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리
前 JTBC 교양팩추얼본부장, 前 중앙일보 논설위원
중앙일보·JTBC 출신 34년차 저널리스트입니다. 중앙일보에서 20년간 신문 기자로 일하며 논설위원까지 지냈고, JTBC에선 ‘밤샘토론’ ‘차이나는 클라스’ 등 간판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제작을 총괄했습니다. 올해 5월 JTBC 퇴사 후 현재 대학 교수, 작가로 활약 중입니다.
신문·방송을 넘나들며 30년 넘게 종횡무진한 팔색조 베테랑 저널리스트가 있습니다. 1990년 중앙일보 기자로 시작해 논설위원을 지낸 뒤 2011년 개국과 함께 JTBC에 합류, 간판 시사 프로그램 ‘JTBC 밤샘토론’ ‘차이나는 클라스’ 등의 진행·제작을 이끌었죠.
이후 탐사·교양 부문을 총괄하는 제작 본부장으로 발탁, JTBC 최초의 여성 임원 자리에 오릅니다. 바로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이자 34년차 언론인, 신예리님의 이야기입니다.
<“흔들림 없이 나다움을 지키면서도 ‘이게 최선일까?’ 매순간 되묻는 엄밀함을 고수하는 것, 바로 이 태도가 나만의 ‘차이나는 클라스’를 만듭니다.”>
만 스물한 살. 남들은 서너 해 넘게 도전해도 붙을까 말까 하던 당대 ‘언론 고시’에 그는 가장 어린 나이로 합격합니다. 서울대 출신 ‘범생이’에겐 학업도 취업도 그저 순탄한 꽃길이었던 거죠. 하지만 입사 후 마주한 현장은 딴판이었습니다. 숫기 없고 물정 모르던 ‘애송이’에겐 일상이 꾸지람이었고,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스타일도 아니라 “너 같은 애가 무슨 기자를 하냐”는 고참들의 거친 쓴소리까지 숱하게 들어야 했죠.
‘학교 공부 대신 세상 공부나 더 할걸’하는 후회를 천 번도 넘게 했다는 그이지만, 34년차 저널리스트로서 남들과는 다른 ‘차이’를 만들어 낸 건 “매사에 최선을 쫓는 엄밀함”과 “흔들림 없이 지켜 낸 원래의 나다움”이라 회고합니다.
과연 숨가쁜 저널리즘의 현장에서 30년 넘게 자신만의 독보적 콘텐츠를 피워 낸 신예리님의 ‘차이나는 클라스’는 어떻게 빚어진 걸까요? 리멤버가 직접 만나 다채로운 커리어 여정과 함께 자세히 담아 봤습니다.
서울 동작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신예리님/리멤버
Chapter 1.
“제 이름은 미스 신이 아니라 신예리입니다” 당돌한 범생이의 좌충우돌 신문사 적응기!
$[1990년 신예리님은 서울대 영문과 4학년 재학 중 중앙일보에 입사, 33년 저널리스트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만 스물한살의 최연소 입사자이자 당시 중앙일보의 유일한 여성 신입 기자였습니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범생이셨다고요.
공부를 잘한 건 맞지만 절대 천재형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본투비’ 파워 J(계획형)거든요. 시험 한두 달 전부터 완벽히 계획을 짜 놓고 빈틈없이 공부하는 스타일이었어요. 친구들이 제게 계획표를 짜달라고 조를 정도였죠. 물론 그대로 실천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더라고요. 계획은 세우기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단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웃음)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 잘 듣는 범생이는 절대 아니었어요. 호기심도 많고 하고픈 건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제법 고집 강한 아이였죠. 노래랑 춤을 워낙 좋아해 체육 대회 땐 늘 응원단장을 자처했고, 고등학교 땐 음악 방송을 진행해 보고 싶어 잠깐이지만 방송반에도 들어갔죠. 부모님, 선생님 모두 못마땅히 여기셨지만 마이 웨이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영문과 진학도 순전한 제 뜻이었어요. 학교에선 법대 아니면 절대 원서 안 써준다고 그랬는데 전 싫다고 막 따졌죠. “제 인생 불행해지면 책임지실 거냐”고 대들면서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들었습니다.
굉장히 어린 나이에 기자가 되셨습니다. ‘고시’라 불릴 만큼 언론사 입사 경쟁이 무척 치열한데도요.
원래 글쓰기를 좋아하고 곧잘 했어요. 중고교 땐 매년 교지에 글을 기고하고 문학반 활동을 했죠. 백일장 나가면 늘상 상도 탔고요. 더구나 영어까지 좋아했으니 영문학자를 꿈꾸며 영문과에 진학했는데, 입학하자마자 학자의 꿈은 접었습니다. 가만히 엉덩이 붙이고 공부하는 건 제 길이 아닐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여전히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으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기자를 지망한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언론 고시’를 붙어야만 기자가 될 수 있잖아요. 준비 기간은 짧았지만 운 좋게 중앙일보는 필기 시험을 한 번에 붙었어요. 면접만 남긴 상황이었는데 마저 운이 잘 따라줬습니다. 짧은 한 줄의 글로 큰 반향을 일으킨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카피라이터가 돼 봐도 재밌겠단 생각으로 제일기획도 지원했었는데, 거기 면접을 중앙일보보다 하루 먼저 보게 된 거예요. 상당한 압박 면접이라 2시간이나 온갖 질문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첫사랑 얘기도 구구절절 털어놓고 심지어 노래까지 불렀죠. 덕분에 중앙일보 면접은 상대적으로 수월하더라고요.
$[비교적 순탄했던 학창 시절이나 입사 과정과 달리, 신참 기자로서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신예리님 스스로는 “‘학교 공부 덜 하는 대신, 세상 공부 좀더 할걸’하는 후회를 천 번도 더 했다”고 회고할 정도였죠.]
신입 시절이 무척 힘드셨나 봅니다.
기자는 글쓰기 이전에 일단 취재를 잘해야 하잖아요. 헌데 세상 공부가 하나도 안 돼 있으니 도통 쉽지가 않더라고요. 게다가 고집도 강해서 저 스스로 아니다 싶으면 선배들 말도 잘 안 들었어요. 수습기자는 사건사고 담당이니 매일 아침저녁으로 경찰서를 돌아요. 노련한 경찰들을 구슬려 어떻게든 정보를 얻어내야 하니, 경찰들과 기 싸움에서 밀리지 말란 취지로 선배들은 “경찰서 문을 뻥뻥 차고 들어가”라고 조언했어요. 그 정도 깡은 있어야 야무지게 취재할 수 있단 뜻이었죠. 언론사는 위계질서가 엄한 편이니 대부분의 동기가 따랐겠지만, 전 공손히 문을 여닫고 다녔습니다. 지금껏 제가 살아온 스타일이 그랬으니까요. 절 잃어 가면서까지 기자가 되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예나 지금이나 언론사 군기는 무척 센 걸로 압니다.
그럼요. 초반엔 선배들한테 일 못한다고 야단도 많이 맞고, 버릇없는 애라고 오해도 엄청 받았죠. 심지어 전 부장한테도 당돌하게 굴었거든요. 신입 때 각 부서를 돌며 적응 교육을 받는데, 한 부장이 절 ‘미스 신’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겁도 없이 “제 이름은 미스 신이 아니라 신예리입니다. 앞으로는 절 ‘신예리씨’라고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해 버렸죠.
하지만 애초에 전 저보다 나이가 많거나 윗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눈 내리깔고 ‘옴매 기죽어’하는 스타일로 크질 않았어요. 어려서부터 제게 어른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대화하면 너무 재밌는 말동무였거든요. 아버지가 ‘딸 바보’이신지라 집에서 동료들과 술자리를 여실 땐 꼭 옆에 절 앉혀 주셔서 어린애가 이것저것 질문하며 어른들 대화에 곧잘 끼곤 했죠. 그렇게 자라서인지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저는 누구한테나 할말은 했고, 묻고 답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이런 제 자신을 바꾸고 싶지 않았어요. ‘분위기에 휩쓸려 내 스타일을 잃지 말자. 그럼에도 좋은 기자가 될 수 있단 걸 보여 주자’고 다짐하며 버텼습니다.
$[1991년 5월 10일, 이날 신예리님의 인생 첫 기명 기사가 나가게 됩니다. ‘시위 현장의 토론’이란 제목의 기사로 당시 중앙일보 12쪽 사회면 좌측 귀퉁이에 실린 기사였죠. 이 작은 기사 한 편이 좌충우돌 신입 기자의 전환점이 됩니다.]
첫 기명 기사, 어떤 내용이었나요?
1991년 명지대 학생 강경대군이 시위 도중 전경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해요. 이후 전국적으로 항의 시위가 확산했는데, 정부는 ‘일부 운동권 학생과 과격 단체가 벌이는 데모’라고 폄하했죠. 그런데, 제가 직접 취재한 현장은 그게 아니었어요. 종로 단성사 앞 사거리를 지나는데 학생·상인·주부·회사원 등 평범한 이들 수백 명이 나와 있었고, 굉장히 평화로운 시국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죠. 그 광경에 벅차 올라 회사로 복귀해 홀린 듯 기사를 써 부장 책상에 올려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기사가 덜컥 신문에 실리게 됐어요. 별 기대가 없던 터라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은 대부분의 기사에 기자 이름이 실리지만 그땐 해설성 기사에만 이름이 들어간 터라, 그게 인생 첫 기명 기사가 됐습니다.
이 기사 덕분에 “기자로서 새 챕터가 열리게 됐다”고 회고하세요.
기사가 나간 그날, 한 선배한테 전화가 왔어요. 일면식도 없던 한참 위 선배였는데 대뜸 “신예리, 너 되게 잘했어”라고 칭찬해 주시는 거예요. 이유를 여쭈니까 “평범한 시민도 시위에 참여 중이란 걸 알려 준 뉴스는 오늘 지면을 통틀어 네 기사가 유일해. 남들이 모르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 주는 거, 그게 기자가 할일이야”라고 하셨죠.
그땐 제 기사의 의미를 저도 잘 몰랐거든요. 오롯이 선배 덕에 이 기사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됐고, 나아가 제가 기자로서 무슨 일을 했는지도 제대로 깨닫게 된 거죠. 덕분에 기자로서 제 자존감도 올라갔고 그게 수습 기간을 포기 않고 마칠 수 있던 원동력이 됐습니다. 여담이지만 나중에 그 선배와 친해져 종종 술 한 잔 하는 사이가 됐어요. 그때마다 전 이렇게 얘기합니다.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선배 덕에 30년 넘게 기자할 수 있었다. 감사하다”고요.
서울 동작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신예리님/리멤버
Chapter 2.
경제부에서 꽃핀 기자 전문성… 4개 면 홀로 책임지는 ‘에디터’로 성장
$[1998년 신예리님은 향후 기자로서 주요 커리어를 쌓게 되는 경제부로 발령이 나게 됩니다.]
<"단독 보도를 턱턱 써내는 기자는 결코 아니었지만 다 같이 되짚어 보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기사는 많이 쓴 기자였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적응이 쉽지 않으셨다고요.
첫 출입처가 재정경제원, 지금의 기획재정부였는데 웬걸, 거의 수습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기자는 그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전문가와 대화를 나눌 수준은 돼야 하는데, 갑작스레 발령이 난 탓에 공부가 전혀 안 돼 있던 거죠. 처음엔 정말 많이 헤맸습니다.
심지어 하루는 저보다 먼저 경제부에 와 있던 후배한테 이런 말도 들었어요. “선배는 언제쯤 좀 인상적인 기사를 쓰실 겁니까?” 선배의 꾸지람보다 후배의 그 한 마디가 훨씬 더 세게 박히더라고요. 그날부터 정말 피 튀기게 공부했습니다. 다리 쭉 뻗고 잔 날을 손에 꼽아요. 그렇게 3년쯤 지나서야 비로소 ‘뭘 알고 기사를 쓰고 있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신예리님은 경제부 4년차인 2001년부터 기자로서의 전문성을 본격적으로 꽃피웁니다. ‘국내 주민 등록 말소자가 64만명에 이른다’는 대형 단독 기사는 물론 이듬해 전 세계에 급속히 퍼진 ‘일본 위기설’을 심층 해부한 기획 기사 등에 참여, 총 3차례에 걸쳐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합니다. 나아가 ‘살림’이란 이름의 중앙일보 재테크 섹션을 담당, 매주 4개의 지면을 기획해 내는 ‘에디터’로도 거듭나게 됩니다.]
‘주민 등록 무적자 64만명’(2001) 특종은 당시 조야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어떤 계기로 취재하셨나요?
그때 중앙일보에서 ‘기획 기사로 승부를 보겠다’며 야심 차게 기획취재팀을 꾸렸어요. 여기에 저도 차출됐습니다. 대개 기자들은 단발성 이슈를 쫓느라 기획엔 집중하기 힘들어요. 헌데 여기선 데일리 기사를 쓰는 대신 한 달씩 취재 기간을 보장받아 아주 긴 호흡의 기사를 쓸 수 있었죠. 특종보단 기획에 더 자신이 있던 터라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
발령 후 대체 어떤 이슈를 발제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눈에 들어온 게 바로 노숙인들이었어요. 당시 중앙일보 사옥이 서소문에 있었는데 서울역 쪽으로 걷다 보면 노숙인을 정말 많이 마주쳤거든요. 헌데, 어느 날 한 취재원에게서 들어 보니 이들 상당수가 “IMF 때 빚쟁이를 피해 가정을 떠난 뒤 피치 못하게 주민 등록이 말소된 사람들”이란 거예요. 원랜 주변의 평범한 이웃이었다가 별안간 길거리에 나앉게 된, 우리 사회가 미처 들추지 못한 IMF의 그늘이었던 거죠. 이분들의 이야기를 취재해 보자 건의했고 “당장 취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통계 확보가 관건인 기사였죠. 자료를 어떻게 확보했나요?
현란한 취재 스킬이 있던 게 아니에요. 곧이곧대로 정석대로 행자부(현 행안부) 담당과를 찾아가 관련 통계를 요청했습니다. “관련 자료가 없다”고 하시니 필요성을 잘 설명드리면서 만들어 달라 정중히 부탁을 드렸을 뿐이에요. 돌이켜 보면 참 신기하죠. 공무원이 위에서 시키지도 않은 일을, 그것도 일개 기자를 위해 해 주는 일이 드물거든요. 더구나 중요한 공식 통계를 다른 데 릴리즈하기도 전에 단독으로 줬으니 더더욱이요. 진심은 통한다는 걸 그때 새삼 느꼈습니다.
그리고 통계 확보 못잖게 자랑스러웠던 게 있어요. 솔직히 처음엔 좀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당시 취재 과정서 정말 많은 사례자들을 만났다는 점이에요. 숫자만 들어간다고 기사의 설득력이 강해지는 게 아니거든요. 통계 너머의 진짜 생생한 이야기까지 담아내야만 독자에게 전할 울림도 배가시킬 수 있죠. 그 덕분인지 이제 주민 등록 말소자 기사는 매년 꾸준히 나오는 뉴스로 자리잡았고, 그만큼 사회 안팎의 관심도 늘어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자폐아 가정’(2001), ‘저출생’(2004) 등 이슈를 거의 처음으로 공론화시키기도 하셨어요.
딸이 저처럼 기자로 일하는 중인데, 언젠가 “엄마는 기자로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기사가 뭐야?”라고 묻더라고요. 그때 고민 없이 답했던 게 ‘자폐아 가정’을 다뤘던 기사였어요.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자폐가 뭔지 잘 몰랐고, 오해도 많았어요. 특히 자폐를 ‘자녀가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해서 걸리는 후천적 질병’이라 믿고 워킹맘들한테 낙인을 찍는 이들이 많았죠. 이 기사를 통해 그 낙인을 벗겨 내고 싶었고, 다행히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저출생 기사도 마찬가지예요. 당시는 사회적으로 저출생에 관심이 크지 않았고, 정부 역시 대대적 정책 전환을 추진하기 전이었거든요. 헌데 통계를 보고 있자니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곧장 편집국장을 찾아가 특별취재팀을 꾸리자고 설득했고, 그 결과 각 부서 선후배들과 함께 아주 탄탄한 기획 시리즈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공들인 만큼 이 기사가 저출생 고민의 시발점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해낸 듯해 자부심을 느껴요. 현장 기자 시절을 돌이켜 보면, 전 단독 보도를 턱턱 써내는 기자는 결코 아니었지만 다 같이 되짚어 보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기사는 많이 쓴 기자였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살림’이란 재테크 섹션을 맡아 이끄시기도 했습니다. 9개월간 매주 4개 면을 혼자 꾸리셨어요.
꽤 오래도록 재테크는 이미 돈을 잘 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개념이었어요. 헌데 그 무렵부턴 평균적인 사람들의 재테크 수요도 점차 높아지고 있었죠. ‘살림’ 섹션이 나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을 위한 맞춤형 재테크 컨설팅을 해 주자는 기획이었죠. 제목에도 이런 의도가 반영된 거예요.
제가 당시 부서 막내급이었기 때문에 사실 이 섹션을 통으로 맡게 될 줄은 몰랐어요. 때문에 ‘경제 초짜’인 저로선 굉장히 큰 도전이었는데, 도리어 제 약점이 큰 강점이 됐습니다. 제 눈높이에 맞는 아이템들로 콘텐츠를 구성하면 됐으니까요. 같은 맥락에서 섹션 최고 히트 코너였던 ‘재산 리모델링’도 나올 수 있었죠.
‘당신의 재산을 리모델링하세요’(2003)란 책으로 출간될 만큼 인기를 끌었습니다.
평범한 이웃들의 크고 작은 재테크 고민에 금융 전문가들이 직접 자문해 주는 코너였는데, 매주 자기 사례도 다뤄 달라는 민원이 폭발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어요. 누구나 이해 가능한 쉬운 경제 기사의 수요가 실은 엄청났던 거죠. 저 역시 콘텐츠 구성에서부터 지면 편집, 코너 작명에 이르기까지 총괄 기획자로서 이 정도 흥행작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행복이 컸고요.
여하간 이쯤 되니 경제부 초창기 “경제도 기업도 모르는 녀석이 왜 경제부 와서 설치냐”라고 의심 어린 눈길을 보냈던 선배들의 태도도 달라졌어요. “너 섹션 참 잘 만든다. 대단하다”고 다들 인정해 줬죠. 그리고 그때부터 이렇게 확신했습니다. ‘난 확실히 특종 기자는 아냐. 하지만 기획력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어.’
서울 동작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신예리님/리멤버
Chapter 3.
승진 누락의 아픔도 잠시, ‘오피니언 리더’ 논설위원으로 우뚝!
$[입사 15년차인 2004년 신예리님은 첫 승진 인사에서 뜻밖에 고배를 마십니다. 같은 기수 중 해외 연수로 인해 고과 대상에서 제외된 동기 한 명을 빼곤 유일한 승진 누락이었습니다.]
왜 혼자만 승진이 안 되셨나요?
인사 고과에서 2년 연속 P등급을 받았거든요. 쉽게 말해 P등급은 ‘불가촉천민’이라고 보시면 돼요. 보통 인사 고과는 A~C등급으로 나뉘는데, 저는 차원이 다른(?) 등급을 받은 거죠. 그것도 두 번 연속이나요.
왜 연달아 P등급을 받으셨던 건가요?
상사한테 대들었거든요. (웃음) 두 해 다 상사랑 정면에서 논쟁을 벌인 후 받게 된 점수였어요. 당시 그 상사가 저희 부서로 와 업무 관련 질타를 하셨는데, 제가 느끼기엔 상당히 불합리했고 너무 얼토당토 않은 지적이었죠. 결국 못 참고 일어나 따졌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지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결과는 빤하죠. 대판 언쟁을 벌이고선 두 번 연속 P를 받았습니다. 다 물불 못 가리던 젊은 시절의 일이에요. 이때의 경험 덕분에 상사들에게 입바른 소리를 해야 할 경우에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단 걸 터득하게 됐습니다.
$[승진 누락의 아쉬움도 잠시, 4년 후인 2008년 신예리님은 동기 중 최초로 논설위원에 발탁됩니다. 국내 수위권 메이저 신문의 논조를 좌우하고 다양한 이슈에서 언론사를 대표해 목소리를 내는, 명실상부 ‘오피니언 리더’로 발돋움한 겁니다.]
매우 이른 연차에 논설위원에 발탁되셨습니다.
당시 중앙일보 논설실은 로마의 ‘원로원’ 같은 느낌이 강했어요. 최고라 인정받는 글쟁이들이 모여 우리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우리 신문은 또 어느 곳을 바라봐야 하는지 매일 토론하고 의견을 모았죠. 그 의견을 다듬고 또 다듬어 모든 기자들을 대표한 글로 공표했고요.
어릴 적 막연히 글쓰기가 좋아 기자를 꿈꿨던 저로선 논설위원이 된다는 게 너무나 큰 꿈이었는데, 그 꿈을 생각보다 빨리 이루게 된 거예요. 더구나 새파란 후배인 제가 신입 위원에 합류하는 걸 반대하는 선배 위원들이 한 분도 없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굉장한 영광이었습니다.
신문사 사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건가요?
아침마다 오늘은 어떤 주제의 사설을 쓸지, 논조는 어떻게 갈지 정말 피 튀기는 토론을 펼쳐요. 말이 토론이지 거의 전쟁입니다. 마침 그때 중앙일보 논설위원들의 진보-보수 스펙트럼이 엄청 다채로웠어요. 저는 사안별로 진보, 보수가 나뉘는 편이어서 의견이 팽팽히 맞서는 이슈에선 제가 일종의 균형추 역할을 하곤 했습니다.
재임 기간 보수 성향 신문사에서 다소 나오기 힘든 파격적 논조의 사설도 자주 등장했습니다.
제가 균형추 역할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한 몇몇 이슈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미혼모 지원 관련 사설이었습니다. 미혼모 가정의 실태를 지적하고 제도·인식 개선을 촉구하자는 내용었는데, 사실 당시 논설위원실 분위기는 시기상조가 아닐까 우려하는 쪽이었습니다. 여론을 고려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제 입장은 달랐습니다. ‘지키기 위해 바뀌어야 한다’는 말처럼 미혼모를 바라보는 주류 언론의 시선도 시대에 적합한 스탠더드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긴 시간 정말 팽팽히 맞섰습니다. 이윽고 가만히 지켜보던 주필이 판결을 내렸어요. “이 이슈는 신예리 위원 주장대로 쓰시오.”
이후 어느 날 한 행사에서 미혼모 지원 단체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한겨레보다 미혼모 지원하자는 사설을 더 많이 써 주시는 우리 중앙일보 논설위원님”이라며 반겨 주더라고요. 제 노력을 알아주신 것 같아 뭉클했습니다. 저널리즘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는 움직임이잖아요. 그 과정에 필요한 사회적 논쟁과 사고(思考)를 촉발하기 위해선 열정과 신념을 갖고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진보, 보수를 떠나 사회 이슈를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기 위해 언론인으로서 늘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 동작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신예리님/리멤버
Chapter 4.
베테랑 신문 기자, 앵커로 변신해 JTBC ‘밤샘 토론’을 이끌다
$[2011년 신예리님의 커리어에 중대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신문 기자로서의 20년을 뒤로하고 신생 방송사인 JTBC에 합류해 방송 기자로 변신한 겁니다. 신예리님은 JTBC의 초대 국제부장으로서 국제 보도 부문을 이끕니다.]
<"4~5시간쯤 토론하니까 나중엔 지치고 힘들어 서로 타협을 하더라고요. 설득이 돼서든 체력이 떨어져서든 뭐든 간에 우리 사회에 타협이 존재할 수 있단 걸 보여준 게 ‘밤샘토론’의 진짜 의의가 아닐까 합니다.">
JTBC 개국 합류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개국 1년 전쯤 ‘JTBC 설립 준비 TF’ 합류 제안을 받았는데, 처음엔 그다지 끌리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당시는 다들 종편 채널에 가기 싫어하는 분위기였거든요. 더구나 논설위원을 하며 정말 많이 배우고 큰 보람도 느끼고 있었으니 굳이 제 발로 박차고 나갈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근데, 사람이 참 희한하죠. 또 한편으론 막연히 새 도전이 너무 재밌을 것 같단 생각이 드는 거예요.
곧장 논설실 선배들한테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그랬더니 “일단 가 보고 아니면 다시 와. 받아줄게!” 이러시는 거예요. 딱히 그럴 권한도 없는 분들의 얘기였는데 묘하게 위안이 되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덥석 수락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평생 신문만 하던 사람들이니 저를 비롯해 다들 시행착오는 많았지만, 나름 방송 안착에 잘 기여했다고 자평합니다.
$[개국 이듬해인 2012년 신예리님은 파격 도전에 나섭니다. 앵커로 전격 데뷔, 자신의 이름을 딴 ‘신예리&강찬호의 직격토크’(2012), ‘신예리·박진규의 시시각각’(2013) 등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된 겁니다.]
갑자기 방송 진행에 도전하셨어요.
신생 방송사니까 누굴 앵커로 써야 할지 판단 기준이 없잖아요. 때문에 앵커를 오디션으로 선발하겠다는 공표를 냈는데, 처음엔 서로 눈치만 보던 분위기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나서는 거 잘 못 하잖아요. 당시 제가 부장이었으니 후배들 독려 차원에서 “우리 부서는 앵커 오디션 다 나간다. 나도 나갈 거야”라고 뱉고 총대를 멨죠. 그러다 보니 얼떨결에 부장급 이상 간부 중 유일한 오디션 참가자가 됐어요.
사실 개국 전에 저를 포함해 신문에서 건너온 동료들이 아나운싱 수업을 들었거든요. ‘부장들한테 방송 진행까지 시키겠어?’란 생각도 들었지만, 선배인 저부터 잘 알아야 후배들도 가르칠 수 있겠단 생각에 열심히 임했었죠. 그 덕분이었을까요. 후배들 독려하러 나간 오디션에서 제가 3등을 차지해 버렸어요. 앵커 선발전에 턱걸이로 합격을 한 거죠.
2012년 7월 29일 방송된 ‘신예리&강찬호의 직격토크’의 한 장면/JTBC 홈페이지 캡처
막상 앵커가 쉽지 않았나 봅니다. 앞선 두 프로그램은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금방 종영됐어요.
초창기니까 이것저것 시도해 보던 시기였어요. 해 보고 별로면 금방 없애고 딴 걸 기획해 만들던 식이죠. 더구나 회사가 시사 교양 프로그램엔 큰 관심을 두지 않기도 했고요. 물론 저도 많이 부족했던 게 사실입니다. 지금 보면 정말 못 봐주겠더라고요. (웃음) 방송인들은 특유의 각이 좀 잡혀 있는데 그때 전 너무 다듬어지지 않았죠. 막 깔깔깔 웃고 제스처도 너무 많이 쓰고···. 그나마 신생 방송사였으니 그런 제게도 기회가 주어졌던 것 같습니다.
대신 저도 제자리에만 있진 않았어요. 겸허히 지적을 수용하면서 천천히 조금씩 나아갔죠. 진행자로서 제 나름의 장점도 더 살리고자 했고요. 신문 기자로서 20년간 노숙인, 장관, 외국 대통령 등 별의별 인터뷰이를 다 만나 봤잖아요. 진행은 투박해도 저만의 질문은 깊이 있고 남다를 거란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덕분인지 결국 칭찬도 많이 듣게 됐어요. 손석희 전 사장이 2013년 JTBC 보도 담당 사장으로 오셨는데, 부임 전 상견례 때 이렇게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신 부장, 방송 아주 잘하시던데요?” ‘수십년 베테랑 앵커한테도 나름 괜찮아 보였나 보다’하고 안심했습니다.
$[2013년 신예리님은 앵커로서 자신의 대표작이자 JTBC의 간판 토론 프로그램 ‘JTBC 밤샘토론(이하 밤샘토론)’의 진행을 맡게 됩니다. 이름에 걸맞게 국내 토론 방송 중 최장 러닝 타임을 자랑하던 프로그램으로 자정 즈음 시작해 새벽 2~3시를 넘기는 건 기본, 2018년 10월 100회 특집 땐 무려 5시간 31분 방영이란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죠. 기존 매체들에선 볼 수 없던 파격적 ‘끝장 토론’으로 ‘TV 토론 문화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밤샘토론’, 등장부터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어떻게 탄생한 프로그램인가요?
그해 여름, 손 사장한테 무심결에 던진 기획 아이디어가 화근(?)이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 양극화가 심각하잖아요. 그래서 가볍게 제안을 던져 봤어요. “한두 시간 토론만으론 결판이 잘 안 나니, 밤을 꼴딱 새서라도 끝장 토론을 하게 하면 어떨까요?”
보통 토론 프로그램 러닝 타임이 70~100분 정도예요. 하지만 그 시간 안에 제대로 된 토론이 되나요? 서로 다투기만 하다 흐지부지 끝나기 일쑤잖아요. 정작 구체적으로 무엇을 주장하는지,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지 알기가 힘들죠. 제 얘길 듣더니 손 사장이 그러시더라고요. “말 꺼낸 사람이 책임지세요.” 그래서 ‘밤샘토론’이 만들어졌고 제가 진행도 맡게 된 거예요.
러닝 타임이 압도적으로 긴 만큼 별의별 에피소드가 많았을 듯합니다.
구석구석 아픈 데가 많이 생겼어요. 일단 생방송이 시작되면 사회자는 자리를 비울 수 없잖아요. 어느 날엔 갑자기 요통이 심하게 와 제대로 걷지도 못한 적이 있었죠. 그런데 신기하게 카메라에 빨간 불만 들어오면 아픈 것도 싹 잊어버리고 방송에만 몰두하게 되더라고요. 끝나고 쓰러질지언정 말이죠.
헌데 제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은 도저히 통제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크고 작은 소동이 많았습니다. 토론 도중 기분이 상해 갑자기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가 버린 국회 의원도 있었고, 생방송을 고작 몇 시간 앞두고 출연 불가를 통보해 방송이 펑크 날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죠. 그래도 시청자와의 약속은 무조건 지킨다며 자리를 지켜 준 나머지 출연자들의 노력 덕에 큰 방송 사고는 면했습니다. 그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장장 7년 2개월간 진행하던 ‘밤샘토론’이 2020년 결국 종영했습니다. 소회를 여쭈어요.
올해 총선 때 원내 입성한 김재섭 의원이 당시 저랑 밥을 먹는데 이런 얘기를 했어요. “‘밤샘토론’ 없어지면 우린 어디 가서 토론해요?” 청년 정치인들에겐 방송 출연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아요. 때문에 저희는 일부러라도 이들을 굉장히 많이 섭외했어요. 덕분에 그들 사이에선 ‘밤샘토론’이 자기 얼굴을 알릴 주무대로 인식됐고, 실제로 여기서 인지도를 크게 높이거나 원내에 입성한 청년들도 많았습니다. 그들 스스로 이곳 출연을 대단한 이력으로 생각하기도 했고요. 자신만의 콘텐츠를 갖지 않는 한 3시간 넘는 토론은 불가능하단 걸 잘 알았던 거죠. 정치 세대 교체에 ‘밤샘토론’이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널리즘의 차원에서도 ‘밤샘토론’은 의미가 컸어요. ‘우리 사회에 토론을 통한 타협의 가능성은 정녕 없는 것인가’라는 제 오랜 고민을 조금이나마 풀어준 프로그램이기도 하거든요. 150회를 진행하면서 번번이 정말 흥미로웠던 게, 4~5시간쯤 토론하니까 나중엔 지치고 힘들어 서로 타협을 하더라고요. “그래, 당신 말이 맞는 걸로 합시다.” 이렇게요. 그럼 제가 “여기서만 그러시는 게 아니라 다음 주 국회에 가셔서도 같은 입장이셔야 합니다”라고 못을 박기도 했죠. (웃음) 설득이 돼서든 체력이 떨어져서든 뭐든 간에 우리 사회에 타협이 존재할 수 있단 걸 보여준 게 바로 ‘밤샘토론’의 진짜 의의가 아닐까 합니다. 진행자로서도 그게 큰 보람이었어요.
2015년 12월 12일 방송된 ‘밤샘토론’에서 진행자와 출연진이 함께 촬영한 기념 사진/신예리님 페이스북 캡처
Chapter 5.
남다른 시선으로 ‘차이나는 클라스’를 빚다!
$[2015년 신예리님은 방송 기자, 앵커에 이은 또 한 번의 도전에 나섭니다. JTBC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총괄하는 보도제작국장을 맡게 되며 이번엔 방송 제작자로 변신한 겁니다.]
뜻밖에 보도제작국장으로 발탁되셨어요.
시사 교양 파트는 예나 지금이나 다른 분야에 비해 찬밥 신세예요. 이 부서, 저 부서로 옮겨지다 결국 보도 부문 안으로 들어갔죠. 그러면서 뉴스를 총괄하는 보도국과 시사 교양 파트를 도맡는 보도제작국으로 나뉘게 됐는데, 그때 저한테 보도제작국을 맡아 진두지휘하라는 임무가 주어진 거예요.
처음엔 싫다고 했죠. 저는 기자니까 보도국에 뼈를 묻고 싶었거든요. 근데 웬걸, 새로운 일만 보면 ‘재밌을 것 같은데?’ 생각하게 되는 병이 도진 거죠. (웃음) 결국 또 한 번 가 보기로 했어요.
$[제작자 변신 3년차인 2017년 3월, 신예리님의 대표 히트작이 탄생합니다. 바로 ‘국내 최초 쌍방향 강연 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 ‘차이나는 클라스’가 만들어진 겁니다. 각계 최고의 전문가 출연진은 물론 코미디언·가수·배우 등 기존 강연 프로그램에선 볼 수 없던 다양한 패널 구성, 강의보다 질문을 우선하는 참신한 포맷으로 방영 초반부터 화제를 모았죠. 특히 당시 종편 채널로선 이례적으로 높은 5%의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차이나는 클라스’는 어떻게 기획하신 건가요?
JTBC 합류 초창기부터 후배들과 회식 때 ‘신예리 게임’이란 걸 했어요. 누군가가 다른 한 명을 지명해 직위와 무관하게 반말로 돌직구 질문을 날리는 게임이었죠. 질문받은 사람은 대답하거나 싫으면 술을 원샷해야 했고요. 이를 테면 야자 게임과 진실 게임을 합친 놀이였죠. 사실 ‘왕고’인 제가 제일 불리한 게임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이따금씩 격의 없는 소통을 해 보고 싶었어요. 물론 진실은 그 후배들한테 직접 취재해 보셔야 알겠지만 전 대체로 효과가 진짜 있었다고 봐요. 특히 막내급 후배들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가령 “신예리, 너는 솔직히 회사 관두고 싶은 생각 없어?”라고 아주 거침없이 묻더라고요. (웃음)
구태여 하극상(?)을 당해 가면서까지 이런 게임을 한 궁극적 이유는 바로, 질문이 자유롭게 오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어요. 의견 개진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선 훨씬 일도 잘됩니다. 그렇지 않나요? 서로 생각지 못한 관점들이 보태지는 과정에서 결국 더 나은 방안이 도출되죠. 제가 그 생생한 목격자이자 경험자잖아요. 묻고 싶은 건 바로 묻고, 말하고 싶은 건 바로 얘기해 가면서 배우고 성장해 왔으니까요. 바로 이걸 방송을 통해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고 싶었습니다. 그 취지로 기획한 게 바로 ‘차이나는 클라스’였어요.
그 때문인지 일방향적인 종전의 강연 프로그램들과 확연한 차별화가 이뤄졌어요.
기존 모든 강연 프로그램은 예외 없이 일방통행이었어요. 정장을 입은 강연자가 높은 연단에 서서 방청객을 상대로 가르침을 와르르 쏟아내는 방식. 청중은 그저 강연을 듣기만 하는 존재였죠. 물론 강연 말미에 빤한 질답을 주고받긴 했지만요. 저희는 그걸 전부 뒤바꿨어요. 세트를 수평적으로 구성해 강연자와 출연자의 눈높이부터 맞췄고, 패널들이 강연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모르겠어요!”를 외칠 수 있게 해 강연과 질문이 동등한 비중을 갖도록 했죠. ‘질문 없는 세상의 답답함을 깨자!’는 게 저희의 중심 모토였으니까요.
강연자를 섭외할 때도 미리 단단히 일러뒀어요. “대학에서 강의하듯 매끄럽게 강연만 하실 수 없다. 질문 세례가 퍼부어질 수 있다”고 말이죠. 때문에 프로그램 초기엔 강연자 섭외에 어려움이 좀 있었어요. “강의실에서도 질문을 거의 안 받는다”면서 꺼리는 교수님들이 상당히 많았거든요. 그때마다 굴하지 않고 강하게 설득했습니다. “선생님, 언제까지 똑같은 방식으로만 강의하실 건가요? 안 하던 것도 해 보셔야죠!”라고 몰아붙이기도 했죠. 처음엔 낯설어 하던 전문가들이 저희 방송 출연 이후로는 비슷한 포맷의 온갖 채널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계세요. 시사 교양 방송의 저변을 획기적으로 넓히는 데 큰 공을 세운 프로그램이라고 자부합니다.
$[작년 6월 ‘차이나는 클라스’는 6년 3개월여의 방송을 끝으로 종영했습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성공을 기점으로 소통형 강연이 시사 교양 프로그램의 대세로 자리잡게 됐죠. 업계에선 ‘‘차이나는 클라스’가 강연 프로그램의 ‘뉴노멀’이 됐다’는 평이 나옵니다.]
이제 소통형 강연이 시사 교양 프로그램의 주류가 된 듯합니다. ‘차이나는 클라스’와 유사한 프로그램들도 정말 많이 생겨났어요.
맨 처음엔 엄청 열받았어요. 어떤 프로그램은 세트부터 패널 구성, 진행 방식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포맷을 다 따라했더라고요. 심지어 강연자와 그 주제마저도 베꼈죠. 참다 못해 제가 직접 나서 경고한 이후론 좀 달라졌지만요.
물론 콘텐츠 표절은 반드시 근절돼야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뿌듯한 구석도 있었어요. 좋으니까 베꼈을 거잖아요. 제가 전파하고자 했던 게 ‘쌍방향 소통의 중요성’인데, 그게 우리 사회로 확산되고 있다는 방증 아니겠나 싶더라고요. 그 점에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도 듭니다.
2022년 ‘차이나는 클라스’의 스핀오프 프로그램 ‘차이나는 K-클라스’의 제작 발표회 현장/신예리님 페이스북 캡처
Chapter 6.
33년 베테랑 언론인이 발레를 시작한 이유는?
$[2022년 6월 신예리님은 상무급의 교양팩추얼본부장으로 승진, JTBC 최초의 여성 임원에 등극합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듬해 3월 구조 조정으로 인해 부서가 전면 해체되면서 그도 자연스레 현직에서 물러납니다. 1년간의 비상근 자문역을 끝으로 신예리님은 올해 5월, 30년 넘게 몸담은 직장을 떠나게 됩니다.]
<"프로란 차이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
30년 넘게 몸담은 언론계를 갑작스레 떠나게 됐어요.
임원이 되던 날 감사함과 더불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60세 정년을 채우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저는 일년에 일주일 이상 휴가를 써 본 기억이 없어요. 그만큼 청춘을 바친 회사였고, 이곳에서 정년을 채우고 싶단 소박한 꿈도 있었습니다. 근데 임원은 ‘임시 직원’의 준말이라고들 하잖아요. 관두라면 언제든 짐 싸야 하는 게 임원인 만큼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당시 회사 경영 사정이 급속히 안 좋아지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었거든요. 그럼에도 현직에서 물러나게 됐을 땐 충격이 정말 컸습니다. 지금이야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만요.
하지만 그대로 주저앉진 않았어요. 제가 원체 일희일비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인생이란 게 그렇잖아요. 되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계속 안 좋기만 한 건 아니니까요.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때문에 우선 씩씩하게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다짐했습니다. 부서 해체 통보를 3월 말에 받았는데 ‘차이나는 클라스’ 방송은 6월 중순까지 잡혀 있었거든요. 자발적으로 녹화에 나가 종영까지 현장을 지켰습니다. 조직이 사라지는 마당에 수장인 저마저 없으면 현장 사기가 어찌 되겠어요. 끝까지 책임을 다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작한 게 있었어요. 너무나 오래 묵혀 온 제 오랜 꿈, 바로 발레를 배우는 일이었어요.
$[‘베테랑 저널리스트’ 신예리님의 인생 제2막을 열어젖힌 건 다소 생뚱맞은 ‘발레’였습니다. 자문역 발령 직후인 작년 4월 3일, 그는 돌연 발레 학원에 등록합니다. 50대 중반의 늦깎이 발레 입문자였지만 굴하지 않고 2년째 배워, 급기야 올해 3월엔 ‘발레를 배우며 생각한 것들’이란 제목의 자전적 에세이까지 출간합니다.]
왜 갑자기 발레를 배우셨나요?
배우 오드리 햅번이 제 오랜 우상이에요. 십수년째 제 휴대폰 배경은 늘 햅번 사진으로 돼 있을 정도로 흠모하고 있죠. 미모나 옷맵시는 물론 햅번 특유의 고혹적 자태가 절 반하게 했어요. 손 동작이나 발걸음 하나하나가 홀릴 만큼 우아하잖아요? 헌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매력이 바로 발레에서 나왔던 거더군요. 어려서부터 발레를 배웠고, 심지어 배우가 되기 전까지 발레리나로 활동했다더라고요. 때문에 저도 언젠가는 발레를 배우려 했어요. 그래서인지 해체 통보를 받는 순간에도 바로 발레가 떠올랐죠. ‘아, 발레 배우러 가야지.’
어찌 보면 마냥 침잠해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잖아요. 예기치 못하게 30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됐으니,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저도 모르게 제 자신을 잠식하더라고요. 마냥 고민에 빠져 있기보단 몸을 쓰는 일이 돌파구가 될 거라 봤어요. 제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몸 쓰는 일, 그게 바로 발레였습니다. 결과적으론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서울 동작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발레 동작을 선보이고 있는 신예리님/리멤버
늦깎이 입문자로서 쉽지 않았을 텐데요.
진짜 어려웠고 아직도 어려워요. (웃음) 하지만 온전히 제 몸에만 몰입하고 어려운 동작을 하나씩 익혀 가며 얻는 재미나 행복이 큽니다. 순간순간 크고 작은 삶의 소중한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요. 첫 수업 때 가장 처음으로 배운 동작이 ‘플리에’였어요. 흡사 점프 전 개구리처럼 무릎을 굽혀 몸의 중심을 낮추는 동작이죠. 이 동작의 이유는 2가지예요. 하나는 점프 후 무탈한 ‘착지’를 위해서, 다른 하나는 그 다음의 ‘도약’을 위해서. 그걸 알게 된 순간 ‘나도 어쩌면 인생의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얼마 뒤 후배들과 송별회 때 이 얘길 하는데 이구동성으로 책으로 써 보라 하더라고요. 그렇게 플리에를 소재로 샘플 원고를 써 출판사에 제안했고, 일사천리로 출간까지 진행된 거예요. 30여년 일과 삶에서 발견한 저 나름의 통찰을 발레 이야기에 녹여 내 봤습니다. 예상 못한 시련에 낙담하는 모든 분들께 “우린 지금 모두 플리에를 하는 거야”란 말이 위로가 됐으면 합니다.
$[발레 이외에도 신예리님은 다양한 새 영역에 도전 중입니다. 작년 가을부턴 가천대에서 미디어 강의에 나선 건 물론 과학·수학의 대중화를 추구하는 비영리 단체 ‘카오스 재단’에 합류, 영상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 중이기도 하죠. 올해 10월부턴 난치병 아동들의 소원을 이뤄 주는 NGO ‘메이크어위시 재단’ 이사로도 취임했습니다.]
가천대 강의는 실사판 ‘차이나는 클라스’란 평이 많아요.
제 수업에선 발표를 가장 중시해요. 강의 계획서에 아예 명시해 놨어요. ‘발표 잘하는 학생에겐 가점을 준다.’ 그런데 지난 학기에 위기(?)가 좀 있었습니다. 정원이 60명인데 외국인 학생이 20명쯤 되더라고요. 다들 한국어는 곧잘 하는데 단 한 명도 발표를 안 하는 거예요. 회화를 잘하는 거랑 발표를 잘하는 건 사실 다르잖아요. 문화적 맥락을 모르니 아무래도 어려웠겠죠.
그럼에도 이 친구들이 소외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때문에 외국인 학생에 한해선 지난 강의 때 나온 의제를 고민해 다음 수업 때 발표할 수 있도록 규칙을 정했습니다. 효과가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다음 시간에 한 미얀마 학생이 용기 있게 손을 들더라고요. 자칫 역차별이라 느낄 수 있지만 한국 학생들도 이 학생의 발표에 열심히 손뼉을 쳐 줬고요. 그 다음 시간에도 이 미얀마 학생은 발표를 했고, 마찬가지로 한국 학생들이 박수를 보내 줬습니다. 헌데, 놀라운 건 그 다음부터예요. 당일 즉석 발표 시간에 다른 외국인 학생들도 우후죽순 손을 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모두한테 발표가 자연스러워진 거죠. 그날부로 그 특별 규칙은 필요가 없게 됐어요. 나름 실사판 ‘차이나는 클라스’를 만든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그 외에 각종 재단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계세요.
퇴직 후 더 바빠진 것 같네요. (웃음) 물론 방송사에선 나오게 됐지만, 앞으로도 저는 여전히 제가 좋아하고 가치롭다 생각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일 거예요. 카오스 재단 참여도 그런 맥락이었어요. 제가 제작자일 때 늘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했거든요. “우리 모토는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거야.” 헌데 과학과 수학의 대중화라니, 의미가 충분하잖아요? 여기에 제 장기를 살려 재미를 보탠 값진 영상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메이크어위시 재단은 아동 복지에 오래 전부터 관심이 많아 참여하게 됐어요. 제 우상 오드리 햅번도 은퇴 후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활약하며 세계 곳곳의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섰잖아요. 감히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저도 딱한 처지의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죠. 기자 시절 꾸준히 관련 칼럼과 사설을 썼고, 월드비전 장기 후원자로서 홍보자문위원도 했었죠. 같은 선상에서 퇴직하고 나면 아동 문제에 헌신할 거라고 오래 전부터 계획해 왔는데, 마침 지인이 이 재단 이사로 계셔서 영입 제안을 받게 됐어요. 급여나 활동비 없이 순전한 재능 기부로 참여 중입니다.
정치권 러브콜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정계 진출엔 욕심 없으신가요?
전혀요. 저랑 결코 맞지 않는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기자로서 방송인으로서 제가 가장 행복했던 것 중 하나가 정말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일했다는 점이었어요. 언론계에 오래 몸담으면서 많은 정치인과 알고 지냈지만 함께 일하고픈 사람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누군가는 제가 들어가서 바꾸면 되지 않냐고 묻기도 하는데, 그건 결코 혼자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언론인으로서 자기가 비평하던 대상이 있는 곳에 플레이어로 뛰어드는 걸 별로 바람직하게 보지 않기도 하고요.
30여년간 기자, 진행자, 제작자 등 다양한 역할로 저널리즘에 종사했습니다. 저널리즘은 무엇이라 정의하시나요?
세상을 단 한 발짝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전진시키는 것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신념을 가진 이들이 저널리즘에 종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사회란 건 참 복잡다단합니다. 모든 일에 정답은 없어요. 하지만 저널리스트라면 적어도 글을 쓰고 방송을 만드는 모든 순간에 스스로 이런 질문을 되새겨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나?’ 절대 어렵거나 철학적인 정의가 아니에요. 정말 단순하고 우직하게 저 물음을 늘 되새기면서 열심히 발로 뛰다 보면, 어느새 본인도 모르게 저널리즘을 실현하고 있지 않을까요?
서울 동작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신예리님/리멤버
신예리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프로란 차이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 아닐까요? 흔히 프로와 아마추어를 ‘밥값을 해낼 수 있느냐’로 나눕니다. 그게 뭐 그리 어렵냐 반문하실 수 있는데, 한번 주위를 둘러보세요. 그 밥값조차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저는 다른 것 없이 그 밥값, 그것만큼은 제대로 해내잔 마음으로 지금껏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습니다. 주변에선 “밥값 이상으로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니냐”는 걱정을 해 줄 정도로요. 그리고, 그게 ‘나다움’을 지키는 정도(正道)라 봤어요. 남들과 똑같은 값을 해낸다면, 제가 이들과 어떤 차이가 있겠나요? 결국 끝끝내 그 차이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자기만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프로인 거예요.
물론 절대 거저 되는 게 아닙니다. 노력은 당연한 거고, 그 일에 있어 필요한 그 어떤 것도 허투루하지 않는 엄밀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게 정말 최선일까?’ ‘놓치고 있는 건 없을까?’ 매일 취재 현장에 던져지는 기자로서, 생방송을 진행하는 앵커로서, 또 수많은 스태프를 이끌고 방송을 책임지는 제작자로서 30여년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자문했던 것 같습니다.
겸허하고 뚝심 있게 매일 결과물을 가다듬고 동시에 나다움을 잃지 않으며 발전하면 언젠간 나만의, 내가 가진 콘텐츠만의 값진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예요. 자기만의 ‘차이나는 클라스’를 맘껏 보여 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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