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영
現 NH투자증권 프리미어블루 강북센터 상무
관리 고객 자산만 1조원에 달하는 국내 최고수 PB이자 금융 전문가입니다. 서울대 계산통계학과를 나와 1989년 신영증권 IT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 2년 뒤 애널리스트로 직무를 전환하며 금융계에 입문합니다. 1999년 펀드매니저로 한 차례 더 직무를 바꾼 뒤 2005년에서야 미국계 증권사인 메릴린치에서부터 PB의 길을 걷게 됩니다. 뒤늦은 출발임에도 데뷔 첫해부터 지금까지 줄곧 최우수 실적을 일궈내며 20년째 최정상급 현역 PB로 활약 중입니다.
국내 증권가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하는 금융인이 있습니다. 그의 직업은 프라이빗 뱅커. 수십억 이상 고액 자산을 전담 관리하는 일명 ‘부자들의 자산 관리사'로 흔히 약칭인 PB라 불리죠. PB로서 그가 관리 중인 고객 자산은 무려 1조원. 여느 중소 자산운용사와 맞먹는 규모입니다.
업계에선 그를 가리켜 ‘금융계 샐러리맨의 신화’라 이야기합니다. 유독 경쟁이 치열한 PB의 세계에서도 매년 최상위권 실적으로 롱런하며 줄곧 업계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그가 최근 20년간 벌어들인 근로 소득만 200억원이 넘습니다. 이 전설적 금융맨의 이름은 ‘서재영’, 그가 바로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입니다.
<“꼭 주식이나 펀드에만 투자 전략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인생이란 투자 판에도 전략이 필요하죠. 누구에게나 자원은 늘 한정적인 법이니까요.”>
'깡촌 빈농의 아들' '학비에 허덕이는 고학생' '3차례나 직무를 바꾼 마흔살 늦깎이 PB'… 금융 투자에선 '미다스의 손'으로 통하지만, 정작 그의 인생 투자 판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보란듯 ‘한국 최정상 PB’에 올라서는 대반전을 써 냈죠. 과연 불리한 판을 뒤집고 최고의 실적을 일군 서재영님만의 '인생 투자 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리멤버가 직접 만나 그 생생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봤습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서재영님/리멤버
Chapter 1.
'한국 1등 PB'의 첫시작은 IT 개발자?!
$[‘한국 최정상급 PB’ 서재영님의 첫출발은 뜻밖에도 IT 개발자였습니다. 경남 합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운 형편에도 1983년 서울대 계산통계학과(현 컴퓨터공학부)에 입학, 1989년 신영증권에 투자 정보 시스템 개발자로 입사합니다.]
<“헝그리한 악바리는 누구든 당해 낼 수가 없는 법입니다.”>
어릴 적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우셨다고요.
합천에서도 덕곡면 병배리, 완전 깡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농사꾼이셨는데, 형편이 워낙 어려워 어린 저도 농사꾼이나 다름없었죠. 특히 소 키우기는 제 전담이었어요. 새벽 4시쯤 일어나 여름엔 산에 가서 풀을 먹이고, 겨울엔 여물을 만들어 먹였습니다. 덕분에 습관이 들어 지금도 새벽 5시쯤엔 일어나요.
하지만 그리 일찍 기상해도 학교에 밥먹듯 지각했어요. 통학에 1시간 30분이 걸렸는데 소 먹이는 데만 족히 2시간은 쓰였으니까요. 애시당초 부모님도 자식들 공부는 뒷전이셨습니다. 공부 잘하면 괜히 돈만 든다고 오히려 싫어하셨거든요.
그럼에도 서울대에 들어가셨어요.
‘헝그리 정신’ 덕분이죠. 그저 빈말이 아닙니다. 헝그리한 악바리는 누구든 당해 낼 수가 없는 법이거든요. 중학교 3학년 무렵,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형편이 더 어려워졌어요. 변변한 반찬이 없어 직접 담근 김치라도 싸갔는데 어느날은 물이 줄줄 새 가방만 다 버렸죠. 밥만 먹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날부턴 동급생들이 남긴 반찬을 얻어 먹으며 버텼습니다.
그러니 공부라고 별수 있나요. 똑같았죠. 친구들한테 참고서나 문제집을 전부 빌려 공부했어요. 시험 한참 전에 바짝 보고 고사 기간에 돌려주는 식으로요. 그도 모자라 졸업한 선배들한테 졸라 미리 다음 학년 학습서들도 챙겨 풀었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는 건 매한가지니까 어떻게든 그 시간을 쪼개 공부했어요. 그리했더니 고등학교 3년 내내 전교 1등만 하게 됐습니다.
의외로 첫 커리어가 금융맨이 아닌 IT 개발자세요.
제 전공인 계산통계학은 지금으로 치면 컴퓨터공학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일종의 소프트웨어 개발을 배웠어요. 1989년이면 전산화가 아직 한참 덜됐을 무렵이고 그건 증권 분야도 다르지 않았던 터라, 신영증권에서도 지금으로선 불필요한 각종 전산 작업을 담당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장이 마감되고 나면 누군가 디스켓을 들고 와 전산실에 업로드를 시켜요. 당일 종가, 거래량 등의 주식 정보가 거기 올라가죠. 그럼 저는 그 데이터가 반영된 기술적 지표나 재무제표 같은 각종 차트를 개발했어요. 금융맨들이 컴퓨터로 다 열람할 수 있게 말이죠.
지금 시스템으론 간단한 일들이지만 당시엔 그렇지가 않았어요. 프로그램이 완벽하지 않다 보니 에러가 많았습니다. 전산에 그리 익숙한 세대들도 아니었고요. 때문에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도 제게 전화가 오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통화로 해결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다시 출근하는 일도 잦았죠. 그땐 일요일 빼고 매일 장이 열렸거든요. 참 정신없이 일했습니다.
$[3년차 개발자 때인 1991년 서재영님은 애널리스트로 직무를 전환, 금융맨으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변신이 무색하게 이듬해 금융사를 돌연 관두고 안기부(현 국정원)에 들어갑니다.]
갑자기 직무를 바꾼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애널리스트들과 늘 한 장소에서 일했어요. 제 근무지는 전산실이 아니라 리서치 센터였거든요. 매일 뒤섞여 일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마음이 동하더라고요. 저 혼자만 다른 일을 하고 있자니 뭔가 좀 어색했달까요. 그래서 기회를 봐 어느 날 부장님께 지원 의사를 밝혔습니다. “나도 잘할 수 있다. 해보겠다”고요. 그랬더니 흔쾌히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 쉽게 기회가 주어졌나요?
애당초 저는 회계나 금융 지식이 아예 ‘빵’이었어요. 공학도가 선물, 감가상각이 무슨 말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헌데 그래 가지곤 애널리스트를 할 수 없으니 주말마다 이런저런 책을 뒤지며 미리 엄청 공부했습니다. 주변에 널린 게 전문가니 동료들을 붙잡고 열정적으로 모르는 것도 많이 물었죠.
하지만 지식만으론 제가 신임받지 못했을 거예요. 전문가들이야 이미 차고 넘쳤으니까요. 아무래도 제 태도를 높이 사주셨던 것 같아요. 낮이든 밤이든, 근무 때든 밥 먹을 때든 정말 일만 열심히 했거든요.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소처럼 우직하게 일했습니다. 가령, 투자 자료를 만들면 다음 영업일 아침 각 지점이 받아 볼 수 있게 미리 복사를 해놔야 했어요. 토요일도 예외는 아니었죠.
그런데 그때마다 복사기가 늘 말썽이었습니다. 500장만 넘어도 열이 나 기계가 멈췄거든요. 때문에 1시간씩 쉬어 가며 복사를 했어요. 남들은 진즉에 ‘불토’를 즐기러 가는데, 저만 매번 밤 9시를 넘겨 퇴근했죠. 그래도 불평 한마디 않고 묵묵히 일했는데 그걸 좋게 봐 줬던 듯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직장 생활은 에티켓에서 판가름 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얼마 안 가 돌연 안기부에 들어가셨어요.
1990년대 초반 단자사(단기금융회사), 지금으로 치면 제2 금융사들이 대거 증권사로 바뀌었습니다. 동부투자금융이 동부증권, 한일투자금융이 국제증권(현 삼성증권)이 되는 식으로요. 그러면서 이쪽 일자리도 덩달아 늘었고 저도 스카웃을 받아 동부증권에 가게 됐어요. 헌데, 거기서 채용 때 했던 약속을 안 지키더라고요. 대리로 승진시켜주겠다더니 나중엔 모르쇠로 나오는 거예요. 젊은 혈기에 1년쯤 있다 뛰쳐나왔습니다.
그 뒤 지인한테 “안기부 시험을 한번 쳐보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당시 안기부는 전략적으로 필요한 이들을 따로 물색해 뽑곤 했거든요. 덜컥 합격해 2년 정도 경제팀에서 근무했습니다. 저는 주로 재계 동향이나 정책 관련 보고서를 썼는데, 그게 아침마다 대통령 보고로 올라갔죠. 공부가 정말 빡세게 많이 됐어요.
하지만 2년 만에 관두고 다시 금융사로 돌아오셨어요.
그리 빨리 관둔 사람은 저밖에 없었어요. 당시 동기들은 전부 정년까지 잘 다녔습니다. 지금이야 위세가 많이 줄었지만 그때만 해도 안기부는 무소불위의 권력 기관이었잖아요. 여기 다닌다고 많이들 부러워도 했고요. 하지만 안기부도 결국은 공무원 조직이었어요. 우스개 소리로 ‘일을 너무 열심히 하면 직권 남용, 너무 안 하면 직무 유기'인 곳이었죠. 뭐든 적당히 해야 됐던 거죠.
그걸 못 견디겠더라고요. 저는 정말로 열심히 일하고 싶었거든요. 때문에 공무원은 제겐 딱히 비전이 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당시 동부증권 동료들 야유회를 따라갔는데, 거기서 복직 제안을 받게 돼요. 한창 고민해 보고 있는데 나중에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사장님한테 너 복직한다고 보고 올렸다”고요. 어이가 없었죠. 하지만 왠지 이미 물이 엎질러진 것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덕분에 미련을 훌훌 털고 다시 금융사로 돌아왔습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서재영님/리멤버
Chapter 2.
애널리스트→펀드매니저… 관찰자에서 플레이어로!
$[동부증권 복귀 4년 만인 1998년 서재영님은 고속 승진해 리서치 센터장 자리에 오릅니다.]
굉장히 빠른 승진이었습니다.
1998년이면 나라가 망했던 시절입니다. 문자 그대로요. 당시 2000쯤 갔던 코스피가 IMF 사태로 280으로 주저앉았어요. 반토막도 아니고 7분의 1 토막이 났으니 말 다 했죠. 금융사들이 느낀 충격도 어마어마했어요. 저희도 예외는 아니라 애널리스트 서른 명 중 불과 다섯만 남고 다 나갔습니다. 실적이 나쁜 이들은 싸그리 해고됐고,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연봉을 보전해 주는 곳으로 이직했죠. 그러니 제 위로는 아무도 안 남게 됐어요. 그래서 센터장이 된 겁니다.
물론 저도 곧잘 했으니 여러 곳에서 스카웃 제안이 왔었어요. 사실 제 연봉도 절반이 넘게 깎였거든요. 세전 4000만원쯤 되던 게 1800만원으로 줄었죠. 하지만 죄다 거절했습니다. 7000만원까지 부른 곳도 있었는데도요. 왜 그때 잔류를 택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왠지 모를 의리 같은 게 발동됐던 것 같아요. 살다 보니 그런 의리라는 것도 필요합디다.
$[승진 1년 만인 1999년 서재영님은 또 한 번의 직무 전환을 감행합니다. 바로 동부증권의 주식운용팀장을 맡으며 펀드매니저로 변신한 건데요. 시황을 진단·분석하는 ‘관찰자’를 넘어, 자산을 직접 굴리고 수익을 벌어다 주는 ‘플레이어’가 된 겁니다.]
갑자기 펀드매니저가 되셨어요.
증권사의 메인 비즈니스는 3개예요. 브로커리지(주식 매매 중개), IB(투자 은행), 자기 매매. 당시 동부증권은 자기 매매를 안 했어요. 때문에 당연히 내부 자금을 굴릴 주식운용팀도, 거기 속할 펀드매니저도 없었죠.
그런데 그때야말로 주식을 꼭 해야할 타이밍이라 봤어요. 1주당 만원 하던 기업들이 100원, 200원으로 떨어졌던 때예요. 실력 있는 우리 기업들이 IMF란 재앙 탓에 속수무책으로 평가 절하되던 때죠. 이때 투자하지 않으면 바보라고 봤습니다. 큰 위기가 와도 내실 있는 회사들은 금방 반등하는 게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이잖아요. 때문에 사장님께 주식운용팀을 만들어 좀 공격적으로 투자를 해 보자고 건의를 드렸죠. 결국 팀이 만들어졌고 거기 팀장을 맡으면서 펀드매니저가 된 거예요.
돈을 직접 굴리고 불려 줘야 하니 애널리스트 때와는 또 다른 부담이 있으셨겠습니다.
부담이야 있었겠죠. 하지만 그걸 압도할 만큼 성과가 엄청난 시기였습니다. 1000원쯤 하던 국민은행이 금방 3만원을 갔으니까요. 은행주 반등세가 그 정도인데 하물며 다른 곳들은 말할 것도 없죠. 뭘 사도 먹는, 그저 주우면 임자인 시절이었어요. 덕분에 회사에 돈도 많이 벌어다 주고 저도 인센티브 좀 쏠쏠히 챙겼습니다. (웃음)
이듬해 한셋투자자문으로 이직해 2002년 상무 자리에 오릅니다.
신영증권 때 부장으로 모신 분이 당시 동부증권 신임 사장으로 오셨어요. 사장님 입장에선 함께 일해 본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절 사장실로 자주 찾았죠. 헌데 이걸로 별의별 뒷말이 나오더라고요. 일 말고 다른 것까지 신경 쓰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때문에 한셋투자자문에서 제안이 왔을 때 ‘옳다구나’ 하고 이직한 겁니다.
새 직장에서 상무 직함을 달게 됐지만 달라진 건 없었어요. 펀드매니저로서 똑같이 일했습니다. 여기선 주로 IMF 때 생긴 구조 조정 기금이나 국민연금·군인공제기금 등을 위탁받아 운용했어요. 정부 기금은 성과가 안 좋으면 얄짤없이 위탁 해지가 됩니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굉장히 컸어요. 자산 운용이란 게 신이 아닌 이상 계속 잘하기 힘드니까요.
그렇게 2~3년쯤 지나니 어느덧 40대더라고요. 점차 조바심이 들었습니다. ‘50~60대에도 과연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감도 체력도 떨어질 텐데 그래 가지곤 펀드매니저를 잘 해낼 수가 없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전 일을 오래오래 잘 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라기만 한다고 이뤄지는 게 세상일은 아니잖아요? 진로를 두고 점점 현실적인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서재영님/리멤버
Chapter 3.
4번의 압박 면접 끝, 입사 첫 해 ‘최우수 PB’ 등극
$[2005년 서재영님은 운명의 세 번째 직무 전환을 결심합니다. 미국계 증권사인 메릴린치로 이직하며 새로이 ‘프라이빗 뱅커’의 길을 걷게 된 겁니다. 금융 자산 10억원 이상의 ‘부자 고객’ 자산을 관리하고 키워주는 고액 자산 관리 전문가로, 흔히 약칭인 ‘PB’라 불리는 직무죠. 금융계 입문 15년 만의 뒤늦은 출발인 만큼 시작이 쉽진 않았습니다. “메릴린치 역사상 가장 많은 면접을 거쳤을 것”이라 회고할 정도로 녹록지 않은 입사 테스트를 거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PB란 일종의 신사업을 이끄는 사람이에요. ‘사업에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가?’란 물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바로 그 답이 ‘전략’이에요.">
많은 직무 중 PB를 택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그 1년쯤 전부터 만기로 인해 구조 조정 기금이 아예 청산이 돼 버렸습니다. 회사 사정도 결국 어려워지면서 비전이 많이 어두워졌어요. 애초에 다음 스텝을 고민하던 차였는데 결심이 확고해졌습니다. PB는 발로 뛰는 영업이 베이스인 만큼 훨씬 롱런하며 끝장을 봐 볼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앞서 큰 도전을 이미 두 번씩이나 했으니 무서울 것도 없었죠. 원체 천성이 도전 자체를 즐기기도 하고요.
PB란 직무는 대중적으로 여전히 생소합니다. 어떤 역할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요.
가장 기본이 되는 역할은 ‘일대일 금융 어드바이저’예요. PB가 여타 자산 컨설팅 의견을 제시하면, 고객들이 그걸 참고해 판단을 내리죠. 가령 어떤 주식이나 펀드를 살지 말지, 사고팔 때 리스크는 무엇일지 등을 설명하고 조언해 주는 식입니다. 관련 자격증이 있다면 ‘1인 펀드매니저’마냥 자산을 위탁받아 직접 운용하기도 하고요.
고객한테 아무렇게나 조언하고 아무 상품이나 추천할 순 없잖아요. 그러니 기본적으로 공부가 늘 돼 있어야 합니다. 세상 흐름은 물론 특히 기업들 이야기도 속속들이 잘 알아야 하죠. 무엇보다 고객을 직접 확보해야 하니 영업 능력도 중요하고요.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무척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직 과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면접만 4번을 보셨다고요.
앞서 말했듯 PB는 고객 영업이 기본이에요. 그러다 보니 업계에선 ‘을’로 통합니다. 반면 펀드매니저는 ‘갑’이에요. 주식을 어디서 사고파느냐에 따라 수수료 수익이 달라지니 증권사들한테 갑으로 대우받죠. 갑으로 살다가 을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그쪽에서도 처음엔 절 못 미더워했어요. 나이는 많은데 영업이라곤 한 번도 안 해 봤잖아요. 그런 사람을 데려와 성공한 사례가 없었던 거죠.
때문에 잘할 수 있을지 증명하란 압박이 아주 심했습니다. 바짝 허리를 굽혀 본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라 저 스스로는 물론 자신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럴 듯하게 PT를 해도 반응이 계속 시원찮은 거예요. 끝끝내 의심을 거두질 않더라고요. 아마 제가 메릴린치에서 가장 많은 면접을 거쳐 영입된 사람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럼 면접관들을 어떻게 설득하신 건가요?
덮어놓고 불신을 하니 여간해선 뾰족한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쪽 마음에 있는 근본적인 짐을 아예 덜어줘야 결판이 나겠다 싶었죠. 그래서 대뜸 “6개월 안에 성과를 못 내면 알아서 나가겠다”고 선언했어요. 혹여 저를 잘못 뽑았을 때 따르는 책임이 면접관들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거 아녜요. 그러니 별수 있겠습니까? 손수 그 부담을 줄여 줄 밖에요. 그리 약속을 해 주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면접관들의 우려는 그야말로 기우에 그쳤습니다. 1년차 PB인 서재영님이 경력 10년 이상의 고참들을 제치고 입사 첫해 ‘최우수 PB’에 선정된 겁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2008년 BoA-메릴린치 합병, 2011년 우리투자증권의 BoA WM사업부 인수 등을 거쳐 오늘날 NH투자증권 체제에 이르기까지 서재영님은 20년간 이 타이틀을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명실상부 한국 최고의 PB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입사 만 1년도 안 돼 고참 PB들을 제치셨어요.
당시 기본급 기준으로 제 연봉이 가장 적었어요. 제 뒤로 들어온 사람들도 저보단 높았죠. 나중에 알고선 분통이 터져 엄청 항의했습니다. 아무튼, 그랬던 제가 입사 첫해 실적 2등을 했어요. 3월 입사였으니 2개월 손해를 보고도 말예요. 150만달러 이상을 벌어다 주는 PB한테 ‘최우수 PB’란 칭호가 붙는데, 저 말곤 딱 한 사람밖에 없더라고요.
그 비결이 무엇이었나요?
PB란 사실상 1인 창업자나 다름없습니다. 회사에 속해 있긴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고객이 절로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일종의 신사업을 이끄는 사람이나 마찬가진 거죠. 그럼 접근법도 달라야죠. ‘사업에서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인가?’란 물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겁니다. 바로 그 답이 ‘전략’이에요.
통상 PB의 생존 전략이라 하면 ‘고객 자산을 잘 관리하고 좋은 평판을 얻어 다른 고객을 소개받는다'고들 합니다. ‘고액 자산 관리 전문가'라고 하니 흔히들 ‘관리’에만 방점을 찍는 거죠. 허나 이건 허울 좋은 이론일 뿐입니다. 당장 맡을 자산이 없는데 무슨 관리를 합니까. 제 발로 찾아오는 고객은 원체 많지가 않아요.
때문에 역발상이 필요합니다. 저는 초반 1~2년은 아예 ‘관리를 제로로 하겠다'는 전략을 세웠어요. 관리와 영업, 두 마리 토끼를 둘 다 많이 잡을 순 없거든요. 복잡다단한 상품들도 많아서 보통 관리에 상당한 노력이 들어갑니다. 리소스의 90% 이상은 쓰이죠. 그럼 영업엔 고작 10%밖에 힘을 못 쏟게 됩니다. 이걸 뒤집어야죠. 리소스를 영업에 100%, 관리에 0%로 분배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애초에 관리가 별로 필요 없는 상품들만 취급했죠. 가령, 원금 보존 상품 같은 걸 말입니다. 동시에 제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만 집중했어요. 오로지 국내 기업 주식만 다뤘습니다. 제 평소 지론이 ‘현장에 답이 있다’거든요. 이 사람 저 사람, 이 기업 저 기업 직접 만나 회사 비전과 전략, 속사정을 속속들이 들여다 본 경우에만 고객들한테 추천했습니다. 반면 선물·옵션 등 제가 자신 없거나, 해외 주식처럼 직접 현장을 다닐 수 없는 분야는 일절 취급하지 않았어요.
프로의 세계에선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안 통하잖아요. 축구랑 농구 둘 다 선수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철저히 자기 필드 안에서만 승부를 보죠. 여하간 이렇게 리소스를 세팅해 놓고 달렸더니 나름의 성과들이 났던 거예요. 일주일 내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국을 다 돌며 늘 사람을 만났고, 덕분에 다른 PB가 고객 1명을 만날 때 저는 그 다섯배, 열배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20년째 최정상급 현역으로 활동 중입니다. 정상에서의 롱런이란 무척 어려울 텐데요.
매해 실적에서 늘 3등 안에는 들었어요. 어쩌다 한 번 불쑥 올라온 사람들은 있었지만, 꾸준한 사람은 거의 못 봤죠. 여기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껴요. 사실 대단한 비결이 있었다기보단 꾸준한 진정성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PB를 하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줘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헌신이 진짜인지 껍데기인지 고객은 다 간파하거든요. 일례로, PB 첫해인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매달 첫 수요일에 함께 점심을 먹는 제약사 회장님이 있어요. 여지껏 제 고객인데 사정이 생기면 날짜를 바꿔서라도 어떻게든 꼭 만나죠. 고객과 소통하길 정말 즐기고 좋아하지 않으면 쉬이 지켜 올 수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진정성 못지 않게, 아니 사실 더욱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결국 모든 게 비즈니스란 점입니다. 아무리 고객과 가까워져도 그 목적이 우정 쌓기는 아니잖아요? 저 역시도 오랜 고객이 절 버리고 다른 데 가는 일이 더러 있어요.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 마냥 꿈만 있는 직업이 아닌 거예요. 그리고, 이게 제가 확실히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분야에 더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객을 붙들려면 PB 스스로가 가장 자신하는 좋은 정보를 주고 돈을 벌 가능성을 최대한 높여 줘야 하니까요. 같은 맥락에서 이런 제 투자 스타일과 어긋나는 고객은 구태여 받지 않거나 미련 없이 헤어집니다. 대신 제 철학을 믿어 주는 분들을 위해 제 스타일대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서재영님/리멤버
Chapter 4.
국내 최고 '성장주 투자' 대가, 현장에서 혁신을 꿰뚫다
$[서재영님에겐 ‘국내 성장주 투자의 대가'란 또 다른 별명이 있습니다. 신인 PB 때부터 줄곧 “성장이 없는 주식은 의미가 없다”는 철학을 고수하며 국내 유망 스타트업이나 세계 수위권 활약을 펼치는 혁신 기업 투자에 주력해 왔기 때문입니다.]
성장주 투자를 강조해 오셨습니다.
성장주가 아닌 곳엔 아예 관심을 둬 본 적이 없어요. 자연히 투자도 별로 해 본 적 없죠. 가령 은행주들을 보세요. 십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가가 거의 비슷하잖아요. 투자의 본질은 돈을 버는 겁니다. 이미 성장이 마무리됐거나 겨우 유지 정도 하는 기업들은 큰 주가 상승을 기대하기 어려워요.
일각에선 리스크가 큰 투자법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합니다.
위기 때면 어느 기업이든 저마다 크고 작은 곡절을 겪어요. 그런데 그 이후 전개는 성장하는 기업이냐 아니냐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대개 성장치 않는 기업 주식은 오래도록 지지부진해요. 어쩌면 영원히 안 올라올 수도 있고요.
하지만 성장주들은 다릅니다. 언젠가라도 반드시 올라오게 돼 있고 상승세도 훨씬 좋습니다. 물론, 그 성장주가 진짜 성장주가 맞다는 전제에서의 얘기예요. 그 판단이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워 무진장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다니는 거죠. 지금껏 직접 다닌 기업 현장만 1000곳이 거뜬히 넘을 겁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투자 철학은 서재영님의 투자 관련 저서들에도 꾸준히 반영돼 있습니다. ‘한국의 SNS 부자들'(2019), ‘AI 퍼스트'(2021), ‘웹 3.0 라이브씬'(2022), ‘글로벌 1등 K-기업’(2024) 등 서재영님이 집필한 책들은 모두 그가 현장에서 만나 직접 취재한 기업 CEO나 핵심 실무진의 이야기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저서마다 기업 내부 이야기를 충실히 담아낸 게 인상적입니다.
기업의 성장성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밸류를 판단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가, 실적 같은 단순 탁상 데이터만으론 그 판단이 불충분합니다. 때문에 ‘스토리’를 보려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그 기업이 어떤 위기를 겪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리더는 어떤 비전과 철학으로 기업을 이끌어 가는지 진솔히 보고 듣는 거죠. 이 과정들이 저로서도 무척 공부가 돼요. 하물며 일반 투자자들한텐 좀더 큰 도움이 되겠죠. 비전문가가 직접 기업과 교류하며 이야기를 듣기란 어렵잖아요.
그만큼 책의 가치엔 자신 있는데 작업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에요. 이번 신간이 유독 더 그랬습니다. ‘세계 무대에서도 1등으로 매출을 일으키는 국내 혁신 기업들을 소개해 보자’는 취지의 책인데, 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디다. 일단 만남 자체가 어려운 곳들이 많았어요. 기술 유출이 우려된다는 둥 나름 이해할 법한 이유도 있었지만, PR 관점의 역량이나 인식이 아쉬운 곳들이 상당수였죠. 애초에 홍보실이나 유관 부서가 없는 회사도 여럿인 데다, “B2B 기업이니까 이 책에 소개돼도 별도움될 게 없다”는 사유로 거절한 경우도 있었어요. 언론이든 출판 쪽이든 비슷한 책이 나오지 못한 이유가 있던 거예요.
전작들과 비교해 신간에선 관심의 초점이 미묘하게 달라진 듯합니다. IT 플랫폼 등 신생 부문에 초점을 맞춘 전과 달리 이번엔 각 분야별 1등 기업들에 포커스를 두셨어요.
우리 벤처 부문이 어렵긴 어렵습니다. 특히 플랫폼 분야가 녹록지 않아요. 거대 공룡들이 워낙 꽉 잡고 있어 이들과 경쟁하기란 너무 버거운 상황이죠. 예전처럼 아주 순조로운 환경은 아닌 것 같아요. 때문에 성장성이 크고 확실한 글로벌 1등 기업들에 전반적인 투자 선호가 높아지는 게 사실이지만, 그 1등 기업들이 꼭 해외에만 있는 건 아님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아마 한국에서 세계 1등 하는 기업을 대라면 다들 서너개도 못 댈 거예요. 대중은 물론 정부나 증권사 전문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 집필 때 제가 찾은 곳만 50군데에 달했어요. 1등임에도 대부분이 존재조차 모르는 우리 기업들이 이토록 많은 겁니다. 물론 사정상 제 책엔 절반 정도만 실었지만, 모쪼록 이 기업들이 충분히 조명받았으면 해요. 가뜩이나 국내 내수 시장이 자꾸 줄어드는 판국이니 글로벌 경쟁력까지 확실히 갖춘 우리 기업들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내 유망 기업들 사이에선 “투자자와 가장 잘 다리를 놓아주는 PB”로 통합니다.
애초에 고객들부터가 대부분 기업가들이에요. 남들처럼 고소득 전문직 고객은 거의 없죠. 일도 고객도 집중화 해 놓은 겁니다. 그러다 보니 열정 넘치는 젊은 기업가들을 만나 이야기도 자주 나누게 되고 이들의 비전이나 고민도 잘 듣게 됩니다. 때문에 필요하고 괜찮으면 투자자들과도 곧잘 연결해 도움을 주려 하죠.
그간 책을 열심히 쓴 주된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고요. 우리 유망 기업들에 젊은 분들이 많이들 취업했으면 하거든요. 성장세가 크다 보니 여기저기 투자할 데도 많고 그만큼 인력 충원도 필요한데, 회사 실력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다 보니 구인이 좀처럼 쉽지가 않거든요. 이런 기업들이 충분히 알려져 기업과 구직자 모두가 윈윈하길 바랍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서재영님/리멤버
Chapter 5.
샐러리맨 신화 쓴 연봉킹 PB, 그의 '인생 투자 철학'은?
$[20년간 정상을 지킨 국내 최고 수준의 PB답게 서재영님은 업계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아 온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장보다 더 높은 연봉을 타는 건 예삿일이고 매해 빠짐없이 10억원 이상의 연봉을 받아 근로 소득으로만 무려 200억원을 벌었죠. 가히 '금융계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릴 만합니다.]
<"프로란 자신을 위한 최고의 투자 전략을 세울 줄 아는 사람">
업계 안팎에서 ‘연봉킹 PB’로 통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좋은 별명인진 모르겠습니다. 세상엔 남 잘되는 걸 배 아파하는 사람도 많은 법이니까요. 때문에 늘 조심하고 겸손을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더구나 아무리 잘해 왔어도 한번 삐끗하면 언제든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게 PB거든요. 전부 1년 단위 계약직들입니다. ‘얼마나 잘했느냐’보단 ‘앞으로도 잘할 거냐’가 훨씬 중요한 직무이기에 거의 작은 기업을 일구는 수준으로 늘 어렵단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늘 잘해야만 하는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게 제법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맨처음에 ‘헝그리 정신’ 얘길 했잖아요. 환경엔 늘 양면성이 있어요. 어려움도 있지만 나름의 선물도 있는 법이죠.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업계나 회사가 자기 실적과 성취를 아주 제대로 들여다 봐 준다는 얘기도 되거든요. 여전히 제 실력이 통하고 제 쓰임이 다하는 날까지 사력을 다해 제 가치를 증명해 나가고자 합니다.
/아시아경제
승진엔 욕심이 없으신 듯합니다. 계속 상무 자리에만 머물러 계세요.
‘승진을 거부하고 있다’는 의미로 전달돼선 안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전무 제안을 예전에 몇 차례 받긴 했지만, 앞으로도 똑같은 기회가 주어진단 보장은 없거든요. 승진은 윗 사람이 결정하는 거잖아요. 현 사장님 의지가 어떨진 모르는 거죠. 때문에 제 의사만으로 승진을 안 하고 있단 뉘앙스가 부담스럽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감사한 제안이 다시 온다고 해도 제 결론은 같긴 할 겁니다. 저는 언제까지고 현장에 계속 남고 싶어요. 여전히 바닥 실무가 좋지 관리는 영 안 끌리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대리급과 똑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피터 린치’로도 불립니다. 업계 구루로서 본인만의 투자 철학은 무엇인가요?
저는 ‘역발상’을 강조합니다. 가령, 위기가 터지면 전문가들은 대개 “현금을 들고 있으라" 조언합니다. 아마 대다수가 그 말대로 현금을 들고 있겠죠. 그럼 사실 그때가 무조건 바닥인 거예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기는 어쩌면 기회이기도 한 셈입니다. 제가 늘 그랬어요. 1997년 IMF든 2008년 금융 위기든 2020년 코로나 사태든 매번 투자 실적이 크게 좋았습니다.
다만, 그 기회를 감으로만 살리긴 힘들 겁니다. 제가 다소 벙벙한 글로벌 매크로 대신 구체적 산업과 기업 공부에 매진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성장성을 정교히 판단하려면 본인부터가 그 산업과 기업을 잘 알아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투자는 스스로의 열정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모든 분야를 다 파고들지 않아도 돼요. 자기 전문성과 유관한 분야를 진정성 있게 들여다 보면 어느새 또렷한 눈이 생길 겁니다. 금융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거예요.
동종 업계 후배들한테 해 주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PB의 일이 녹록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다들 워낙 파리 목숨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나름 위안인 게 있다면 바로 시대가 크게 변했다는 점입니다. 은행에만 돈을 맡기던 시대는 거의 저물었잖아요. 끽해야 인플레율 정도밖에 수익이 안 나니까 젊은 사람들도 예금 대신 일찍부터 투자를 배우고 익히죠. ‘저축의 시대’에서 ‘자산 관리의 시대’로 대전환이 일어난 겁니다. 때문에 지금보다 시장도 엄청나게 더 커지고, 그 과정에서 PB란 직무도 날이 갈수록 더욱 각광받을 겁니다. 그럼 실력을 착실히 쌓은 사람들한텐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기회도 주어지겠죠.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서재영님/리멤버
서재영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프로란 자신을 위한 최고의 투자 전략을 세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는 일평생 직장이 아닌 직무로 제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사람입니다. 메릴린치냐 NH투자증권이냐 등 간판이 뭐냐보단, 금융인으로서 얼마나 실력을 보여 주느냐가 늘 관건인 삶이었죠. 헌데 요즘은 이게 그리 유다른 삶이 아닙디다. 이젠 대다수 직무자가 소속이 아닌 실력으로 존재 가치를 보여야 하는 시대가 됐어요.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성장'이 화두인 시대이기도 합니다. 성장을 위해선 본인 투자를 게을리해선 안 되죠. 경험이 필요하면 개 발에 땀 나듯 현장을 돌아다니고, 공부가 필요하면 학원이든 학교든 더 다녀야죠. 학위가 필요하면 대학원에도 가야 할 거고요. 하지만 그에 앞서 가장 명심해야 할 게 있어요. 바로 그 모든 걸 다 완벽히 이뤄낼 순 없다는 겁니다. 자원은 누구에게나 늘 한정적인 법이에요.
그래서 결국 '전략'이란 게 필요합니다. 주식이나 펀드에만 투자 전략이 있는 게 아니라, 개인의 성장을 위해서도 알맞은 투자 전략이 있는 거죠. 현 시점의 자기 우선순위를 파악하고, 뭘 취하고 버릴지 냉철히 판단해야 합니다. 적시의 타이밍에 결단도 잘 내려야 하고요. 그래야 실기하지 않고 선택과 집중에 주력할 수 있어요. 자신만의 대체 불가한 역량은 바로 그 과정에서 길러지는 겁니다.
돌이켜보면 제 인생 역정도 참 녹록지만은 않았습니다. 악조건을 다 꼽으라면 날밤을 새도 모자랄 수 있어요. 하지만 인생이란 투자 판은 애초부터 많은 자원을 가진 사람이 꼭 성공한다기보단, 각자의 기회와 포텐셜을 누가 얼마나 더 잘 살리느냐의 게임인 것 같아요. 모쪼록 각자의 길 위에서 저마다의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모두를 응원합니다. 꼭 '성투'하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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