인 극저온용 9% 니켈강은 포스코가 이미 90년대 초에 개발해 놨어요. 진작부터 국내외 LNG 프로젝트에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니켈강을 용접할 재료는 국산화가 안 돼 있던 겁니다. 용접재가 어디 한두 군데 쓰입니까?

메인은 우리가 개발해 놓고도 자잘자잘한 데선 남 좋은 일을 해 주고 있는 것들이 정말 많습니다. 국익을 위해 소재 국산화에 힘써야 하는 이유죠. 물론 저희 혼자선 쉽지 않아서 포스코·현대로템 같은 덩치 큰 기업들과도 열심히 협업을 추진한 겁니다. 그럼에도 국산화라는 게 여러모로 참 여의치 않습디다.

어떤 어려움이 있나요?

특히 방산 분야가 그래요. 무기 수출을 하려면 국내뿐 아니라 미국·독일 등 해외 공인도 받아야 하는데 비용 감당이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나라가 잠수함을 1년에 몇 척이나 만드는 줄 아십니까? 1척도 채 안 나와요. 그 1척에 용접재가 겨우 2억원어치 들어가고요. 그런데 수중 폭파 시험 한 번에만 무려 10억원이 듭니다. 어림잡아 10년쯤은 지나야 매출 10억원이 나와요. 어느 기업이 할까요?

뿐만 아닙니다. 혁신할수록 오히려 손해를 봐요. 가령 가격이 100원이고 마진율이 7%인 제품이 있다고 해 봐요. 원래대로 만들면 100원을 받겠죠. 헌데 R&D에 성공해 그걸 70원에 만들면 얼마를 받는 줄 아세요? 70원만 받습니다. 마진이 7원에서 4.9원으로 오히려 주는 거예요. 기껏 R&D해 봤자 보람이 없는 거죠. 이익을 더 적게 보고 파는 기업이 어디 있어요? 정부가 이 구조를 해결해 주면 좋겠습니다. 혁신했을 때 기업도 그만큼 이윤이 나야 죽기 살기로 덤벼들 거 아닙니까?

개선이 안 되는 원인은 무어라 생각하세요?

애초에 이쪽에 관심도 적은 데다 우리 산업 내부 관성도 문제죠. 작업장에선 계속 쓰던 걸 쓰려 해요. 가성비 좋다고 새로 나온 국산품을 써 봤자 적응 전까진 작업량도 줄고 에러 나면 책임까지 져야 하니까요. 물론 저희도 작업성을 더 높이려 끝없이 노력해야겠지만, 지원이나 규제 측면에서 정부도 힘을 보태 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간의 성과에 힘입어 최희암님은 2017년 고려용접봉 부회장으로 영전, 2019년 9월부터 대외 세일즈와 신사업 개발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농구와 기업, 두 분야에서 리더로 살아온 지 자그마치 40년입니다.

둘다 추구하는 목적은 엇비슷해요. 농구는 승률, 기업은 이윤. 그러나 구성원이 확 다르죠. 일단 농구팀은 마인드가 서로 일치합니다. 그저 승리만 생각해요. 똘똘 뭉칩니다. 분란도 거의 없어요. 하지만 기업은 구성원마다 추구하는 이윤이 달라요. 누군가는 승진이나 돈을 우선할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가정이나 사회적 책임 같은 게 먼저죠. 때문에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하는 게 기업이 좀더 어렵습니다. 각고의 설득과 노력이 필요해요.

나름의 비결이 있으시다면요?

감독 때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저는 늘 감독이랑 코치의 시선이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에요. 제가 위를 보면, 코치는 밑을 봐 줘야 합니다. 그럼 나오는 말들이 달라지고 그게 팀에 큰 보탬이 됩니다. 내가 A를 얘기한다고 모두가 A를 얘기하면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외려 팀이 망가져요. 

기업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마다 시선이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럼 억지로 똑같은 말을 하게 하지 말고 경청해야 합니다. 그게 역설적으로 구성원들을 단결시키고 묘하게도 한 곳을 바라보게 합디다.

본인처럼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분들께 조언을 해 주신다면요?

호기심이 식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사실 뭐 하나라도 잘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무수한 배움이 필요한데 그때마다 호기심이 안 들면 어떻게 그 일을 잘할 수 있을까요. 못하는 사람이 배움도 게을리 한다? 그건 안 되는 얘기잖아요. 새로운 도전을 하려거든 절대 그 호기심을 꺼뜨리지 마세요.

최희암
집무실에 비치된 최희암님이 출연한 신문 기사/리멤버

최희암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요즘은 한 우물만 파는 놈이 제일 미련하다고들 합디다. 헌데, 되든 안 되든 그 우물을 끝까지 파낼 줄 아는 사람만 프로 자격이 생기는 것 아니겠어요? 금방 포기하기보단 왜 안 되는지 끊임없이 분석하고 발견해 내야 진짜 프로죠. 물론 그 과정이 어디 쉽겠습니까. 그러니 미련하단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면서 끝까지 끌고 가는 것 자체가 미련해야만 가능한 거니까요. 

돌이켜 보면 저도 참 미련했습니다. 농구도 경영도 처음부터 잘할 순 없는 일들이었잖아요. 농구는 신체적으로 불리했고 경영은 문외한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일찍이 선수를 관뒀다면, 중국에서 도중에 사표를 냈다면, 훗날 지도자로서의 영광도 경영자로서의 보람도 맛보지 못했겠죠. 전부 미련한 탓, 그렇기에 인내한 덕일 겁니다.

농구에서 적중률 100%짜리 슛은 없습니다. 슛에 실패했다고 대번에 포기하는 선수도 없고요. 왜냐? 리바운드가 있으니까요. 결국 ==프로란 슛에 실패해도 인내하며 리바운드를 노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첫 슛에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농구든 인생이든 결국 리바운드를 더 잘 따내는 사람이 승리하는 법이니까요.

최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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