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평
現 페퍼톤스 멤버
2인조 음악 밴드 페퍼톤스 소속 뮤지션입니다. 카이스트 졸업 후 대학 동기 이장원과 그룹을 결성, 20년간 총 7편의 정규 앨범과 100여 곡 이상의 음원을 제작했습니다. 작·편곡과 레코딩은 물론 믹싱, 마스터링 등 페퍼톤스의 곡 작업 전반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간 자신만의 음악색으로 청춘을 노래해 온 뮤지션이 있습니다. 여름날의 청량함을 떠올리게 하는 멜로디, 재기 발랄하고 긍정적인 가사, 실험적이면서도 탁월한 사운드로 대체 불가한 음악적 고유색을 만든 프로듀싱 유닛이죠.
“후배지만 존경하는 뮤지션”(유희열) “질투가 날 만큼 보석 같은 밴드”(정재형) 등 내로라하는 한국 대중음악인들의 찬사를 받는 뮤지션들의 뮤지션, 국내 대표 2인조 음악 밴드 페퍼톤스의 멤버 신재평님이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입니다.
<“제 음악은 조용한 독방에서 시작됐어요. 그러다 평생의 음악 동반자를 만났고 마침내 저희 음악을 아껴주는 팬들과 만났죠. 이제 제 안에서 머물기만 하는 건 절대 음악이 아닌 거예요.”>
신재평님은 기타, 프로그래밍은 물론 레코딩과 믹싱, 마스터링까지 페퍼톤스의 곡 작업 전반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경기과학고·카이스트를 졸업한 수재답게, 그의 음악도 마치 수학처럼 어렵고 수준 높은 화성과 리듬으로 유명하죠.
뛰어난 천재성으로 독보적 사운드를 완성해내지만 그에게 페퍼톤스는 "혼자가 아닌 둘, 둘이 아닌 모두의 음악"으로 정의됩니다. 과연 고독한 독방의 음악가를 수많은 관객, 청자와 호흡하는 베테랑 뮤지션으로 성장케 한 힘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신재평님과 스무살 페퍼톤스가 노래할 내일의 청춘은 어떤 모습일까요? 리멤버가 페퍼톤스 음악의 흥미로운 탄생 스토리와 함께 생생히 담아봤습니다.
서울 강남구 안테나 사옥에서 인터뷰 중인 신재평님/리멤버
Chapter. 1
과학고·카이스트 출신 소문난 수학 천재, 음악으로 일탈을 꿈꾸다
$[신재평님의 어릴 적 별명은 수학 천재였습니다. 각종 전국 단위 경시대회에서 수위권으로 입상할 만큼 이과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인데요. 이 같은 수상 실적에 힘입어 1997년 경기과학고에 진학하게 됩니다.]
<"고요한 방 안에서 멍 때리며 공상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이 무료함에 처음 변주를 일으킨 게 바로 음악이었습니다.">
어릴 때 별명이 수학 천재셨다고요.
콤플렉스가 많은 아이였어요. ‘나는 대체 뭘 잘할까?’란 의문이 많았죠. 그래서 유독 더 수학을 좋아한 것 같아요. 곧잘 하니까 칭찬도 쉽게 받고 그만큼 더 즐겁게 열심히 했던 거죠. 문제 푸는 동안엔 완전히 딴 세상에 가 있을 수 있으니 그 점도 맘에 들었고요.
음악엔 어떤 계기로 관심이 생겼나요?
한편으론 또 무척 심심해 하는 아이였어요. 외아들이었거든요. 집집마다 있던 게임기 하나 없었죠. 고요한 방 안에서 멍 때리며 공상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이 무료함에 처음 변주를 일으킨 게 음악이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가 전축을 받아오셔서 그 앞에 앉아 차이코프스키·글린카 음악을 몇시간이고 들었던 게 생각이 나요. 늘 조용하던 집안 분위기가 음악 하나로 확 달라지는 게 신나면서도 묘했죠. 나중에 라디오가 생긴 후론 맘에 드는 유행가를 공테이프로 녹음해 닳도록 들었어요. 더 클래식 ‘마법의 성’을 처음 듣던 순간은 잊을 수가 없네요.
과학고 진학 후 음악에 더 관심이 깊어지셨어요. 밴드에서 기타를 치셨다고요.
중학교 2학년 때 전국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받아 과고에 조기 합격했어요. 이때 용돈으로 기타를 샀죠. 우연히 친구 기타를 쳐 본 적이 있었는데 너무 재밌었거든요. 마침 1년 정도 학업에 여유가 있었으니 아주 신나게 기타를 쳤습니다.
고등학교 땐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는데 입학날 다른 것 제쳐두고 기타부터 챙겼어요. 제 유일한 장난감이자 보물이었으니까요. 워낙 학생 수가 적어 “1학년에 기타 치는 애가 들어왔다”고 전교에 삽시간에 소문이 났습니다. 곧바로 선배들한테 밴드부 가입 제안을 받았고, 그렇게 밴드를 하게 됐어요.
부원들이랑 ‘음악 일탈’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종종 야자 빼 먹고 홍대 라이브 클럽에 다녀왔어요. 크라잉넛·노브레인 같은 밴드 공연을 많이 봤죠. 학교 규율이 엄격해 선배들한테 이런저런 탈출 비법(?)도 전수받고 저희끼리 탈주 루트도 개발했죠. (웃음) 물론 공부도 나름 열심히들 했습니다.
$[1999년 신재평님은 카이스트에 진학합니다. 뛰어난 학벌 때문인지 데뷔 직후까지도 “음악은 취미나 부업이 아니겠느냐”는 시선이 존재했습니다.]
음악 관련 대학 진학을 고려해 보진 않으셨나요?
선택지가 좀 없었어요. 당시만 해도 실용음악과가 없었고 음대에 가자니 기본기가 부족했죠. 음대는 어려서부터 수련을 많이 해야 들어갈 수 있잖아요. 그 당시 제게 주어진 기회 중 최선을 택한 거예요.
대신 여전히 음악이 너무 하고 싶으니까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다녔어요. 그러다 우연히 학교 앞 지하 클럽에 드럼이 있단 걸 알게 됐어요. 다짜고짜 사장님께 간청해 공연 기회를 얻어냈습니다. 급하게 멤버를 모았고 서울 낙원상가에서 앰프 같은 장비도 사왔어요. 곳곳에 홍보 전단지까지 붙였죠. 나름 보수를 받는 인생 첫 공연이었으니까 만반의 준비를 했어요. (물론 보수는 맥주와 구운 오징어 정도였습니다.)
공연 결과는 어땠나요?
딱 1명 앉아있더라고요. 저희 친구 중 하나였죠. (웃음) 하지만 실망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되게 신나게 연주했어요. 공연 자체가 꿈꾸던 일이니 관객 수가 대수도 아니었고, 어릴 때니까 뭘 판단할 만큼 머리가 굵지도 않았거든요.
그 뒤로도 자주 거기서 공연했어요. 신기하게도 관객 수가 점점 많아졌거든요. 10명쯤 됐을 땐 저희끼리 엄청 들떠서 “우리 대박났다”고 호들갑을 떨었죠. 나중엔 다른 클럽들에서도 저희를 불러주더라고요. 그렇게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음악을 즐겼어요. 그랬더니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에 그만큼 더 진지해지더라고요.
서울 강남구 안테나 사옥에서 인터뷰 중인 신재평님/리멤버
Chapter. 2
2인조 대학생 밴드 ‘페퍼톤스’, 등장과 동시에 인디씬 점령!
$[2003년 신재평님은 대학 동기이자 영혼의 음악 파트너 이장원님과 2인조 밴드 ‘페퍼톤스’를 결성, 본격 전업 뮤지션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우주를 향해 나는 풍선과 / 저기 거리를 낮게 스쳐가는 새들 / 아무도 멈출 수 없는 시간 / 라랄 라랄라 랄랄라(EP 'A PREVIEW' 수록곡 '21st century magic' 중)">
음악을 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음악하던 친구들 모두 3학년쯤 되니 다들 기로에 섰어요. ‘취업이냐 음악이냐.’ 저는 일단 병역부터 이행하잔 생각에 산업기능요원으로 게임 회사에서 프로그래밍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첫 월급으로 10만원짜리 녹음용 중고 마이크를 샀어요.
그 무렵 롤러코스터 지누 선배가 쓴 한 칼럼을 읽게 됐거든요. 거기에 앨범 녹음 과정이 자세히 적혀 있었는데, 놀랍게도 전곡을 스튜디오가 아닌 집에서 녹음했단 사실을 알게 됐죠. 당시는 홈 레코딩이 생소한 시절이었는데, ‘나도 할 수 있겠는데?’란 생각이 들어 곧장 마이크부터 구한 거예요. 이불이나 옷으로 주변 소음을 틀어막고 저만의 그럴듯한(?) 녹음실을 만들었습니다. 그후론 매일 레코딩에 빠져 살았고요. 지금 보면 참 궁한 상황인데 그땐 그게 그렇게 재밌었어요. 그게 시작이에요.
이장원님과는 서로 다른 음악 동아리에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페퍼톤스를 함께하셨어요.
애초에 장원이랑은 너무 각별한 친구 사이였어요. 같은 반 출신에 과(전산학과)도 같았고 좋아하는 게임도 비슷해 금방 친해졌죠. 저는 내성적인데 장원이는 저보단 활기 넘치고 재밌어서 죽도 잘 맞았고요.
당시 베이스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장원이밖에 안 떠오르더라고요. 그만큼 적임이었어요. 무엇보다 음악 취향도 잘 맞았고요. 그때 둘다 시부야계 재기발랄한 일렉트로니카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이 장르 안에서 우리만의 새로운 음악을 해보자는 데 의기투합해 함께하게 됐습니다.
$[2004년 페퍼톤스는 홍대 인디 레이블 카바레 사운드를 통해 ‘A PREVIEW’란 제목의 EP(미니 앨범)를 발매합니다. ‘예고편’이란 의미답게 향후 페퍼톤스만의 청량한 음악색을 잘 담아낸 앨범으로 평가됩니다. 별다른 홍보 없이도 인디 차트 1위에 오르고 공중파 라디오에도 소개되는 등 발매와 동시에 큰 주목을 받게 됩니다.]
결성 1년 만에 EP를 내셨어요.
데모 곡들을 녹음한 뒤 자랑하고 싶어 지인들한테 파일을 보냈어요. 그중 카바레 사운드와 접점이 있던 누군가가 저희 곡 일부를 거기 보냈죠. 그걸 듣고선 먼저 연락을 주신 거예요. 운이 좋았죠. 덕분에 스튜디오에서 다시 정식 녹음해 EP를 냈어요. CD 포장부터 표지 부착까지 직접 저희 손으로 한 아주 살뜰한 앨범이에요.
2004년 발매된 페퍼톤스 EP 'A PREVIEW'의 앨범 표지/카바레 사운드
발매 직후 단숨에 화제가 됐습니다. 정식 유통 없이도 히트 앨범이 됐단 얘기도 있어요.
처음엔 향음악사란 레코드사에서만 저희 앨범을 유통했어요. 당시 인디 음반을 취급해주는 데가 사실상 여기 한 곳밖에 없었거든요. 그런 의미로 정식 유통이 없었다고들 한 거죠. 그리고 이 레코드사의 판매 순위, 즉 ‘향차트’에서 저희가 1위를 해요. 홍대 인디씬만의 리그에선 일단 화제가 된 거죠. 그외 사람들은 잘 몰랐고요.
그러던 어느날 당시 DJ를 하고 계셨던 이한철 선배님이 저희 노래를 라디오에서 틀어주셨어요. 그때만 해도 인디 음악이 공중파 라디오에 소개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거든요. 그날 저랑 장원이, 레이블 사람들 모두 “이게 무슨 일이냐”며 엄청 기뻐했어요. 헌데, 그게 끝이 아니더라고요. 하나둘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저희 음악이 흘러나오는 거예요. 저희로선 상상의 한계조차 뛰어넘은 아주 큰 성공이었습니다.
그 무렵 대체 복무가 끝나가면서 더 크고 좋은 회사로의 이직 제안을 받게 됐어요. 잠시 고민했지만 미련 없이 거절했습니다. 대신 복학을 했는데 공부도 영 손에 안 잡히더라고요. 이미 제 마음이 완전히 딴 데로 가 있던 거죠.
서울 강남구 안테나 사옥에서 인터뷰 중인 신재평님/리멤버
Chapter. 3
성공적 프로 데뷔! 그러나 찾아온 소포모어 징크스?
$[2005년 페퍼톤스는 정규 1집 ‘COLORFUL EXPRESS’를 출시하며 프로 뮤지션으로 전격 데뷔합니다. 수록곡 전반에 흐르는 청량한 분위기는 물론 몽환적이거나 실험성 강한 트랙들까지 어우러져 “페퍼톤스만의 다채로운 음악적 고유색을 처음부터 각인시켰다”는 평을 받습니다.]
<"답답한 것들은 던져버려 / 여긴 정말 한적하다 / 햇살엔 세금이 안 붙어 참 다행이야 / 오늘 같은 날 내 맘대로(2집 수록곡 'NEW HIPPIE GENERATION' 중)">
첫 정규 앨범이었습니다. 그때를 회고하신다면요?
하루종일 음악만 했습니다. 그땐 오로지 음악만 만들었어요. 구현하고 싶은 아이디어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CD 한 장이 머리 속에서 팽팽 돌아가는 상태로 계속 살았습니다. 떠오른 소리들을 실제 음악으로, 남들한테도 들려줄 음반으로 만드는 데만 미쳐 있었던 것 같아요.
현란한 사운드, 촘촘한 편곡 등으로 굉장히 높은 음악적 평가를 받았어요. 수록곡 ‘Superfantastic’은 2007년 한국대중음악상(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노래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죠.
초창기엔 굉장히 현란한 음악을 하고 싶어 했어요. 현악기건 관악기건 세상의 모든 악기가 다 들어간 음악을 만들고 싶었죠. 그게 어느 정도 가능했던 건 전적으로 홈 레코딩 덕분이었어요. 그땐 저한테 피아노조차 없었거든요.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아 어떤 연주든 만들어낼 수 있었죠. 디지털화된 기존 연주들을 조각조각내 새로 배치하는 ‘샘플링’이란 방식으로 사람이 도저히 칠 수 없는 진짜 말도 안 되는 드럼 사운드 같은 것도 담아낼 수 있었어요.
그 덕분인지 2집 때까지의 제작비가 0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 악기를 써서 녹음했다면 엄청난 비용이 나왔겠죠. 사실 지금도 음악 작업에 비용을 그리 많이 쓰지 않아요. 알뜰히 음악하는 편이죠. 가난한 인디 레이블 출신이기 때문인지, 홈 레코딩으로 음악을 시작해서인진 모르겠어요. 다만, 성향이 좀 작용하는 것 같긴 해요. 돈 생긴다고 플렉스하는 성격은 아니거든요. 차도 타던 거 20년째 쭉 타고 있고요. 낡은 악기나 장비를 오래 쓰면서 길들이고 거기에 저도 길들여지는 걸 선호해요.
하지만 제작비 0원의 진짜 비밀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인건비가 책정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객원 보컬들과 세션들 모두 무보수로 참여했고, 앨범 사진·디자인 작업도 친구들이 그냥 해줬어요. ‘열정 페이’란 말도 나오기 전인데 참 극악무도한 짓을 했죠. (웃음) 레이블에서도 편의를 많이 봐주셨고요. 음악을 너무 사랑하면서도 저희를 아껴주는 사람들끼리 고맙고 순수한 마음으로 만든 앨범들이었습니다.
2007년 한국대중음악상 수상작 목록에 이름을 올린 페퍼톤스 1집 수록곡 ‘Superfantastic’/한국대중음악상 웹페이지
$[2008년 2집 ‘NEW STANDARD’가 발매됩니다. 푸른 침엽수가 장식하는 앨범 표지처럼 페퍼톤스만의 청량한 색채가 한층 짙어진 음반으로 평가되죠. 그러나 기대와 달리 흥행 면에선 1집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표를 받아 들어야 했습니다.]
2집은 흥행이 다소 부진했습니다.
‘소포모어 징크스’란 말이 있죠. 데뷔 앨범이 흥한 팀이 꼭 두번째 음반에선 잘 안된다는 징크스요. 이걸 의식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어떤 음악을 해야 보란 듯이 더 인정받는 음반을 만들 수 있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나름 자신도 있었어요. 창작력이 가장 셌던 시기거든요. 이것저것 과감한 시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감이 독이 됐나 봐요. 너무 독하게 만들어 버린 거예요. 수록곡도 원체 많은데 실험적인 곡들의 비중이 높아 1집에 비해 판매량이 확 줄었어요. 뭐든 밸런스가 적당해야 결과가 좋은 법인데 말이죠. 물론 마니아 분들은 2집이 완전 마음에 든다고들 하시지만요.
그래도 이 앨범을 기점으로 작사에 자신감을 얻으셨다고요.
제가 그런 맹랑한 얘길 했었군요. (웃음) 사실 이전까진 가사의 우선순위를 낮게 생각했어요. 멜로디 먼저 다 만들어놓고 가사는 ‘이제 써볼까?’하는 식으로 작업했죠.
하지만 2집 타이틀곡(‘New Hippie Generation’)을 만들 땐 처음으로 가사를 먼저 썼어요. 특히 ‘세상은 넓고 노래는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 / 인생은 길고 날씨 참 좋구나’란 구절에서 핵심 멜로디 라인이 탄생하기도 했죠. 이런 작법을 통해 가사를 더 기억해주는 곡을 만들 수 있더라고요. 이 발견이 뿌듯하고 값져서 뭐 대단한 통찰이라도 깨달은 마냥 호들갑스레 말했었나 봐요. 나중엔 또 달라지는데 말예요.
서울 강남구 안테나 사옥에서 인터뷰 중인 신재평님/리멤버
Chapter. 4
인디의 자랑, 대중음악의 날개를 더하다
$[2008년 말 신재평님은 뮤지션으로서의 커리어에 중요한 변곡점을 맞게 됩니다. 인디 레이블인 카바레 사운드를 떠나 현 소속사인 안테나(당시 안테나 뮤직)에 합류한 건데요. 보다 대중적 음악을 지향하는 레이블 소속 아티스트로서 페퍼톤스의 음악적 환경에도 다양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삐걱거리며 늘 함께 해준 / 낡은 자전거야 안녕 / 아침마다 서둘러 달렸던 / 좁은 골목길도 안녕(3집 수록곡 '작별을 고하며' 중)">
레이블을 옮긴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그때 저희가 딱 29살이었어요. 1년만 더 있으면 30대였죠.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고 무언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막연하지만 일단 둥지부터 바꿔보잔 결정을 내렸던 거예요. 홍대 인디씬 바깥의 일반적 대중가요를 만드는 기획사에선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대형 기획사 러브콜도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안테나를 택한 이유는요?
결정이 쉽진 않았어요. 더 으리으리한 녹음실을 갖춘 회사들도 탐이 났으니까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라 생각해요. 규모는 제일 작았지만 아티스트의 개성을 가장 존중해준 곳이었거든요. 무엇보다 요구 사항도 가장 적었고요. (웃음) 저희 음악을 잘 서포트하는 데만 집중하겠다고 약속해주셔서 ‘욕심내다 일을 그르칠 곳은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새 소속사 합류 1년 만인 2009년 12월 페퍼톤스는 정규 3집 ‘SOUNDS GOOD!’을 선보입니다. 실제 스트링 세션을 동원해 더욱 정교하고 풍성해진 사운드, 콤팩트한 곡 구성에 사랑과 연애를 노래하는 대중적 친근함까지 가미된 앨범이었죠. 그러나 다소간의 변화만큼 진통도 뒤따랐습니다.]
3집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앨범입니다. 막판에 수록곡 일부가 바뀌고 발매 시기도 3개월 늦춰졌어요.
원래 가을이 음악 듣기 좋은 계절이잖아요. 때문에 회사에선 9월에 3집을 내고 싶어 했는데 결국 발매를 미뤘습니다. 죽어라 열심히 만들긴 했는데 계속 ‘이건 아닌데. 저것도 아닌데’ 하면서 작업을 제때 못 마쳤거든요. 환경을 바꿨으면 결과도 성과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 부담이 컸던 거죠.
앞선 1, 2집과의 차별점이 확연하단 평이 많아요.
일단 녹음 방식부터 변화가 컸어요. 소속사에서 어레인지 해준 덕에 처음으로 전문 엔지니어와 세션 연주자 분들과 녹음했거든요. 바쁘고 귀한 분들인데 시간을 허투루 쓰게 할 순 없잖아요. 유희열·김동률 형 같은 선배들 괴롭혀 가며 악보 쓰는 법 등 편곡의 A-Z를 그때 배웠어요.
이런 과정 하나하나가 저희한텐 엄청 새롭고 커다란 사건들이었지만,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면 그건 저희 마음가짐이었어요. 20대 끝자락의 저희는 무척 초조했어요. 친구들 중 누구는 벌써 대학원을 졸업했고 누구는 대기업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있었죠. 태연한 척하려 해도 잘 안 됐습니다. 공부도 잘했던 장원이는 당시 기업 면접도 봐 합격까지 했었죠. 응원하면서도 마음 한켠은 어수선했어요.
이런 알 수 없고 불안한 시기의 감정들이 녹아져 만들어진 게 3집이에요. 이전까진 거칠고 독하게 우리만의 음악을 하고자 했다면, 이땐 누구에게나 인정받고 잘 보일 수 있는 음악을 했죠. 그래서 3집엔 유독 꽃단장한 예쁜 음악들이 많아요. 그만큼 음악을 놓기 싫었어요. 음악으로 계속 끝장을 보고 싶었죠.
기대만큼의 성과가 있었나요?
3집에선 스테디셀러가 많이 탄생했어요. 특히 ‘공원여행’이란 곡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고 방송에서도 자주 활용되더라고요. 하지만 그땐 여전히 초조하고 불안했어요. 3집 때 비용을 엄청 썼거든요. 제작비가 0원에서 갑자기 확 늘어난 거죠. 이걸 메꾸려면 정말 많은 일을 해야겠더라고요. 직업인으로서 일종의 책임감이 생긴 거죠. 그리고 그때 확실히 알았어요. 저희 음악이 저희만의 것은 아니란 걸요.
2009년 3집 발매 당시 페퍼톤스 멤버 이장원님과 신재평님/안테나
Chapter. 5
사운드 현란함 덜고 보컬은 직접 소화… 국내 대형 페스티벌 헤드 라이너로 우뚝!
$[2012년 4월 페퍼톤스의 기념비적 앨범으로 회자되는 4집 ‘beginner’s luck’이 출시됩니다. 자타공인 페퍼톤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곡인 ‘행운을 빌어요’ 등 다수의 히트 트랙이 탄생한 건 물론, 앞선 1~3집과 다른 중대한 음악적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연주로 채워진 현란했던 사운드가 밴드 악기 위주로 재편됐고, 객원 보컬에 묻혔던 두 멤버의 보컬 비중이 이 앨범을 기점으로 급격히 늘어난 겁니다.]
<"행운을 빌어줘요 / 웃음을 보여줘요 / 눈물은 흘리지 않을게, 굿바이 / 뒤돌아 서지 마요 / 쉼 없이 달려가요 / 노래가 멈추지 않도록(4집 수록곡 '행운을 빌어요' 중)">
변화가 매우 뚜렷했습니다. 우선 자체 보컬 비중이 굉장히 늘었어요.
어느덧 서른둘이었어요. 먹고 살 수 있어야 음악도 계속할 수 있단 게 너무 명확해진 시점이었죠. 훨씬 더 진지하게 생존 방식을 고민했고, 그 해답이 바로 공연이었어요. 그런데 당장은 쉽지 않더라고요. 그 많은 객원 보컬들의 스케줄을 일제히 조정한다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고, 직접 부른 곡들만 공연하자니 그 수가 너무 적었죠. 그래서 저희가 더 많이 노래해야겠다고 느꼈던 거예요.
사운드도 이전보다 훨씬 단촐해졌어요.
그 역시 공연형 밴드가 되려는 노력이었어요. 음악이 현란할수록 라이브 구현이 어려워요. 매번 그 많은 악기들을 다 갖고 다닐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따로 녹음된 반주를 트는 건 내키지 않았고요. 관객 분들 입장에서 현장에 없는 악기 소리가 나오면 얼마나 괴리감이 들겠어요. 때문에 4집은 전형적인 5인조 밴드 구성으로 녹음했어요. 공연과 음원의 괴리를 최대한 없애려고요.
4집 제목 뜻이 ‘초심자의 행운’이에요. 큰 변화를 맞아 스스로에게 행운을 빈다는 의미를 담았던 걸까요?
4집을 보시고서 정말 많은 분들이 깜짝 놀라셨어요. 어떤 분들은 기존 스타일과 달라 실망하기도 하셨죠. 그만큼 변화의 진폭이 컸고 어쩌면 마지막 앨범이 될 수도 있겠단 불안을 느끼며 만든 앨범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4집은 저희한테 또 하나의 데뷔 앨범 같은 음반이기도 해요.
‘beginner’s luck’은 그런 저희처럼 무언가를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운이 깃들길 바라면서 붙였던 제목이에요. 그리고 정말 다행히 그 주문이 통했던 것 같아요. 저희의 변화와 새 시작을 갸륵하게 여기고 응원해주는 분들이 많았던 거죠. 덕분에 큰 사랑을 받고 공연도 정말 열심히 하면서 계획대로 관객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행운을 빌어요’ ‘21세기의 어떤 날’ 등 공연 때마다 늘 빼놓지 않고 부르는 곡들이 이 앨범에서 많이 나왔어요.
페퍼톤스 4집 타이틀곡 '행운을 빌어요'의 뮤직비디오 영상/안테나
$[4집 이후 페퍼톤스는 공연형 밴드로의 색채를 훨씬 강화해 나갑니다. 같은 해 11월 발표한 EP ‘open run’은 밴드 사운드를 전자음으로 구현한 4집과 달리 실제 밴드의 내추럴한 사운드를 담아냅니다. 2014년 발매한 5집 ‘HIGH-FIVE’는 공연장에서 구현 불가한 소리를 아예 빼버리고 모든 사운드를 실제 악기로만 연주하죠. 심지어 오토튠도 활용하지 않아 박자나 리듬이 바뀌는 실수마저 고스란히 담깁니다.]
5집에 이르러 공연 중심적 경향이 훨씬 세졌어요.
밴드 음악에 말 그대로 흠뻑 취해 있었어요. 이전까진 모든 악기에 얕고 넓게 관심이 있었는데 그 무렵부턴 밴드 악기에 관심이 확 쏠렸죠. 공연을 자주 하다 보니 ‘이런 게 좋은 기타 연주구나’ ‘이게 진짜 드럼이었구나’를 비로소 알겠더라고요. 이 밴드 사운드 본연의 매력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날것 드대로를 들려주려는 경향이 세졌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 좀 독이었던 것 같아요. 저희가 꽂힌 대로만 잔뜩 힘을 줘 또 독하게 만든 앨범이 5집이었거든요. 그 탓인지 흥행은 부진했습니다. 사실 5집은 음악 외적인 부분에도 꽤 공을 들였었어요. 14곡 중 11곡이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을 만큼이요. 4집이 재출발이었다고 치면 소포모어 징크스를 한번 더 겪은 셈이에요.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공연형 밴드로서의 입지는 더욱 굳히게 됩니다.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뷰티풀 민트 라이프 등 국내 주요 음악 축제들의 개근 밴드이자 대표 헤드 라이너로 자리매김했으니까요.
그때 자리 잡힌 5인조 밴드 체제가 지금껏 유지되고 있어요. 당시 인연을 맺은 세션 연주자들과 매공연 함께하고 있죠. 또, 마니아들을 가장 많이 탄생시킨 앨범 중 하나가 5집이기도 하고요. 일부 아쉬운 포인트는 있었지만 저희가 원했던 방향으로의 성장은 확실했던 시기라고 자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21년 콘서트 'TRAVELERS'에서 게스트인 가수 스텔라장님과 페퍼톤스 멤버들/안테나
Chapter. 6
베테랑이 된 공대 괴짜 밴드, 희망의 서사로 위로를 건네다
$[2018년 페퍼톤스는 6집 ‘LONG WAY’를 기점으로 또 한 번의 중대한 음악적 변화를 시도합니다. 멜로디, 사운드에 집중하던 이전과 달리 앨범 전체의 서사와 스토리텔링에 주력하기 시작한 겁니다. 실제로 6집은 ‘긴 여행’이란 하나의 테마로 각각의 트랙 화자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독특한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오오 절망이여 / 나를 포기하여라 / 나지막이 중얼거렸던 / 해가 비춘 어느 날 / 그가 마침내 멈춘 곳 / 거기 남겨져 있는 / 천 개의 우산(7집 수록곡 'GIVE UP' 중)">
6집부턴 음악의 중심이 소리에서 이야기로 옮겨간 것 같습니다.
그때부턴 우선순위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이미 사운드적으론 실험하고 싶은 것들을 많이 해봤잖아요. 이젠 이야기에 주력해보잔 생각이 강해졌죠. 좋은 책을 읽으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게 있잖아요. 저희 앨범도 한 권의 책처럼 무언가 느끼고 생각할 거리를 남기면 좋겠더라고요. 때문에 가사 쓰기에 무척 공을 들였어요. 앨범 작업에 70%는 작사에 집중할 만큼요. 한 곡 가사 쓰는 데 한 달씩은 걸렸어요.
변화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그 무렵 저한테 첫아이가 태어났어요. 이 친구가 제 인생에 나타나면서 저라는 사람도 좀 바뀌더라고요. 사소한 생활 패턴부터 사람을 보는 관점, 인생에서의 아주 소중한 우선순위 같은 게 다 바뀌었죠. 음악을 대하는 태도마저도요. 그러면서 앞으론 어떤 음반을 만들어야 할지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 거예요.
2018년 6집 발매 당시 페퍼톤스 멤버 이장원님과 신재평님/안테나
$[6집에서의 경향은 2022년 7집 ‘thousand years’로도 이어집니다. 총 7곡으로 구성된 7집은 각 트랙이 마치 소설 챕터처럼 기능해 하나의 스토리라인을 만들어 갑니다. 전혀 다른 시공간 속 화자들의 이야기가 서로 짜임새 있게 얽혀 앨범 전체의 기승전결을 이뤄내는 것이죠. 각각의 이야기가 전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기반하는 만큼, 종전과 달리 어둡고 절망적인 정서를 다루는 변화도 눈에 띕니다.]
7집에선 정서적 변화가 몹시 두드러졌습니다.
코로나 때 만든 음반이잖아요. ‘세상이 어떻게 되는 건가’ ‘이거 다 죽는 거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 하고, 별의별 뉴스가 쏟아져 아무 것도 믿지 못하는 그런 시기에 해맑은 음악을 할 순 없겠더라고요. 대신 어떤 이야기를 해야하나 생각이 많았는데, 장고 끝에 나온 아이디어가 이 시기의 정서에 기반해 가사를 써보는 거였어요.
가사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디스토피아적 세상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에요. 우리에 갇힌 사자(‘사파리의 밤’), 죽어 가는 사람(‘coma’), 기억을 잃은 사람(‘어디로 가는가’), 절망하는 사람(‘GIVE UP’) 등 저마다 무언가 상실하고 지쳐 포기하려는 이들이죠. 바로 이들의 이야기가 쭉 나열되는 앨범이에요. 하지만 그럼에도, 그 귀결점이 그대로 절망일 순 없는 거잖아요.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모든 이야기는 끝에 반드시 희망이 비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때문에 결말을 두고 고민이 아주 많았어요.
“마지막 가사 한 줄을 채우는 게 정말 어려웠다”고 회고하신 이유가 그 때문이었군요.
맞아요. 마지막 곡 ‘GIVE UP’ 가사를 계속 썼다 지우길 반복했죠. 단순히 ‘그래도 난 괜찮아. 다 잘될 거야’란 메시지로 쉽게 끝맺음하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러기엔 그 시기가 너무 깜깜하고 암울했으니까요.
한참을 고민하다 문득 오브제 하나가 떠올랐어요. 바로 첫 트랙 제목이자 중심 소재인 ‘우산’이었죠. 주저앉아 포기하려는 화자의 눈앞에 마침내 해가 비추고 천 개의 우산이 나타난 상황을 가사로 옮겼어요. 그 어떤 말 대신 시각적 오브제가 나타내는 장면만으로 메시지를 비추고 싶었거든요.
이처럼 앨범 전반의 서사와 그 짜임새에 주력하면서 작사에만 2년이 걸렸습니다. 저 가사 한 줄 때문에 나머지 곡들의 가사를 바꾸는 일도 많았고요. 수록곡 각각의 음악성이나 완성도도 여전히 중요했지만, 앨범 전체가 하나의 작품으로서 만들어가는 이야기도 저희에게 굉장히 중요해진 거예요.
2023년 팬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페퍼톤스와 밴드 세션 연주자들(앞줄)/안테나
Chapter. 7
둘이 아닌 모두와 달려온 Twenty Plenty
$[2024년은 페퍼톤스의 데뷔 20주년입니다. 이를 맞아 지난 4월 ‘Twenty Plenty’란 이름의 기념 음반이 나왔는데요. 앞뒷면이 각기 다른 음악으로 재생되는 카세트테이프처럼, A사이드와 B사이드라 이름 붙인 2개의 CD로 구성된 앨범입니다. A사이드엔 잔나비·LUCY·이진아·스텔라장 등 동료 아티스트들이 리메이크한 페퍼톤스의 대표곡 10편이, B사이드는 그간 미발매된 10편의 신곡이 담겼습니다.]
<"밤새도록 멈추지 않는 우리들의 노래 / 오랫동안 꺼지지 않는 밤하늘 불꽃처럼 /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우리들의 노래 / 수많은 시간을 함께한 오랜 친구 가자 또다시(20주년 기념 앨범 ‘Twenty Plenty’ 수록곡 '라이더스' 중)">
카세트테이프식 앨범 구성이 인상적입니다.
B사이드 앨범 발표는 저희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어요. 통상 B사이드는 해당 뮤지션으로선 뭔가 마이너틱한 곡들이 들어가잖아요. 가령 록밴드 앨범의 B사이드엔 엉뚱한 발라드풍 노래가 나온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타이틀 재질이 아닌 곡들만 모여있는 거죠.
어릴 적 비틀즈나 라디오헤드의 B사이드 곡 모음집을 들으면 ‘이 노래로 표현하려던 게 뭘까?’ ‘왜 이 노래는 B사이드에 들어갔을까?’ 생각하는 재미가 많았어요. 그만큼 B사이드만의 묘한 매력이 있죠. 이번 저희 앨범 B사이드는 예전에 만들어뒀지만 저마다의 사연으로 발표되지 않은 곡들로만 채워져 있어요. 이 노래들만의 매력이 빛을 한번 봤으면 하는 게 이 앨범을 만든 이유 중 하나예요.
A사이드엔 동료들의 리메이크곡들이 배치됐어요.
이번 앨범을 내고서 가장 많이 느낀 게 ‘우린 혼자가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20년이란 꽤 긴 시간이 흐르며 음악하는 동료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몇년새 부쩍 외롭단 기분도 자주 들었죠. 그런데 이렇게 많은 뮤지션이 저희 음악을 아껴주고 페퍼톤스의 스무살을 축하해줄진 몰랐어요. 적잖이 감동이었습니다. 회사한테도 고마웠고요. 이 앨범이 나온 건 전적으로 회사 덕이거든요. 저흰 부끄러움이 많아서 자축 앨범을 스스로 기획할 만큼 뻔뻔하질 못해요.
시간이 갈수록 페퍼톤스의 음악이 페퍼톤스만의 것이 아님을 느껴요. 진부한 말일 수 있지만 선후배들, 회사, 무엇보다 저희 음악을 들어주는 팬들이 없다면 우리 음악은 아예 존재조차 할 수 없음을 느끼죠. 음악은 제게 늘 하고 싶은 것이었지만, 하고 싶은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세상에 많지 않잖아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수 있다는 데 형언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껴요.
이런 감정이 곡 작업에도 녹아드는 것 같고요. 지금까진 고집대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젠 다른 의견들에도 귀가 열려요. 점점 더 그리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단숨에 변하긴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도 저희 음악을 사랑해주는 모두와 알콩달콩 음악해나갈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아요.
페퍼톤스 20주년 기념 앨범 ‘Twenty Plenty’ 콘셉 사진/안테나
Chapter. 8
스무살의 페퍼톤스, 앞으로도 노래할 그들의 청춘은?
$[페퍼톤스란 이름의 의미는 ‘후추(pepper)처럼 기분 좋은 자극을 주는 사운드를 추구하는 밴드’로 알려져 있죠. (사실 별뜻 없이 어감이 좋아서 만든 신조어란 설이 더 유력합니다.) 이 의미처럼 스무살 페퍼톤스는 자기만의 고유색으로 청춘을 노래하는 국내 대표 뮤지션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멤버들의 나이도 어느덧 40대 중반. 신재평님은 “앞으로의 20년을 위해 이젠 페퍼톤스만의 음악 철학에 더욱 집중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프로란 이번에도 잘해야 하지만 다음번에도 잘해야 하는 사람">
날씨가 좋은 날만 곡 작업을 한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밝은 음악톤을 유지하려고요.
20대 때 얘기예요. 요새 여름은 거의 우기잖아요. 비 온다고 작업 안 하면 여름은 장기 휴가죠. (웃음) 사실 크고작은 것들이 많이 변했어요.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직종이기도 하고요. 음반이 매번 똑같으면 재미 없잖아요. 계속 새로운 걸 던져야죠. 바꿀 건 바꿔야 해요. 하지만 개중에 바뀌지 않아야 하는 건 잘 지켜야 하고요.
바뀌지 않아야 하는 게 어떤 건가요?
페퍼톤스의 음악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기운을 북돋아 줘야 한다는 것이죠. 물론 위로를 주는 음악은 다양해요. 슬프고 격정적인 음악도 당연히 그중 하나죠. 하지만 그건 저희가 잘하는 분야도 아니고 이미 잘 만드는 분들이 많아요. 저흰 저희 방식대로 페퍼톤스다운 음악을 꾸준히 만들 겁니다. 당장 힘을 얻고 싶을 때 누구나 페퍼톤스를 꺼내 들을 수 있고, 오랜만에 생각이 나 찾아보면 새 노래들이 나와있는 그런 팀이고 싶어요.
페퍼톤스 바깥의 새로운 도전에도 나섰어요. 재작년 드라마 ‘치얼업’의 음악 감독을 맡았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끝날 무렵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어요. 드라마 음악은 또 새로운 영역의 일이거든요. 강하게 제안을 주셔서 맡긴 했는데 부담이 정말 컸어요. 드라마는 비용도 많이 들고 아주 여럿이 만드는 작품인데 제 음악이 혹여 누가 될까 걱정이 컸죠. 하지만 만족스런 결과물이 나와 뿌듯했어요.
힘들긴 했지만 앞으로도 새 도전을 마다하고 싶진 않아요. 영화·뮤지컬 등 음악이 필요한 곳이면 뭐든요. 뿐만 아니라 공연도 더 다양한 콘셉으로 해보고 싶고 음반에서도 새로운 사운드나 이야기에 많이 도전해보고 싶어요. 메모해둔 건 굉장히 많은데 시간이 부족하네요.
스무살의 페퍼톤스, 앞으로의 20년은 어떻게 내다보세요?
음악이 제일 재밌을 때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예요. 이땐 맨날 이어폰 끼고 음악 듣고 다니잖아요. 그러다 어른이 되고 더 나이가 들면 음악을 잘 안 듣게 되죠. 옛 노래만 반복해서 듣는 경우도 많고요. 결국 음악이란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의 재밌는 유행과도 같은 거예요.
때문에 창작자들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왕성히 창작을 이어가는 게 쉽진 않은 것 같아요. 필연적인 생물학적 한계가 있는 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앞으로의 20년도 여전히 창작이란 걸 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어찌 보면 불가능에 도전하겠단 말 같기도 한데 정말 진심으로요.
물론 어릴 때만큼 창작력이 샘솟진 못하겠죠. 그래서 대신, 지금부턴 저희만의 어떠한 철학을 마련해야 할 시기인 것 같아요. 단편적 아이디어들을 떠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 단계에서 그걸 어떤 방향과 태도로 어떻게 정리하느냐도 중요하거든요. 바로 이 지점에 저희의 고민을 더욱 주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업 뮤지션으로 살아가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공연하는 순간엔 꼭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요. 스포트라이트가 저흴 비추고 많은 이들이 우리 연주를 귀기울여 듣는 게 보이니까요. 근데 그 순간이 지나고 불이 딱 꺼지면 헛헛해요. 그만큼 감정 기복이 굉장히 크죠. 잘 콘트롤하지 않으면 정서적으로 불안하기도 쉽고요. 이처럼 하고 싶은 일임에도, 심지어 가장 즐거운 시간에도 그 가운데엔 즐거운 순간들만 있지 않아요. 좌절스럽고 괴로운 일들이 불쑥 찾아오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언제나 즐거움을 잃어선 안 되는 일 같아요. 억지로 하고 있는 게 음악이 될 순 없으니까요. 그래서 희망이란 건 아무리 막연할지언정 늘 좋은 것 같아요. ‘어쨌든 잘될 거야’란 마음만 스스로에게 있다면, 무엇이든 그렇게 많이는 괴롭지 않을 거거든요. 저희가 언제나 희망을 노래하고자 하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서울 강남구 안테나 사옥에서의 신재평님/리멤버
신재평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프로란 이번에도 잘해야 하지만 다음번에도 잘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프로란 소리를 듣는 분들은 대체로 그 직업과 완전히 동화돼 있더라고요. 살면서 깨닫는 생각, 크고작은 변화 등 온갖 다양한 자극을 일에 투영하죠. 어떻게든 더 잘하고 싶어서요. 그만큼 책임감을 온 마음으로 감내하는 이들의 호칭인 거죠.
제 음악은 조용한 독방에서 시작됐어요. 그러다 평생의 음악 동반자 장원이를 만났고, 울타리가 돼 주는 회사를 만났죠. 그리고 마침내 저희 음악을 아껴주는 팬들과 만나 여지껏 음악인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이제 제 안에서 머물기만 하는 건 절대 음악이 아닌 거예요. 자아의 접촉면이 넓어진 만큼 더 많은 걸 보고 생각하게 되죠. 더 잘하고 싶으니까요.
누구나 각자의 길에서 이 과정을 거칠 거라고 봐요. 잘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 그걸 내려놓지 않고 걷고 있는 모두를 응원합니다. 행운을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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