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
現 KG모빌리티 디자인 센터장, 前 기아자동차 내장 디자인 실장, 前 현대자동차 외장 디자인 팀장
KG모빌리티(전 쌍용자동차) 전무급 디자인 센터장입니다. 1991년 현대자동차 외장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 외장 디자인 팀장까지 지낸 뒤 2004년 기아자동차로 적을 옮겨 내장 디자인 팀·실장 등을 역임합니다. 2020년 쌍용차에 합류, 토레스(2022)·액티언(2024) 등 인기 SUV 디자인 기획을 총괄했습니다.
2020년은 국내 굴지의 자동차 회사 KG모빌리티(당시 쌍용자동차)엔 아주 혹독한 시련의 해로 기억됩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도계 모기업이 신규 투자를 중단하고 경영권까지 포기하는 최악의 경영난에 시달린 데다, 무려 연간 4235억원의 적자를 내 이듬해 봄 법정 관리마저 들어갔기 때문이죠.
그야말로 벼랑 끝 위기였던 이 자동차 기업에 부활의 신호탄을 쏜 신차가 있었으니, 그게 2022년 출시된 SUV 토레스입니다. ‘코란도·무쏘 등 역대 쌍용차 명차 계보를 잇는다’는 찬사를 받으며 주문 대기만 6만대에 육박, SUV의 새 흥행 신화를 써낸 모델이죠. 바로 이 토레스의 성공에 힘입어 KGM은 1년 6개월 만에 법정 관리를 조기 졸업하고, 지난해 연간 흑자 전환에도 성공하는 대반전을 이뤄냅니다.
오늘 프롤로그는 2020년 KGM에 합류, 옛 쌍용차 시절부터의 고유 헤리티지를 되살려 토레스 탄생과 그 흥행을 진두지휘한 33년 베테랑 자동차 디자이너의 이야기입니다. KGM의 모든 차량 디자인을 총괄하는 디자인 센터장 이강님이 그 주인공입니다.
<“흔히들 디자이너가 겉멋 든 직업이라 생각하죠? 천만에요. 오히려 아주 고통스럽고 우직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수십만의 생계가 달린 게 바로 저 종이 위 디자인이니까요.”>
아반떼·그랜저·모닝·스포티지·씨드·세라토·포르테·토레스·액티언… ‘국내 도로에 돌아다니는 차량 절반에 그의 손길이 닿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국내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통하는 그이지만, 그를 성공으로 이끈 8할은 “디자이너로서의 예술적 감각이 아닌 돌덩이 같은 책임감”이라 회고합니다.
수많은 히트 차량을 탄생시키고 위기의 자동차 브랜드를 디자인의 힘으로 되살린 이 베테랑 디자이너가 정의하는 ‘책임감’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리멤버가 직접 만나 그가 디자인한 명차들의 흥미로운 탄생 비화와 함께 자세히 담아봤습니다.
경기도 평택 KG모빌리티 디자인센터에서 인터뷰 중인 이강님/리멤버
Chapter 1.
기타리스트를 꿈꾸던 자동차 디자이너?!
$[1991년 이강님은 영남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 같은 해 현대자동차에 입사하며 자동차 디자이너로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팀장님의 한마디가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야, 너는 그리는 게 어째 매번 똑같냐? 발전이 하나도 없어.”">
어려서부터 디자이너를 꿈꾸신 건가요?
원래 꿈은 기타리스트였습니다. 전설적 밴드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가 제 어릴 적 우상이었죠. 집에 통기타는 물론 전자 기타에 심지어 앰프까지 두고 허구한 날 기타를 연습했죠. 아마 디자이너가 안 됐으면 여태껏 기타를 부여잡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안타깝게도 그만큼 재능이 따라와 주질 않았지만요.
미대 진학은 고등학생이 되고서야 결심했습니다. 1학년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그리는데 옆자리 친구가 “강아, 넌 미대에 꼭 가야겠다”며 극찬을 해 주더라고요. 그때부터 학원에 다니며 제대로 미술을 배웠습니다. 또래보다 늦었지만 나름 재능이 있었나 봐요. 고3 무렵엔 학원서 가장 실력자가 돼 있었고, 덕분에 무난히 미대에 입학했습니다.
순수 미술 대신 응용미술(산업디자인)을 전공하셨어요.
원래 회화과를 갈까 잠깐 고민도 했어요. 하지만 순수 미술로 돈 버는 건 너무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예술가보단 직업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산업디자인이란 게 결국 온갖 제품에 구현될 디자인을 연구하고 그리는 일이잖아요? 그러니 어떤 기업에서든 쓸모가 있어 밥벌이는 어렵지 않을 거라 봤습니다.
그중에서도 왜 자동차 디자인이었나요?
직감적으로 가장 끌렸어요. 건축 도면을 그리듯 펜을 들고 제도하는 모습이 굉장히 멋져 보였죠. 현실적으로 제일 유리한 선택이라고도 봤고요. 자동차 제조사는 대부분 대기업이잖아요. 입사만 하면 탄탄대로라 생각했습니다. 다만 워낙 레드오션이라는 게 문제였죠. 예나 지금이나 국내 자동차 회사는 손에 꼽을 만큼 적잖아요. 때문에 어떻게 그 바늘구멍을 뚫어야 할지 연구를 참 많이 했습니다. 걱정도 많았고요.
우려와 달리 현대차에 입사하셨어요. 당시에도 가장 잘나가는 자동차 회사였죠.
실은 기아(당시 기아자동차)에 입사하고 싶었어요. 당시 자동차 회사는 죄다 지방에 있었는데, 기아만큼은 서울 근무가 가능했거든요. 20년 넘게 지방에서만 산 촌놈 입장에선 서울살이가 무척 끌렸죠. 헌데, 4학년 여름방학 때 현대차에서 인턴을 하다 덜컥 채용이 된 거예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니,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입사했습니다.
$[자동차 디자인은 크게 차량 외관을 담당하는 외장 디자인, 내부 인테리어를 맡는 내장 디자인, 색상(Color)·소재(Material)·마감(Finishing)을 전담하는 CMF 디자인으로 구분됩니다. 이중 이강님은 외장 디자이너로 발탁, 현대차의 명차로 꼽히는 아반떼RD·그랜저XG 등의 디자인 작업에 참여합니다.]
외장 디자이너로 첫 커리어를 시작하셨습니다.
인턴 때 줄창 하던 게 자동차 그리기였어요.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온종일 자동차만 보고 그렸죠. 이골이 날 만큼 힘들었지만, 덕분에 인이 박일 정도로 온갖 부품과 그 생김새에 빠삭해졌습니다. 나중에 인턴 평가를 바탕으로 부서가 배치됐는데, 솜씨가 제일 두드러진 신입들이 외장 디자인 팀으로 발령이 났어요. 아무래도 자동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차체 외관이잖아요? 굉장히 우쭐해지더라고요.
아반떼RD, 그랜저XG 등 90년대 대표 현대차 명차 디자인에 참여하셨어요. 특히 ‘구아방’ 아반떼RD는 출시 이듬해에만 무려 19만대나 팔린 ‘레전드’ 인기 차종이죠.
솔직히 제가 들을 칭찬이 없어요. 민망하게도 구아방 외관 중 제 디자인은 딱 하나, 휠에만 들어갔거든요. 보통 주니어는 부품 디자인을 맡고, 메인인 차체 디자인은 경험 많은 선배들이 그려요. 하지만 그건 계급이 아닌 실력의 결과입니다. 디자인은 위아래가 없어요. 까마득한 막내 그림도 얼마든 뽑힐 수 있죠.
때문에 매번 최선을 다했지만 번번이 메인에선 탈락이었습니다. 1년, 2년… 해가 갈수록 조바심이 커졌죠. 어느 날은 끝내주게 만족스러운 그림이 나왔는데 그마저도 탈락이었어요. 좌절하던 와중에 팀장님의 한마디가 마음에 비수처럼 꽂혔습니다. “야, 너는 그리는 게 어째 매번 똑같냐? 발전이 하나도 없어.”
경기도 평택 KG모빌리티 디자인센터에서 인터뷰 중인 이강님/리멤버
Chapter 2.
세계 최고 아트 스쿨에서 디자인 시야를 넓히다
$[입사 5년차가 되던 1995년 이강님은 영국 런던 왕립예술대학(RCA)으로 1년여의 유학을 떠납니다. 1837년에 설립된 RCA는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피터 슈라이어·크리스 뱅글·이안 칼럼)를 배출한 세계 최고의 디자인 스쿨로 꼽히는 예술 대학원입니다.]
유학은 어떤 계기였나요?
사내 해외 연수자에 발탁됐어요. 기본적으로 무척 성실한 편이고 일단 맡긴 일만큼은 곧잘 해내 평판이 좋았습니다. 무엇보다 상대적으로 영어를 잘했어요. 제대하고 영어에 꽂혀 6개월간 죽어라 영어 공부만 했거든요. 그게 빛을 발했습니다.
RCA에선 어떤 교육을 받으셨나요?
첫 수업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교수님이 학교 마당에 대뜸 차를 한 대 내놓더니 저희한테 “알아서들 보이는 대로 한번 그려 보시오”라는 거예요. 수채화든 유화든 파스텔화든 데셍이든 재료나 방식도 아무렇게나요. 처음엔 이걸 왜 시키나 싶었어요. 모두가 비슷한 방식으로만 그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전혀 아니더군요. 수업엔 저처럼 자동차 기업에서 연수 온 친구들이 많았는데, 열이면 열 전부 표현이 다르더라고요. 폭스바겐·아우디·BMW 등 너 나 할 것 없이요. 참 충격이었습니다. 이전까진 그저 잘나가는 선배들 그림을 무작정 따라 그리며 디자인을 배웠거든요. 때문에 그게 그냥 제 화풍이 됐고 모두가 그렇게 그리는 게 맞는 줄 알았는데 한참 잘못된 생각이었던 거죠.
그때부터 확 시야가 트였습니다. 미처 보이지 않던 요소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어요. 이를테면 태양의 밝기나 위치, 비치는 주변 사물에 따라서도 느낌이 천차만별이더라고요. 사실 소비자가 차를 보고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잖아요? 도면 위에서처럼 언제나 정형화된 게 아니에요. 차를 음미하는 정말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고, 디자이너로서 그 각양각색의 표현을 정교히 구사할 수 있어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확실히 교육의 효과가 있던가요?
경차 아토스, 준중형 아반떼 XD 5도어를 기억하시나요? 제가 두 모델의 메인 디자인을 그렸습니다. 확실히 유학의 효과가 있었죠. (웃음) 기존에 고집하던 방식을 벗어나 어떻게 하면 차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일지, 어떤 질감으로 표현해야 그 의도가 더 잘 전달될지에 초점을 맞춰 끊임없이 연구했어요. 그러다 보니 저 스스로도 디자인이 확연히 발전해 가는 걸 느꼈습니다.
경기도 평택 KG모빌리티 디자인센터에서 인터뷰 중인 이강님/리멤버
Chapter 3.
현대차 역대 최연소 팀장, '국민 경차'를 탄생시키다
$[2001년 이강님은 현대차 외장 디자인 팀장으로 승진합니다. 불과 서른다섯, 디자이너로선 물론 사내 전 직무를 통틀어도 당시로선 역대 최연소 팀장이었죠. 통상 20년차 이상 부장급이 맡던 직책을 고작 11년차 과장급이 맡게 된 파격 인사였습니다.]
<"디자인은 제게 늘 설레기만 한 작업이었는데, 이때부턴 더 무거운 책임도 느껴야 하는 일이 됐습니다.">
매우 이른 나이에 대기업 팀장이 되셨어요.
대단한 영광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들뜨진 않았어요. 오히려 걱정이 더 컸죠. 한참 선배인 팀원도 몇몇 계셨거든요. 모두가 기분 상하지 않으면서도 제 방향대로 잘 리드할 방법을 많이 고민한 시기였습니다. 덕분에 인생도 리더십도 그때 많이 배웠어요.
그리고 그때 인생 처음으로 ‘책임’이란 걸 피부에 와닿게 느꼈습니다. 일개 팀원일 땐 그저 제 디자인이 뽑히기만 하면 그만이잖아요. 자기 만족이 중요할 뿐이죠. 하지만 팀장이 그럴 순 없죠. 나만 잘될 게 아니라 우리 팀 디자인이 상부에 잘 인정받고, 나아가 그 디자인이 시장에서 사랑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자리니까요. 원래 디자인은 제게 늘 설레기만 한 작업이었는데, 이때부턴 더 무거운 책임도 느껴야 하는 일이 됐습니다.
$[1999년 현대차는 IMF 여파로 법정 관리에 놓인 기아차를 전격 인수합니다. 그리고, 위기의 기아차를 수렁에서 건진 효자 상품 중 하나가 2004년 출시된 경차 모닝이었습니다. 역대 기아 승용차 중 최다 판매 차종으로 지금까지 무려 120만대가 넘게 팔린 초인기 모델이죠. 이강님은 바로 이 모닝의 외장 디자인 작업을 주도하며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국민 경차’ 탄생에 기여합니다.]
모닝의 차체 디자인 작업을 이끄셨습니다.
절치부심의 각오로 임한 프로젝트였어요. 앞서 아토스로 경차를 한 번 해 봤잖아요? 고백건대 저한텐 성에 안 차는 모델이었어요. 국내 최초 ‘톨보이’ 콘셉으로 천장을 높여 키가 껑충하게 디자인한 나름 도전적 프로젝트였는데 남들은 몰라도 제 눈엔 썩 멋져 보이지 않더라고요. 때문에 이를 갈던 참에 맡게 된 프로젝트가 모닝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합병 초기라 기아가 여전히 힘든 상황이었거든요. 특히 인력난이 심각했고 그건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라 저희가 기아 프로젝트도 지원하게 된 겁니다. 저 개인은 물론 팀장으로서도 반드시 잘 해내야만 하는 프로젝트였어요.
2004년 출시된 모닝 1세대/기아 페이스북 캡처
당시 마티즈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죠. 디자인 측면의 극복 전략은 무엇이었나요?
경차는 디자이너로서 굉장히 까다로운 프로젝트예요. 일단 돈을 많이 못 들입니다. 가격 자체가 저렴해야 해 각종 부품 자재도 전부 싼값에 써야 하죠. 게다가 경쟁자가 부동의 최강자 마티즈였잖아요. 많이들 기억하시겠지만 독보적 시장 1위였고, 아토스가 쓴맛을 본 것도 다 마티즈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엔 기어코 마티즈를 잡아야 했어요. 그래서 가장 주안점을 둔 게 뚜렷한 차별화였습니다. 마티즈는 차가 작고 동글동글하니 귀엽죠. 헌데 경차 타는 사람이라고 전부 차가 작아 보이길 바랄까요?
저는 외려 그 반대일 수 있다고 봤어요. 같은 경차라도 이왕이면 더 크고 듬직해 보이는 디자인이 더욱 많은 소비자한테 먹힐 수 있지 않을까 판단한 거죠.
전략이 통한 듯합니다. 모닝은 ‘선배 국민 경차’ 티코, 마티즈를 뛰어넘는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네, 결국 모닝이 마티즈를 이겼죠. 자동차 디자인을 하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성취감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생 프로젝트를 뽑으라면 모닝을 꼽아요. 물론 대우자동차(마티즈 제조사)한텐 미안한 마음이 크지만요. (웃음) 여하간 디자인이 너무 일방에 치우치면 소비자층이 좁아집니다. 호불호 없이 많은 사람에게 통하는 디자인을 한 게 주효했다고 봅니다.
경기도 평택 KG모빌리티 디자인센터에서 인터뷰 중인 이강님/리멤버
Chapter 4.
기아차 합류, 외장→내장 디자이너로 변신
$[2004년 기아차는 현대차에서 독립한 별도의 대규모 디자인 센터를 신설합니다. 이강님은 내장 디자인 팀장으로 이곳에 합류, 기아차 재건의 일익을 담당하게 됩니다.]
갑자기 기아차로 가게 되셨어요.
당시 직속상관이던 현대차 디자인 실장님이 새로 구축될 기아의 디자인 센터장으로 발탁되셨어요. 그때 저도 함께 가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주셨고, 고민 없이 바로 승낙했습니다. 새로운 실장님과 합을 잘 맞출 수 있을까 내심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절 믿고 데려가 주신다니 그저 감사했죠.
줄곧 외장 디자인만 하셨습니다. 내장 디자인 팀장 자리가 부담스럽지 않으셨나요?
모르고 합류한 겁니다. (웃음) 그 전까진 일절 얘기를 안 해 주시더라고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미 외장 디자인은 팀 세팅이 완비돼 있더라고요. 애초부터 내장 디자인을 맡길 생각으로 절 데려가셨던 거예요.
처음엔 당연히 부담이 컸습니다. 외장이 건축이면 내장은 말 그대로 인테리어예요. 차량 내부에서 운전자가 조작하는 공간 구석구석을 다 포괄하죠. 헌데 인테리어 구성품이 좀 많습니까? 대시보드·도어·콘솔·시트·오디오·스위치… 디자인할 게 수두룩해요. 그뿐인가요? 모든 디자인이 따로 놀지 않게끔 완벽한 조화도 이뤄 내야 합니다.
내장 디자인 자체가 어려워도 너무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새로운 일이란 게 언제까지나 괴롭기만 한 건 아니더군요. 나름의 묘미를 발견하면서 어느새 몰입하고 적응하게 됐습니다.
그 묘미가 무엇이었나요?
내장 디자인은 시각적 아우라뿐 아니라 공간의 소재, 기능을 움직이는 공학, 나아가 그 인테리어를 향유하는 인간의 성질까지 아주 섬세히 살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디자이너로서 새 지평을 넓혀 주고 또 다른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켰어요. 여담이지만, 요즘엔 인테리어를 하겠단 신입이 절반쯤은 됩니다. 시대가 흐를수록 내장 디자인의 가치가 점점 치솟고 있어요.
내장 디자인 팀장으로서 어떤 미션에 주력하셨어요?
당시 고객은 물론 내부 직원들마저 하나같이 제기하던 불만이 ‘우리 차는 어딘가 모르게 매번 낯설다’는 점이었어요. 같은 회사 차라면 어떤 모델을 타든 유니크한 통일감이 있어야 하는데, 저흰 각자 따로 노는 느낌을 줬던 거죠.
당장 떠오르는 건 익스테리어상의 해법입니다. BMW의 키드니 그릴, MINI의 둥그런 램프처럼 바깥 형상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전 인테리어 측면에서도 충분히 해법이 있을 거라 봤어요. 그게 바로 ‘조작계 통일화’였습니다. 당시 저희 모델들은 조작계가 제각각이었어요. 가령, 오디오 위치도 저마다 다르고 공조 버튼은 중구난방이었죠. 이걸 깨고 기아 인테리어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게 제 나름의 미션이었습니다.
덕분인지 그 무렵부터 ‘기아차 디자인의 아이덴티티가 뚜렷해졌다’는 평이 많습니다.
물론 저희만의 노력 때문이라곤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저희 기여가 컸다고는 당당히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때 기아 내부 디자인 경쟁이 대단했거든요. 본사는 물론 해외 지사들과도 정말 치열히 경합했죠. 그 숱한 경쟁을 물리치고 저희 팀 인테리어가 아주 많이 뽑혔습니다.
당시 저희 각오는 정말 비장했어요. ‘불법만 아니면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좋다. 우리 디자인이 반드시 채택돼야 한다.’ 디자인의 숙명이 그래요. 아무리 좋은 디자인도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디자인 하나에 담긴 팀원들의 몇 달치 피땀이 모두 허사가 되는 거예요. 다행히 그런 피눈물을 흘릴 일이 많지 않아 너무 다행이었습니다. 한 조직의 리더로서 그보다 자랑스럽고 뿌듯한 일은 없는 것 같아요.
경기도 평택 KG모빌리티 디자인센터에서 인터뷰 중인 이강님/리멤버
Chapter 5.
기아차 내장 디자인 실장 등극! '디자인 기아' 숨은 주역이 되다
$[2006년 기아차는 차세대 핵심 성장 전략으로 ‘디자인 경영’을 선포하고, 아우디·폭스바겐의 디자인 총괄 피터 슈라이어를 CDO(최고 디자인 책임자)로 영입합니다.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란 명성에 걸맞게 그는 쏘울·K5·스포티지R 등 국내외 메가 히트작을 연이어 탄생시키며 옛 기아차의 영광을 복원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이강님은 기아차 유럽 디자인 센터에서 6년여간 그를 보좌, ‘슈라이어의 디자인 철학을 실체화한 숨은 주역’으로 평가받습니다.]
<"고질적인 인테리어의 ‘칩 필링’, 이걸 꼭 해결하자는 게 스스로 잡은 미션이었습니다.">
2007년 슈라이어를 보좌할 유럽 현지 디자인 센터의 수석 코디네이터로 발탁되셨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이셨나요?
말 그대로 ‘코디네이팅’이었습니다. 슈라이어 사장님에서부터 현지 디자이너들, 국내 경영·개발진에 이르기까지 최적의 디자인이 도출되고 그게 제품에 잘 반영될 수 있도록, 모두를 매끄럽게 조율하고 전 과정을 콘트롤하는 역할이었죠.
말로 나열하니 쉬워 보이지만 사실 제게 이 6년 반은 굉장히 어렵고 벅찬 시기였습니다. 아무래도 줄곧 해 오던 디자인과는 결이 다른 역량과 덕목을 요구받았으니까요. 하지만 단순히 멋스럽고 잘 팔리는 디자인을 넘어 영혼을 울리는 디자인이란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과정을 생생히 목도할 수 있던 아주 소중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이 어떠했길래요?
슈라이어 사장님은 굉장히 욕심이 많은 분이셨어요. 기아를 일으켜야 한다는 책임감도 아주 크셨고요. 그 때문인지 엄청나게 완강하셨습니다. 사실 디자인을 원안대로 제품에 구현하기란 힘들거든요. 예산 부족을 이유로 경영 윗선에서 가로막히거나 엔지니어링적 뒷받침이 안 되는 경우도 잦죠.
그래서 웬만하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들을 하는데, 사장님은 결코 타협이란 게 없었어요. 아무리 이러쿵저러쿵 안되는 이유를 말씀드려도 매번 돌아오는 답은 “I don’t care”였죠. 본인이 알 바 아니니 저 보고 알아서 해결하란 거예요. 사람은 젠틀하고 정말 좋은 분인데 업에서만큼은 뜻을 절대 안 굽히시더라고요. 저는 양쪽에서 욕 먹고 미칠 노릇이었죠. (웃음)
헌데 신기하게도 뚝심을 갖고 밀어붙이니 그 안된다던 이유들이 차츰 풀리기도 하더라고요. 무작정 우겨서 됐단 게 아닙니다. 왜 이 디자인을 해야 하는지 저희 스스로 확고한 철학을 세워 설득하다 보면 상대도 거기 공명하는 거예요. 그럼 반대만 하던 때와 달리 훨씬 더 큰 노력을 들여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죠.
이처럼 각자의 치열한 고민을 결과에 녹여 낸 게 ‘디자인 기아’의 명성을 일군 저력입니다. 그 한복판에서 묵직한 중심을 잡아 준 게 슈라이어 사장님이셨고요. 그분을 통해 경험하고 배운 모든 게 큰 영감을 줬고 그걸 지금 써먹고 있습니다.
$[2014년 이강님은 한국으로 돌아와 기아차 인테리어를 총괄하는 내장 디자인 실장으로 영전합니다. 이듬해엔 상무로 승진하며 생애 첫 임원 자리에도 오릅니다.]
내장 디자인 실장으로서 구체적 미션은 무엇이었나요?
당시는 ‘디자인 기아’의 저력이 본궤도에 오른 시점이었어요. 판매량에서 현대차를 턱밑까지 추격할 정도였죠. 그러나 더 큰 도약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여전히 있었습니다. 그게 인테리어의 ‘칩 필링’(Cheap feeling)이었어요. 같은 소재를 써도 해외 유명 브랜드들은 고급져 보이는데, 우린 유독 값싸 보인다는 문제였죠. 비단 기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차 등 그룹 전체가 겪던 고민이었는데, 이걸 꼭 해결하자는 게 스스로 잡은 미션이었습니다.
그 원인을 어떻게 진단하셨나요?
디자인은 쉽게 답이 나오는 영역이 아니잖아요. 고민에만 족히 수년은 쓴 것 같습니다. 실무진과 함께 온갖 고급 브랜드 차량을 닥치는 대로 들여다 봤고, 저희 차들과 일일이 비교해 가며 분석 리포트도 많이 썼죠. 골몰에 골몰을 거듭하니 차츰 실마리가 보이더군요.
그런 말 있죠?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저희가 찾아낸 핵심 클루가 바로 완벽한 Fit&Finish였습니다. 디자인에선 곡률, 즉 휜 정도를 R(Radius·반지름)로 표현하는데 이 R값이 단 1mm만 변해도 대번에 딱딱해지거나 확 부드러워져요. 저희는 대시보드, 스위치 등 크고 작은 장치부터 각 부품 간 파팅 라인(경계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곡률을 최적화했습니다. 전 구간에서 1mm 단위로 미세하게 R을 조정해 가면서 최고의 고급스러움을 찾았죠.
그리고, 이 디테일한 작업들을 전부 표준화했습니다. 두꺼운 책 한 권이 나올 정도였죠. 기아에서 생산될 모든 차종에 공통 적용할 큰 체계를 만든 거예요. 하지만 실제 도입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요?
여지껏 주위에 자랑하고 다니는 게 바로 ‘커브드 디스플레이’ 도입이에요. 지금은 보편화하고 있지만 그땐 도입한 회사가 아무 데도 없었어요. 기아가 국내 최초였죠. 이걸 꼭 도입하고자 했는데 우여곡절이 정말 많았습니다. 개발부터가 보통 일이 아니었거든요. 비용이 엄청 들어가 그룹 연구소에서도 처음엔 개발을 꺼렸죠. 기껏 만들어 놨는데 겨우 한두 차종에만 쓰이고 실패하면 손해가 막심하니까요.
하지만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세련미의 정점을 찍는, 표준화의 마지막 단추란 확신이 있었거든요. 때문에 연구소의 높은 분을 찾아가 오히려 더 대범하게 질렀습니다. “족히 수십만대엔 표준화해 쓸 겁니다. 믿고 꼭 개발해 주세요.” 목숨을 건 거죠. 디자이너들이 정말 그래요. 매번 목숨을 겁니다. 덕분에 끝내 개발이 이뤄졌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어요. K8를 시작으로 스포티지 5세대, EV6까지 전부 반영됐고 급기야 현대차도 뒤따라왔죠.
이제 기아나 현대차 모두 칩 필링은 옛말이 됐습니다. 도리어 굉장히 세련되고 하이테크한 느낌이 강하죠. 그 전범을 세우는 데 일조해 대단히 영광이고 자랑스럽습니다. 저보다 나은 실력으로 더욱 멋지게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기아 후배들에겐 그저 고마울 따름이고요.
경기도 평택 KG모빌리티 디자인센터 차량 전시장에서의 이강님/리멤버
Chapter 6.
'토레스 흥행 신화'로 쌍용차 부활을 이끌다
$[2019년 이강님은 기아차를 퇴사하고, 이듬해 쌍용차(현 KGM)에 전격 합류합니다. 그 무렵 쌍용차는 심각한 경영난에 빠져 있었습니다. 2020년 인도계 모기업 ‘마힌드라 & 마힌드라’가 추가 투자를 포기하고 경영권을 내려놓은 데 이어 영업 손실 4235억원이란 10년 만 최악의 실적을 내죠. 이강님은 쌍용차의 모든 차량 디자인을 총괄하는 디자인 센터장으로 발탁, 쌍용차 부활을 이끌 구원 투수로 활약하게 됩니다.]
쌍용차 합류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인테리어만 15년을 한 거잖아요. 슈라이어 사장님이랑 일한 시기를 빼도 거의 10년이고요. 인테리어 측면에서 제가 기여할 건 다 했다고 봤어요. 자리를 계속 지키기보단 후배한테 물려주는 게 맞다 싶었죠. 실제로 지금 저보다 더 잘하고 있어요. (웃음)
커리어 차원의 판단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기아에선 더 성장하기 어렵겠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인테리어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더 큰 그림을 그려 보고 싶었어요. 시기도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때마침 쌍용차에서 디자인 전체를 총괄해 달라는 제안을 주셨거든요.
당시 쌍용차 경영 사정이 매우 어려웠죠. 합류 고민이 크셨을 듯합니다.
지인들의 의견도 정확히 반반 갈렸어요. 한쪽은 “뭐 하러 그런 험지를 가느냐”며 한사코 말리신 반면, 다른 한편에선 “살면서 그런 도전 한 번쯤 해 봐야 하지 않겠냐”며 합류를 지지해 주셨죠. 수없이 되짚어 봐도 저는 후자에 훨씬 끌렸습니다. 물론 회사 규모나 안정성만 따지면 비교 불가죠. 하지만 제가 잘해서 한 회사가 되살아날 수 있다면 그게 디자이너로서 최고의 보람 아닐까요? 때문에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도전해 보자고 마음을 먹은 거예요. 헌데, 입사하고 보니 회사가 정말 어렵긴 어렵더라고요. (웃음)
$[2015년 티볼리의 성공 이래 쌍용차는 ‘후속 모델들에서도 지나치게 티볼리 디자인을 답습한다’는 비판에 직면하며 별다른 반전 모멘텀을 찾지 못하고 있었죠. 그런데, 이 관성을 단박에 뒤집고 새로운 흥행 신화를 써낸 모델이 등장하니 그게 바로 2022년 출시된 중형 SUV 토레스입니다. 특유의 선 굵은 디자인으로 ‘쌍용차의 역대 명차 코란도·무쏘의 유산을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주문 대기만 무려 6만대에 이르는 ‘대박’을 치죠. 이강님은 쌍용차의 새 디자인 철학 ‘Powered by Toughness’를 제시해 토레스 탄생의 초석을 놓고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며 이 흥행 신화를 선두에서 이끕니다.]
토레스는 어떻게 탄생하게 된 건가요?
토레스는 초긴급 프로젝트였어요. 입사 전부터 “빨리 와서 신차를 만들라. 한시가 급하다”는 독촉이 심했죠. 신차를 만들 때 보통 디자인 최종 승인까지 족히 1년은 걸리는데 토레스는 5개월 만에 끝냈습니다. 그만큼 긴박하고 절박하게 만든 차였어요.
그러면서도 반드시 성공해야 했죠. 때문에 아예 근본에서부터 고민했습니다. ‘어느새 쌍용차는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다. 대체 왜?’ ‘더구나 상대는 현대차와 기아, 한국을 넘어 세계 최강급 브랜드들이다. 어떻게 맞서야 하나?’ 긴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똑같이 가면 백전백패다. 우린 비전부터 다르게 간다.’
그 비전을 반영한 디자인 철학이 ‘Powered by Toughness’였나요?
맞아요. 직역하자면 ‘강인함에 의해 추진되는 (디자인)’인데, 쉽게 말해 ‘강인해 보이는 디자인을 담겠다’는 의미예요. 그때만 해도 쌍용차와는 거리가 먼 얘기였습니다. 기존 성공을 답습하거나 트렌드 따라가기에만 급급했거든요. 예를 들어 몇년 전부터 시장에선 CUV가 강세예요. SUV에 세단이나 쿠페를 믹스한 차종인데 거칠고 투박한 SUV와 달리 날렵하고 세련됩니다. 현대 코나, 기아 스포티지, 토요타 라브4 등 너나 할 것 없이 CUV에 주력하고 있죠.
쌍용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실적은 좋지 않았죠. 오히려 쌍용차 고유 컬러만 퇴색해 버렸어요. 지금도 추억의 국민 명차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모델이 우리한테 2개나 있습니다. 그게 코란도와 무쏘예요. 전자는 강인한 지프차를 연상시킨 정통 SUV고, 후자 역시 아주 획기적인 고급 SUV였죠. 아주 강인하면서도 고급스러운 SUV가 바로 쌍용차의 차별적 헤리티지였던 거예요. 잃어버린 이 유산만 잘 되찾아 와도 우리한테 충분히 승산이 생길 거라 판단했습니다. 이 전략을 가장 먼저 담아낸 차가 토레스였고요.
차명의 기원인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에서의 토레스/KG모빌리티
구체적으로 토레스에 어떻게 적용됐나요?
‘Powered by Toughness’엔 4가지 핵심 요소가 있어요. 첫째가 ‘구조적 강인함’입니다. 토레스 전면부 외관은 난공불락의 성벽에서 모티브를 얻었어요. 그만큼 굉장히 견고한 디자인을 의도했죠. 둘째는 ‘예상 밖의 기쁨’입니다. 이를테면 토레스 운전석 도어 포켓엔 유리창을 깨는 망치가 들어 있어요. 물난리 같은 위기 때 너무나 요긴히 쓰일 아이템이죠. 아무리 작은 디테일이라도 예측 불허의 상황에서 마주하면 고객에겐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셋째는 ‘강렬한 대비’예요. 토레스는 외관의 각 면이 아주 큼지막하게 나눠져 있습니다. 대담한 대비감으로 고객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고 싶었어요. 마지막은 ‘자연과의 교감’입니다. SUV인 만큼 특히 아웃도어를 즐기는 고객들에게 잘 어필하고 싶었어요. 탑승만 하면 곧바로 오프로드를 달려 캠핑을 떠나고 싶게끔 쾌활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각별히 신경 썼습니다.
토레스 출시 첫해인 2022년 쌍용차는 기업 회생 절차를 종결했고, 작년엔 16년 만의 연간 흑자 전환에도 성공했습니다. 업계 안팎에선 ‘토레스가 위기의 쌍용차를 구했다’는 평이 나옵니다. 소회가 어떠신가요?
자동차 디자이너는 순수 미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팔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단지 시장만이 모든 걸 말해 줄 뿐이죠. 더구나 전 아주 큰 조직을 책임지는 디자이너이기도 하잖아요. 제 판단이 잘못됐을 때 저 혼자만 욕먹고 집에 가면 해결될 문제가 아닌 거예요. 회사에 몸담은 수천 명, 식솔까지 더하면 몇만 명, 협력사 직원들과 그 가족들, 나아가 주주들까지 생각하면 짊어져야 할 책임이 얼마나 큽니까.
뿐만 아니라 저희는 현대차나 기아처럼 아주 큰 회사도 아니에요. 때문에 매 프로젝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고 반드시 잘 해내야만 합니다. 이런 압박감 속에서 탄생한 게 바로 토레스였고, 보란 듯 멋지게 성공해 너무 뿌듯할 따름입니다. 제 인생을 통틀어도 가장 보람 있고 감격스러운 일이에요.
경기도 평택 KG모빌리티 디자인센터 차량 전시장에서 토레스를 바라보고 있는 이강님/리멤버
Chapter 7.
33년 자동차 디자인 베테랑, 그의 성공을 디자인한 힘은?
$[2023년 9월 이강님은 KGM의 전무로 승진합니다. 토레스 프로젝트 성공을 견인한 공로를 인정받은 특별 인사였습니다.]
<"프로란 겉멋 부리지 않고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사람">
특별 인사로 전무급 디자인 센터장이 되셨습니다.
말 그대로 감개무량입니다. 절 믿어 주고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는 회사에 그저 감사할 뿐이에요. 책임이 더 막중해졌지만 앞으로도 굴하지 않고 힘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할 생각입니다.
새로 품은 목표가 있으신가요?
KGM을 ‘국민 SUV 브랜드’로 만드는 게 남은 꿈이에요. 남녀노소 누구든 SUV를 사겠다고 마음먹으면 가장 먼저 저희를 떠올리게 만들고 싶어요. 물론 디자인의 힘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겠죠. 성능·가격 등 모든 요소가 잘 맞물려야 합니다. 아직 우리 힘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포기는 없을 겁니다.
어느덧 디자이너로 살아온 지 34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인생의 정점도 가까워 오는 순간이죠. 디자이너로서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그게 한 자동차 기업의 디자인을 총책임지는 사람으로서 응당 완수해야 할 책무이기도 하고요. 제가 디자이너로서 존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KGM이 멋진 SUV 브랜드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토레스 성공을 이을 KGM의 신차 전망도 대체로 밝은 편입니다. 올해 8월 출시된 쿠페형 SUV ‘액티언 S9’은 사전 예약 물량만 5만8000대를 기록, 창사 이래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고 향후 출시를 앞둔 전기 SUV F100, 준중형 SUV KR10 등도 콘셉 공개 후 매니아들의 높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후속 SUV들의 흥행 조짐이 나쁘지 않습니다.
신차가 나올 땐 초긴장 상태예요. 관련 기사들은 물론 유튜브 댓글 하나하나까지 다 챙겨 보죠. 혹여나 안 좋은 얘기라도 들린다 싶으면 가슴이 철렁합니다. 다행히 후속 차량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맘이 놓입니다.
올해 8월 출시된 액티언 S9/KG모빌리티
F100은 이르면 내후년 출시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신차 출시 속도가 굉장히 빠른 편이에요.
저희 회장님이 제게 가르쳐 준 교훈이 있어요. 물리학에서 F=ma잖아요. 즉, 힘은 질량과 속도에 비례합니다. 그럼 우리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질량? 아니죠. 초대형 제조사들과 규모로 맞설 수는 없습니다. 결국 속도예요. 남들보다 한발 앞서 신차를 내놓는 게 힘을 키울 해답입니다.
30년 넘게 자동차 디자인을 해 오셨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해 줄 말씀이 있다면요?
자신의 현재 위치에 굴하지 않고 잘들 해내시면 좋겠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자동차 디자이너 시장은 극히 레드오션이에요. 현대차에 입사하고픈 디자이너가 어디 한두 명이겠나요?
하지만 회사의 차이가 곧 디자이너로서 역량의 차이를 말해 주는 건 결코 아닙니다. 기껏해야 종이 한 장 차이일지 몰라요. 때문에 당장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멈추지 않고 하나둘 잘해 나가다 보면 그 한 장은 얼마든 뒤집을 수 있거든요.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다 통합니다. 한 곳에서 잘하는 디자이너는 나중에 어딜 가든 잘 해낼 겁니다.
경기도 평택 KG모빌리티 디자인센터에서 인터뷰 중인 이강님/리멤버
이강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디자이너를 굉장히 겉멋 든 직업이라 흔히들 생각하죠. 속으론 뜨끔한 디자이너들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한 산업에 복무하는 직업인으로서의 디자이너라면 절대 그래선 안 됩니다. 그럼 큰일나요. 일단 양산에 들어가 금형을 파기 시작하면 그땐 루비콘강을 건넌 겁니다. 판단 미스로 디자인을 고치고 금형을 새로 만들면 그 자체로 날아가는 돈이 수십억원이에요.
그뿐인가요. 디자인 하나 때문에 시장 반응이 안 좋고 매출이 떨어지면 그땐 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죠. 이러니 어떻게 겉멋이 들 수 있나요? 디자인은 매일 매순간 끊임없이 성찰하고 최고를 향해 조금이라도 나아가야 하는 아주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비단 디자이너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아닐 거예요. 결국 모든 직무에서 ==프로란 겉멋 부리지 않고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봐요. 대다수가 커리어를 시작할 땐 화려한 일면만 보기 마련이죠. 회사 타이틀, 사회적 명예, 높은 연봉 등을요. 하지만 일을 해 나가다 보면 알 거예요. 더 큰 성취 뒤엔 그보다 더욱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걸요.
겉멋에 취해 이 책임감을 진지하게 맞이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주저앉고 포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책임을 당당히 받아들고 맞선다면 어느새 더 성장하고 강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거예요. 그러니 용기를 내 각자의 과제에 담대하고 우직하게 맞서 봅시다. 우리 모두에겐 누구도 꺾지 못할 ‘강인함’이 디자인돼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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