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일

3전 4기 뽀로로 아빠! 국산 창작 애니메이션의 신화를 쓰다

2024. 8. 27.

최종일-뽀로로-타요-해모수
최종일-뽀로로-타요-해모수
최종일-뽀로로-타요-해모수

최종일

애니메이션 제작사 아이코닉스의 설립자이자 대표입니다. 1991년 금강기획에 입사하며 광고계에 입문, 1996년부턴 신사업을 기획하며 애니메이션 제작 경험을 쌓았습니다. 2001년 아이코닉스 설립 이래 ‘뽀롱뽀롱 뽀로로’ ‘꼬마버스 타요’ 등 다수의 히트 애니메이션을 탄생시켜 “순수 창작 애니메이션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신화를 써낸 인물”로 평가됩니다.

펭귄·북극곰·비버… 얼음 나라에 사는 동물 절친들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티격태격 소동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내 또 서로를 아껴주며 더욱 친해지죠. 여느 유치원 풍경과 다를 바 없는 이 평범하고 소박한 동물 친구들의 이야기가 전 세계 어린이를 사로잡으며 ‘뽀통령’을 탄생시켰습니다.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은 베테랑 애니메이션 제작자이자 만화 ‘뽀롱뽀롱 뽀로로’의 기획자 최종일님입니다.

그가 탄생시킨 건 뽀로로뿐만이 아닙니다. ‘꼬마버스 타요’ ‘태극천자문’ ‘치로와 친구들’ ‘띠띠뽀띠띠뽀’ 등 어른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인기 애니메이션이 모두 그의 손끝에서 탄생했죠. 뽀로로 하나만으로도 브랜드 가치가 9000억원에 육박하니 그의 회사 아이코닉스는 가히 ‘애니메이션 업계의 삼성전자’로 불릴 만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패할 결심’이에요. 실패해도 포기만 않으면, 우린 성공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거니까요.”>

잘나가던 10년차 ‘광고쟁이’가 창작 애니메이션 세계에 발을 들인 건 IMF 외환 위기 무렵. 번듯한 광고사를 돌연 관두고 창업에 나서자 모두가 “미쳤냐”며 말렸지만 아무도 막지 못했죠. 퇴사를 만류하던 대표님한테까지 도리어 투자를 받아내며 보기 좋게 기세를 올립니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신출내기 창업자를 기다린 건 연이은 실패. ‘포켓몬스터’ ‘드래곤볼’ 등 쟁쟁한 경쟁작들에 밀려 수십억 투자금을 날리는 불운을 맛보죠. 그럼에도, 3전 4기 끝에 ‘뽀로로'란 독보적 캐릭터를 탄생시키며 그의 인생 만화는 전개를 뒤집습니다. 과연 실패를 성공으로 뒤바꾼 최종일님만의 저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그의 만화 같은 커리어 여정을 ‘뽀통령’의 흥미로운 탄생 비화와 함께 생생히 담아봤습니다.

성남 판교의 아이코닉스 사옥에서 만난 최종일님/리멤버

Chapter. 1
잘나가던 10년차 광고맨이 애니메이션에 빠진 사연?!

$[‘뽀로로 아빠’의 첫출발은 자동차 광고맨이었습니다. 최종일님은 1991년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 같은 해 현대그룹 광고 계열사 금강기획에서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초반 5년간은 현대차 브랜드 광고 기획을 전담합니다.]

어려서부터 만화를 좋아하셨다고요.

중학교 때까진 만화 가게에 살다시피 했어요. 만화 영화도 즐겨봤고요. 작품 저마다에 담긴 왠지 모를 멋과 낭만이 좋더라고요. ‘우리나라는 어쩜 이렇게 만화를 잘 만들까?’ 늘 감탄했죠.

그런데 하루는 제가 TV로 '마징가Z'를 보고 있는데 옆에서 친구가 “그거 일본 만화야” 그러는 거예요. 저는 “말도 안 된다. 주인공 이름이 ‘쇠돌이’인데 어떻게 이게 일본 만화냐”고 그랬죠. 나중에 알고 보니 '마징가Z'뿐 아니라 '허리케인 죠' '베르사유의 장미' 등이 죄다 일본 만화인 거예요. 나중에 알고 어찌나 배신감이 들던지요. (웃음)

신방과에 진학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원래 그림 그리는 것도 워낙 좋아해 고등학교 땐 진지하게 미대 진학을 고민했어요. 그런데 부모님께서 웬일인지 다른 선택을 권하시더라고요. 그 전이든 후든 제 진로에 별다른 간섭을 않는 분들이셨는데 그때만 유독 그러셨죠. 그 뜻을 존중해 미대 진학은 포기했습니다. 이후 차선으로 택한 게 신방과였어요. 당시 저널리즘에 대한 로망도 좀 있었거든요. 사회 부조리를 파헤치고 정의를 구현하는 언론의 사명이 가슴 뛰더라고요. 

하지만 광고 대행사에 들어가셨어요.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공부를 안 했습니다. (웃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언론 고시'라 불릴 만큼 언론사 입사 시험이 어렵고 경쟁이 치열했잖아요. 그런데 전 열심히 놀았거든요. 무엇보다 기자란 직업이 그다지 낭만적인 직업은 아니란 것도 알게 됐어요. 거친 일도 많고 부조리에 물들기도 쉽다는 걸 깨달은 거죠.

대신 눈을 돌린 게 광고 회사였습니다. 아무래도 광고는 창의력을 중시하는 곳이잖아요. 자유로운 제 성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 매력적으로 보였죠. 기본적으로 뭐가 됐든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건 잘할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원해 들어가게 됐어요.

$[최종일님은 입사 6년차인 1996년부터 신사업팀에 근무하며 애니메이션 사업에 첫발을 떼게 됩니다. 이듬해 KBS에서 방영된 ‘녹색전차 해모수’가 그 첫번째 결과물이었죠. 캐릭터와 시나리오까지 직접 기획한 작품으로 국내에서 나름 인기를 얻고 일본으로까지 수출됐지만 사업적으론 부진했습니다. 끝내 손익 분기점을 넘지 못하고 제작비 30%에 달하는 적자를 남긴 겁니다. 그 다음 작품인 ‘레스톨 특수구조대’(1999)도 마찬가지로 기술적 완성도는 인정받지만 흥행 면에선 실패에 그치고 맙니다.] 

애니메이션 사업엔 어떻게 참여하시게 된 건가요?

광고 기획자로서 5년간 근무하며 사실 회의감을 크게 느꼈어요. 기본적으로 광고는 광고주를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거잖아요. 당연히 저보단 광고주 의견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애초에 제가 광고 회사에 들어간 건 저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대중과 직접 소통하고 싶어서였거든요. 생각했던 바와 전혀 다른 부분도 있단 걸 깨닫게 되면서 생각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물론 돌이켜보면 이때 배운 전략적 사고나 시장 분석법, 기획력 등이 성장의 밑거름이 된 건 맞아요. 하지만 당시엔 하루하루가 그저 답답하기만 했어요. 때문에 원래는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이미 머리 속이 애니메이션으로 가득해 그쪽 계통으로 이직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어찌 아셨는지 인사팀장님이 “기획조정실에 보내줄 테니 거기서 너 하려던 거 맘껏 구상해 봐”라고 하시는 거예요. 고민 끝에 이직을 단념하고 기조실로 가서 애니메이션 사업을 기획하게 된 거예요.

/'녹색전차 해모수'(제작 대원동화·금강기획, 채널 KBS), '레스톨 특수구조대'(제작 KBS·금강기획·서울무비, 채널 KBS)

왜 애니메이션이었나요?

그때만 해도 국산 창작 만화가 거의 없었어요. 1년에 한두 편 나오는 정도였죠. 오히려, 불모지니까 시작만으로도 승산이 생기는 거라 생각했어요. 게다가 당시 한국은 미국, 일본에서 만화를 하청받아 애니메이션을 엄청 제작하고 있었거든요. 집 짓는 기술은 이미 훌륭하니까 설계만 잘하면 완벽할 것 같았죠.

‘녹색전차 해모수’ ‘레스톨 특수구조대’ 모두 작품적 평가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론 실패였어요.

사실 성공이냐 실패냐의 기준은 다양해요. 둘 다 작품성은 물론 흥행 면에서도 나름 성과가 있었어요. 특히 ‘녹색전차 해모수’는 시청률이 굉장히 높았죠. 90년대 초반생들은 지금도 많이 기억할 정도로요. 하지만 사업적인 면에선 실패가 확실했습니다. 투자비를 회수하지 못했거든요. 애니메이션은 결국 상업용 콘텐츠니까 총체적으로 따져 보면 실패가 맞습니다. 

현실을 잘못 파악한 게 문제였어요. 해외 제작 수주가 많은 걸 단순히 ‘우리 실력이 좋으니 인정받는 것’이라 해석한 게 패착이었죠. 설계만 잘하면 완벽할 것 같았지만, 막상 그 ‘설계’가 가장 어렵더라고요. 설계만 잘하면 집 지을 곳은 어디든 많았던 거예요. 실패는 쓰렸지만 이때 경험으로 얻은 게 굉장히 큽니다. 이때부터 ‘한국에서도 ‘프리 프로덕션’(설계)이란 걸 제대로 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자’는 결심을 세웠거든요.

성남 판교의 아이코닉스 사옥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종일님/리멤버

Chapter. 2
IMF 때 나선 애니메이션 창업… 그러나 거듭되는 실패

$[1997년 말 금융 위기가 터지면서 금강기획은 신사업을 줄줄이 정리합니다. 그 과정에서 애니메이션 사업부도 해체되죠. 2001년, 최종일님은 결국 사표를 던지고 앞서 구조조정된 해당 사업부 동료들과 애니메이션 기획사 ‘아이코닉스’를 설립합니다.]

<"실패가 쌓인다고 성공을 담보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실패가 쌓이면 성장은 담보할 수 있어요.">  

IMF 사태 여파로 창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한창 마음이 달아올랐던 애니메이션 사업이 정리됐어요. 다행히 저는 구조조정을 면하고 기조실로 복귀 발령이 떨어졌지만 마음이 좀처럼 안 잡히더라고요. 결국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퇴직 처리된 동료들과 제대로 한번 애니메이션 사업을 해보자고 의기투합을 했죠.

당시 사장님까지 나서서 극구 말렸습니다. 이 엄동설한에 퇴사는 무슨 퇴사냐시면서요. 그래도 하겠다니까 대뜸 기획안을 써서 가져와 보래요. 그래서 기획안을 드렸더니 갑자기 태도가 바뀌셨습니다. “한번 해 봐라. 내 투자금도 받아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엉겁결에 투자금 2억원을 받았습니다. 사무실도 그대로 쓰게 해주셔서 2달간 무상 임대도 받았죠. 그렇게 저 포함 5명이서 총 자본금 5억원으로 창업했습니다.

처음엔 벤처 승인도 쉽지 않았다고요.

저희가 하려던 사업은 ‘메인 프로덕션’(집 짓기)이 아닌 ‘프리 프로덕션’(설계)이었어요. 쉽게 말해 애니메이션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캐릭터를 기본 디자인하고, 콘티를 짜는 일이었죠. 그런데 한국이 워낙 이쪽의 불모지니까 업계의 이해도가 현저히 낮았어요. 

오죽하면 벤처 승인 심사 때 한 관련 학과 교수님이 오셨는데, “그림 그리는 사람 하나 없는데 이게 무슨 애니메이션 회사냐”고 따질 정도였죠. 그래서 탈락했어요. 그 뒤 다른 방법으로 벤처 승인이 났지만요. 애니메이션 산업의 본질을 교수님들조차 이해하지 못한 때였던 거예요.

$[우여곡절 끝 창업엔 성공했지만 또다시 실패가 이어집니다. 2003년, 20억원을 투자해 야심차게 준비한 ‘수호요정 미셸’이 망한 겁니다. 수준 높은 완성도로 호평도 받고 중국과 미국에 수출되는 등 나름의 성과는 있었지만, ‘포켓몬스터’와 같은 인기작과 동시기 방영되는 불운이 겹치며 막대한 적자를 기록하게 됩니다.]

“흥행 실패보단 기획자로서의 소신을 못 지킨 점이 더 후회스럽다”고 회고하셨어요. 어떤 이유인가요?

‘수호요정 미셸’은 지금도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매드하우스’가 제작에 참여했던 작품이에요. 당시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쿄에 가서 제작 회의를 했는데, 그때마다 거기 대표님과 의견이 크게 엇갈렸습니다. 스토리나 캐릭터 개성을 잡는 부분에서 좀처럼 이견이 안 좁혀지더라고요.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분인 데다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업계 대선배이다 보니, 그분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고 난감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매드하우스를 배제하고 독자적으로 작업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러자 국내 공동 제작사 쪽에서 제동을 걸었습니다. 만일 매드하우스가 빠지면 자기들도 제작을 그만두겠다고요. 결국 제가 굽힐 수밖에 없었어요. 그 결과 제 생각과는 다소 다른 결의 작품이 돼 버렸습니다.

만약 제 뜻대로 만들었다면 잘됐을까요? 당연히 그런 보장은 없죠. 그럼에도 자꾸만 실패에 핑계를 대고 있더라고요. ‘내 의견대로 했으면 성공에 좀더 가까웠을 것 같은데...’라면서 말이죠. 근데 그리도 확신이 있었다면 끝까지 소신을 지켰어야죠. 그럴 배짱도 없었으면서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 못하는 제 모습이 너무 비겁하더라고요. 결국 핵심 기획자는 저였고 결정의 책임도 제가 지는 게 맞잖아요. 이 일을 통해 그걸 정말 아프게 배웠어요. 다음 기회가 있다면 아무런 후회가 없도록 온전히 내 의지대로 해보자 결심했죠.

연이은 3번의 실패, 그럼에도 사업을 지속합니다.

정말 대차게 말아먹었죠. 어휴, 어려움이 왜 없었겠어요. 근데 저는 실패로 인한 최악의 경우들을 나름 구체적으로 떠올려 보고 창업에 나선 거였어요. '만약 파산해서 집도 차도 잃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래, 일단 작은 월셋집에 살면서 중고 1톤 트럭을 하나 사자. 가락 시장에서 100만원어치 채소랑 과일을 떼다가 파는 거야... 까짓거 나쁘지 않은데?’ 이렇게 제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플랜B’를 마련해 놨어요. 

사실 ‘무조건 성공해야 해!'란 자세로 임했다면 못 버텼을 거예요. 실패해도 얼마든 괜찮다는 마인드였으니 버텼던 거죠. 물론 실패가 쌓인다고 성공을 담보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실패가 쌓이면 성장은 담보할 수 있어요. 경험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분명 다를 거라 믿고 거기에 베팅했던 것뿐입니다.

성남 판교의 아이코닉스 사옥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종일님/리멤버

Chapter. 3
3전 4기 끝 대성공, 뽀로로 아빠가 되다!

$[세번째 실패의 아픔이 채 가시기 전인 2003년 11월, EBS에서 대망의 ‘뽀롱뽀롱 뽀로로’가 첫 방영됩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초통령’의 자릴 차지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뽀로로가 탄생한 순간이죠. 국산 애니메이션의 신화가 된 뽀로로의 대성공엔 '앞선 실패들로부터 얻은 교훈과 치밀한 전략’이 있었습니다.]

<"개발자로서 제 관심은 '얼마나 어려운 개발을 해냈느냐'보단 오직 '얼마나 쓰임새 있는 개발을 해냈는가'에 있었어요.">

뽀로로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요?

실패들로부터 나온 성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빈말이 아닙니다. ‘수호요정 미셸’이 왜 실패했을까를 한참 고민하고 공부하던 때였어요. 프랑스 칸에서 한 애니메이션 사업 바이어를 만났는데, 그분이 ‘수호요정 미셸’을 평하길 “완성도는 좋지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이 아니다. 이야기가 너무 철학적이다”라는 거예요. 그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어요. 아이들은 즐거우려고 애니메이션을 보지, 철학적 사유를 하려고 보는 게 아니잖아요. 먼저 아이들의 눈높이를 철저히 고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거죠.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단 생각에 너무 매몰돼 있던 거예요.

한국으로 돌아와 바로 동시기 경쟁작들을 살펴봤습니다. ‘포켓몬스터’ ‘드래곤볼’ ‘세일러문’... 솔직히 제가 봐도 재밌었어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을 깊이 공부했어요. 그랬더니 구조적 차이가 보였습니다. 우리나라가 1년에 1~2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일본은 100편 이상을 만들고 있더라고요. 안에서 먼저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거기서 살아남은 작품들이 전 세계에 팔려 나가고 있던 거죠. 우리가 70점 맞다가 80점 맞았다고 기뻐할 게 아니었던 거예요. 일본에선 80점짜리여도 꼴찌일 수 있었으니까요. 그제야 현실이 보였습니다. 

경쟁작들을 물리칠 그 복안이 무엇이었나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일본 애니메이션을 공부하다 보니 그 약점이나 한계도 보이더라고요. 일단 너무 경쟁이 치열하니까 그만큼 자극적이에요. 애들이 보기엔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장면이 많았죠. 그러다 보니 타겟 연령대가 아동에서 청소년, 넓게는 성인까지인 경우가 많더라고요. 즉, 유아만을 타겟으로 한 애니메이션은 드물었던 거죠.

그럼 유아용 애니메이션의 선두주자는 누구이냐? 바로 미국이나 유럽이에요. 하지만 여긴 생각보다 ‘노잼’입니다. 지나치게 교육적이거든요. 저는 이미 앞선 실패로 너무 교육적이고 어려우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잖아요. 그래서 즐거움이 주가 되고 하나도 어렵지 않은 건전한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자는 전략이 나온 거죠. 여기서 탄생한 게 바로 뽀로로였습니다.

‘뽀롱뽀롱 뽀로로’ 8기의 콘티 속 일부 장면/본인 제공

3전 4기의 도전이었습니다. 성공을 예상하셨나요?

사실 진짜 첫방송은 2003년 11월이 아닌 6월이었어요. EBS 창사 기념일 특집으로 초기 에피소드 4편이 먼저 나갔죠. 국산 애니메이션이 흔치 않던 시절이잖아요. EBS에서 그 의미를 높게 사서 특집으로 한번 내보자고 제안을 줬던 거죠. 그때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약간의 기대는 있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제게 자신감(?)을 심어준 건 우리집 아이들의 반응이었어요. 그때 저희 첫째가 7살, 둘째가 4살이었거든요. 평소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얘네들이 “아빠가 만든 만화 보여줄까?” 하면서 제가 만든 애니메이션을 틀어놓을 때가 종종 있었어요. 보통 3분이면 다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데, 뽀로로는 다르더라고요. 저희 아이들은 물론 친구들까지 계속 집중하면서 눈을 안 떼고 보는 거예요. 성공 예감까진 아니었고, 뭔가 아빠로서 계속 풀지 못한 숙제가 있는 듯해 찜찜했는데 그걸 푼 기분이었어요.

$[뽀로로는 대성공이었습니다. 현재까지 총 8편의 시즌이 방영돼 거의 매편마다 애니메이션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명실상부 한국 대표 애니메이션이 됐죠.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전 세계 200여 개국에서 17개 언어로 더빙돼 방영 중입니다. 국내외 뽀로로 관련 상품의 연간 매출만 1조원에 육박하는데요. 최종일님은 ‘뽀롱뽀롱 뽀로로’ 속 캐릭터와 콘셉은 물론, 에피소드별 시나리오까지 모두 직접 기획해 내면서 자타공인 ‘뽀로로 아빠’로 불리고 있습니다.]

왜 하필 펭귄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들었나요?

동물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캐릭터가 사람이면 지역적 특성이 반영되기 쉽잖아요. 그럼 국내 시장을 넘어서기가 힘들어요. 한국에서의 성공만으로는 제작비 회수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초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뒀어요. 보편성이 크고 상품화에도 더 적합한 디자인이 나오는 동물이 사람보다 더 좋겠다고 봤죠. 

동물 캐릭터를 잡는 데 2가지 조건이 있었어요. 첫째,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이어야 한다. 둘째, 기존 애니메이션에서 다뤄지지 않은 동물이어야 한다. 리스트를 쭉 뽑아 놓고 조건에 맞지 않는 동물들을 지워 나갔어요. 고양이나 강아지, 토끼 같은 게 줄줄이 배제됐죠. 그러다 끝까지 남은 몇몇 중 가장 눈에 띈 게 바로 펭귄이었어요. 일단 아이들이 무척 좋아하잖아요. 새인데도 하늘을 못 날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모습이 제게도 너무 좋았고요. 마치 아이들 같아서요. 그래서 펭귄이 주인공으로 낙점된 거예요.

‘뽀롱뽀롱 뽀로로’의 주요 캐릭터들. 책상 맨왼쪽부터 에디(사막여우)·뽀로로·크롱(공룡)·루피(비버)·패티(펭귄). 책상 위엔 해리(벌새). 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주고 있는 북극곰이 포비/EBS

이름도 직접 지으셨다고요.

고민을 정말 많이 했었어요. 몇 날 며칠 이름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아이들한테 “쪼르르 다니지 마”라고 잔소리하는 거예요. ‘잠깐만, 쪼르르?!’ 어감이 주인공과 너무 잘 어울리더라고요. 그래서 갖다붙였어요.

‘쪼르르’가 아니라 ‘뽀로로’가 된 이유는요?

저 나름의 캐릭터 작명 원칙이 있었어요. 잘된 애니메이션에선 동물과 캐릭터 이름의 첫 이니셜을 맞추는 경우가 많아요. 가령, 미키 마우스는 M(Mickey-Mouse), 도덜드 덕은 D(Donald-Duck)로 맞췄죠. 저도 그 공식을 따르고 싶어서 펭귄의 P를 앞에 넣은 거예요. 거기서 좀더 동글동글 굴러가는 느낌을 살리다 보니 최종적으로 ‘뽀로로’가 됐습니다. 

지금까지도 시나리오를 주도해 집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초기 시나리오들은 거의 다 저 혼자 썼고, 지금도 절반 이상은 제가 직접 씁니다. 시나리오만큼은 제가 꼭 총괄하고 꼼꼼히 살펴요. 뽀로로는 캐릭터부터 이야기, 심지어 주제가까지 ‘유아들이 고민 없이 즐겁게 볼 수 있다’는 일관된 원칙 아래 제작됐어요. 이 기획 의도를 가장 잘 알고 모든 영역에 유기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 저니까, 힘들더라도 직접 만들고 있는 거죠. 그게 꾸준한 성공 요인 중 하나라고 보기도 합니다.

시나리오 구상은 주로 어떻게 하시나요?

시나리오 작업을 어떻게 하는지 많이들 물어보시는데, 가장 영감을 받는 건 책이에요. 아이들이 보는 세계 명작 동화, 특히 그림 동화를 종종 챙겨 보면서 스토리텔링을 구상해요. 사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은 글밥이 많지 않잖아요. 그림만 봐도 충분히 이해가 돼야 하죠. 저희 애니메이션 역시 영상만으로도 아이들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재밌어야 한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고요. 같은 맥락에서 주제가 가사도 제가 직접 썼어요. “노는 게 제일 좋아~”로 시작하잖아요. ‘우리는 가르치는 게 아니야, 우리 지금 노는 거야~’라고 시작부터 아이들한테 알려주는 거죠.

뽀로로뿐 아니라 다른 캐릭터도 인기예요. 특히 ‘잔망 루피’라는 밈 때문에 루피가 엄청 떴죠. 유아뿐 아니라 어른이 된 MZ 세대한테도 인기입니다.

처음엔 내부 염려도 많았어요. 캐릭터성을 훼손(?)하는 거 아니냐고요. 루피는 굉장히 착한 캐릭턴데 잔망스럽다니! 근데 저는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보는 사람이거든요. 그게 다 뽀로로를 향한 애정과 관심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놀 판을 깔아주자고 했어요. 다양한 놀거리를 기획해 제공했고 그게 통한 것 같아요.

그리고, 한편으론 이런 감회도 느껴요. 어느덧 뽀로로가 스무살이 넘었잖아요? 처음 뽀로로를 보고 자란 친구들이 어엿한 성인이 됐죠. ‘잔망 루피’의 인기란, 이젠 어른이 된 아이들이 20년이 지나서도 뽀로로와 얼음 나라 친구들을 잊지 않고 만들어준 소중한 선물이 아닐까 해요.

성남 판교의 아이코닉스 사옥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종일님/리멤버  

Chapter. 4
꼬마버스 타요로 연타석 홈런!

$[2009년 최종일님은 서울시 버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꼬마버스 타요’를 선보입니다. 시민들을 제외하면 등장 캐릭터가 모두 버스, 전철, 트럭, 택시 등 교통수단이죠. 유아용 애니메이션이지만 일각에선 ‘버스 덕후 양성용 애니’라고도 평가받을 만큼 어른들에게도 사랑을 받으며 뽀로로에 이은 연타석 흥행에 성공합니다.]

‘꼬마버스 타요’는 어떻게 제작하게 됐나요?

앞서 서울시에서 애니메이션으로 각종 홍보물을 만들었는데 다 잘 안됐어요. 그뒤 제게도 자문을 구하시길래 “아무리 홍보가 목적이라 해도 홍보로만 접근해선 안 된다”고 피드백을 드렸어요. 애니메이션의 본령은 ‘재미’거든요. 재미가 없으면 말짱꽝이죠.

그랬더니 갑자기 저한테 제안을 주시는 거예요. 직접 총괄 제작을 해보지 않겠냐고요. 고심 끝에 한번 해보겠다고 했는데 덜컥 공모를 내더라고요. (웃음) 당황하긴 했는데 여튼 착실히 준비해 저희가 낙점됐습니다.

‘꼬마버스 타요’의 주요 캐릭터들. 맨왼쪽부터 라니(02번 순환버스)·타요(120번 간선버스)·로기(1000번 지선버스)·가니(1339번 광역버스)/EBS

막상 제작 때 의견 조율이 쉽지 않으셨다고요.

서울시와 의견이 많이 부딪혔어요. 시 입장에선 아무래도 홍보물이니까 홍보색이 더 강화되길 바랐던 거죠. 거기에 제가 강하게 맞섰어요. 홍보물이기 이전에 애니메이션이니 그 본질이 우선되지 않으면 아예 빠지겠다고요. 어차피 투자 비율로 봐도 9대1이었어요. 저희가 9요. “손해를 봐도 우리가 보는데 망하게끔 만들겠냐. 믿고 맡겨 봐라”고 완강히 버텼더니, 결국 두 손 두 발 들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저희 원래 기획대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도 해외에서 인기가 많아요.

유튜브 구독자 1000만이 넘으면 ‘다이아몬드 버튼’이란 기념패가 나와요. 이걸 뽀로로보다 타요가 먼저 받았어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현재 타요 영어 채널 구독자만 1100만명이 넘고, 전 세계 구독자를 다 합치면 4500만이 넘어요. 그만큼 해외에서 굉장히 타요를 좋아합니다. 

지역색이 반영됐음에도 인기를 끄는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국내에서도 처음엔 시내 버스를 가지고 무슨 애니메이션을 만드냐고 다들 비웃었어요. “쟤 로봇으로 변신해?”라고 묻는 사람도 많았고요. 변신해서 악당을 쳐부수는 이야기를 기대한 건데, 변신도 안 하고 그런 스토리도 아니라고 하니 대번에 “되겠냐”면서 걱정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런 자극적 콘셉과 배경이 없어도, 뽀로로가 그랬듯 성공할 수 있다고 봤어요. 단지 배경이 서울시일뿐 결국 이 콘텐츠의 경쟁력은 이야기에 있었거든요. 사는 지역이 달라도 세대가 달라도 아이들이 태초부터 갖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가 있거든요. 그 정서에 부합하며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승산이 있을 거라 봤습니다. 이걸 타요가 여실히 입증해 낸 거죠.

$[이후 최종일님은 ‘치로와 친구들’ ‘태극천자문’ ‘미술탐험대’ 등 연이어 후속작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큰 인기를 끌지 못해 “‘꼬마버스 타요’ 이후론 이렇다 할 히트작이 없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후속 히트작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 듯 보입니다. 

저희도 늘 고민하고 있는데, 그 포인트가 예상하시는 부분과 좀 다를 거예요. 사실 타요 이후 작품들이 명백히 실패했던 게 아니에요. 특히 ‘치로와 친구들’은 반응이 굉장히 좋았죠. 그런데, 오히려 그게 문제가 되더라고요. 

어떤 문제였나요?

시청층이 겹쳐서 뽀로로와 경쟁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치로야 미안하다, 좀만 기다려라~ 흑흑” 이러면서 홀딩하게 됐죠. (웃음) 이미 잘 키운 것들을 더 굳건히 가져갈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작품을 키워 낼 것이냐 사이에서 늘 고민 중이에요. 나름 노력을 5대5로 분배해 새 히트작 만들기도 게을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실제로 내년 출시를 목표로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성남 판교의 아이코닉스 사옥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종일님/리멤버

Chapter. 5
뽀로로 아빠가 그려 낼 인생 만화, 그 다음 장면은?

$[최종일님은 애니메이션 기획·제작자 이외에 또 다른 커리어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연매출 1176억원에 달하는 사업을 책임지는 굴지의 경영인이란 건데요. 그가 20년 넘게 경영한 회사 아이코닉스는 꾸준히 성장을 거듭해 올 하반기 상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프로란 그냥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성장해 있는 사람">

5명이서 시작한 회사가 연매출 1200억원을 바라보는 기업으로 성장했어요. 소회가 어떠신가요?

사실 제 자신이 ‘좋은 경영인’인지 잘 모르겠어요. 경영인으로서 늘 반성하게 되거든요. 회사가 성장한 건 분명 사실이지만, 누군가는 “성장이 너무 느린 거 아니냐”고 말하기도 해요. 맞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에게도 또 직원과 제작자들에게도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고 얘기해요. 물론 사업의 본령은 돈을 버는 거지만, 그에 앞서 저희가 더 근원적으로 하는 일이 바로 애니메이션이잖아요. 애니메이션의 제1 목적은 ‘이야기와 영상으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자’는 거예요. 그걸 잘하고 있느냐를 따져봤을 때, 우린 충분히 제 몫을 하는 회사라고 생각합니다. 그 목적 앞에 부끄럽지 않으면서도 기업이 이만큼 성장했으니 나름 자부심을 느껴요.

설립 이래 적자를 낸 적이 없었다고요. 초창기 큰 실패에도 그게 어떻게 가능했나요? 

아까 실패를 가정한 ‘플랜B’를 항상 마련해 뒀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캐릭터를 활용한 라이선스 사업이 바로 그 ‘플랜B’였어요. 여기서 수익을 많이 창출해 손실을 너끈히 메꿀 수 있었어요. 금강기획 시절부터 아이돌 그룹 god 캐릭터 사업 등 관련 비즈니스 경험이 좀 있었거든요. 이 경험들이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꿈을 지탱하는 건 언제나 현실에서의 지속 가능성이잖아요. 때문에 안정적인 수익화를 경영에 있어 늘 중시하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자체 캐릭터를 활용한 IP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어요. 출판, 완구뿐 아니라 식음료, 테마파크 등으로도 분야를 확장 중입니다.

초반부터 순조로웠던 건 아니에요. 쉽게 봤던 출판 쪽에서 처음에 애를 많이 먹었어요. 국내 애니메이션 캐릭터로는 잘 팔린 적이 없다면서 다들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뽀로로 흥행을 보고도 불신이 컸던 거죠. 그래서,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손해가 나면 저희가 다 메꿔 주겠다는 파격 조건을 제시했어요. 

그리해서 출판에 성공했고, 결과는 엄청난 대박이었습니다. 일주일도 안 돼 초판이 매진됐고, 반년 만에 10쇄까지 찍었습니다. 그 뒤 거꾸로 여기저기 러브콜이 왔는데, 그때부턴 저희가 직접 하게 돼 다 거절했죠. (웃음) 이런 IP 사업은 당연히 상업적 이윤이 목적이지만, 아이들이 콘텐츠를 즐기는 방식을 다양하게 만들어 주는 목적도 크다고 봐요. 후자도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해요. 그러다 보면 돈은 따라와 줄 거라 믿습니다.

지난 6월 코스닥 상장 예비 심사를 신청하면서 연내 IPO에 박차를 가하고 계세요. 그런데, 원래는 상장 자체를 꺼리셨다고요?

기존 콘텐츠 기업들이 상장 후 썩 바람직한 모습을 못 보이는 경우를 종종 봤거든요. 상장이라는 건 불특정 다수의 주주가 생기는 거잖아요. 결국 회사는 주주 이익을 위해 나아가야 할 거고, 그럼 여러 부분에서 충돌이 생기지 않을까 우려했던 게 사실이에요. 가령, 지금은 경력이 좀 부족해도 가능성이 있는 창작자가 있다고 해 봐요. 저는 그 과정을 다 거쳐 봤기에 그런 친구들도 필요하다면 함께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걸 논리적으로 주주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요? 주주 입장에선 “그런 모험은 네 돈으로 해”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이런 우려들 때문에 지레 겁먹고 상장을 꺼렸던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그 기우를 내려 놓기로 하고, 상장을 통해 얻을 여러 사업적 동력을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콘텐츠를 해외로 확장하는 데 있어서 그런 동력이 꼭 필요해요. 그에 힘입어 지금보다 훨씬 과감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려는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세대예요. 그런데 지금 아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만든 애니메이션을 보며 자라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이에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아이들 모두를 즐겁게 해줄, 정말 멋진 애니메이션을 더 많이 키워내고 싶습니다. 

지금은 아직 멀었어요. 한두 편의 성공에 목맬 게 아니라 우리 애니메이션 산업의 구조적 발판을 더 공고히 성장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저와 아이코닉스는 시장을 선도할 글로벌 기업을 꿈꾸며 달리고 있어요.

같은 직무의 후배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요?

애니메이션 업계는 환경이 도와주기 힘든 분야예요. 어느 정도는 개인이 스스로 돌파해 나갈 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게 바로 ‘회복 탄련성’이에요. ‘나는 꼭 성공할 거야!’가 아닌 ‘포기하지 말자. 실패해도 괜찮잖아’의 관점이 꼭 필요하죠. 콘텐츠는 절대적 성공을 담보할 수 없어요. 때문에 더더욱 ‘또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겁니다.

뽀로로 에세이 ‘하늘을 날지 않아도 난 행복해’ 속 한 장면/북플라자

최종일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프로란 그냥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 성장해 있는 사람==이에요. 앞선 ‘수호요정 미셸’ ‘녹색전차 해모수’ 등에서의 실패가 쌓이지 않았다면, 뽀로로와 타요의 성공도 절대 없었을 겁니다. 물론 실패했다고 무조건 성공이 담보되는 건 아닙니다. 실패에서 성공으로 나아가는 법을 끊임없이 배워야죠.

큰 성공을 맛본 저도 여전히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어요. 그저 실패든 성공이든 거기서 유의미한 경험을 쌓고 새로운 무언가에 계속 도전할 뿐이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성공으로 가는 여정을 지나다 보면, 어느새 누구나 멋진 ‘프로’가 돼 있지 않을까요? 뽀로로가 늘 하는 말이 있잖아요. “있잖아, 그거 알아? 도전하는 인생이 가장 멋진 거야!”

최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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