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진
現 동아제약 고문(前 대표이사)
30년 가까이 현장을 누빈 베테랑 광고 기획자이자, 오늘날 동아제약의 성장을 견인한 굴지의 경영인입니다. 제일기획 등 광고 대행사에서 20여년간 광고 기획 실무자로 경험을 쌓은 뒤 동아제약에 전격 합류, 박카스·가그린 광고 캠페인 등을 총괄하고 대표이사를 지냈습니다. 현재는 동아제약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인기 상품들의 광고 기획을 도맡아 온 베테랑 광고인이 있습니다. 초년 시절, 광고 대행사 코래드에서 90년대 초히트 광고 대우전자 ‘탱크주의’ 캠페인에 기여했고, 제일기획에선 햇반· 다시다 등의 광고 기획을 주도해 국민 브랜드 반열에 올려놨죠. 그 뒤 동아제약 광고팀장으로 합류, 각종 광고 캠페인을 총괄하며 박카스와 가그린에 새 활기를 불어넣기도 했습니다.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 최호진님의 이야기입니다.
<“좋은 광고를 가름하는 건 무엇일까요. 흥행? 매출? 전부 아닙니다. ‘본질을 꿰뚫었느냐’입니다. 본질을 각인시킨 상품만이 쓰러지지 않거든요. 비단 광고에만 적용되는 얘기일까요.” >
금융사에서 광고 대행사, 다시 제약회사로 수차례나 업을 바꾼 최호진님을 혹자는 ‘잡초’에 비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깐깐한 광고주 앞에서도, 또 오래 성장이 정체된 제품 안에서도 늘 해답을 찾아내며 살아남았기 때문이죠. 어떻게든 사안의 본질을 찾아 일이 ‘되게끔’ 만드는, 그는 자타공인 천생 ‘기획자’입니다.
광고 기획자 출신으로 제약회사의 최고 경영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최호진님의 커리어 여정을 관통한 힘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요? 리멤버가 직접 만나 한 세대를 풍미한 다양한 히트 광고들의 탄생 스토리와 함께 그 여정을 생생히 담아봤습니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호진님/리멤버
Chapter. 1
베테랑 광고인의 첫 출발은 금융맨?!
$[최호진님은 1988년 서강대 경영학과를 나와 ROTC 장교로 군 복무까지 마친 뒤, 1990년 한국투자신탁(현 한국투자증권)에 입사합니다. 햇반·박카스 등 한국을 대표하는 히트 상품 광고를 기획한 베테랑 광고인의 첫 출발은 금융맨이었던 겁니다.]
<“무섭더라도 움켜쥔 걸 놔야만 앞으로 갈 수 있죠. 어릴 때 한 번쯤 건너본 구름사다리처럼요.”>
첫 직장이 금융사였어요.
우연히 본 광고 한 줄 때문이었어요.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시겠습니까? 각광받는 증권맨이 되시겠습니까?” 대학을 마치고 ROTC 입대를 앞둔 어느날 신문에 실린 한 증권사 광고였죠. ‘각광’이란 단어가 절 단번에 사로잡았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아무 일이나 하고 싶진 않았나 봐요. 당시 한창 ‘핫’했던 직장이 투자신탁이었고, 제대 후 바로 한국투자신탁에 입사했습니다.
한국투자신탁에선 어떤 일을 하셨어요?
투자신탁은 은행과 증권사의 중간 형태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고객이 맡긴 돈을 주식·채권 등에 투자하고 그 수익을 고객에게 나눠주는 거예요. 당시만 해도 엄청난 호황기라 은행 예금보다 인기가 훨씬 높았습니다. 투신사에 입금하려고 전날부터 줄을 설 정도였으니까요. 저는 그곳에서 고객관리팀에 소속돼 기업·법인 고객을 관리하는 업무를 담당했어요. 회사가 잘나가니까 남들은 다 부러워했습니다. 실제로 돈도 많이 벌었고 동료들끼리 분위기도 좋았죠.
하지만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보니 모두가 똑같지 않고 각자의 적성도 다 다르다는 걸 깨달았죠. 그곳은 제가 원했던 그 ‘각광’은 아니었나 봐요. 여기 남아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들이 그리 끌리지 않더라고요. 근본적으로 ‘돈 굴리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죠. 더구나 당시의 호황도 막차일 거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스스로가 ‘한때의 열기에 무턱대고 달려든 불나방이 아니었나’하고 직감한 순간, 회사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내 영혼이 진동해 스스로를 건강히 태울 수 있는 그런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겁니다.
군 복무를 앞두고 최호진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당시의 증권사 광고/본인 제공
$[2년여의 투신사 근무 후 1992년, 최호진님은 당시 해태그룹 계열사이자 업계 5위권 광고 대행사 코래드로 이직하며 광고계에 처음 입문하게 됩니다. 이전 경력도 인정받지 못한 것은 물론 연봉까지 대폭 깎아가며 신입 공채로 들어갑니다. ]
돌연 광고 대행사로 이직하셨어요.
금융 쪽에서 TOP인 기업에서 일해봤으니, 금융이 아닌 다른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방송’이었어요. 어느날 TV를 보던 중 MBC 아나운서 공채 공지가 자막으로 흘러가더라고요. ‘이거다!’ 싶었습니다. 그해 2000명가량이 지원했는데 얼떨결에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어요. 하지만 운은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남은 20명 중 남자는 단 2명만 저보다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하필 신동호, 이재용 아나운서였지 뭡니까. (웃음) 결국 남자 중에선 이 둘만 붙고 나머진 전부 탈락했어요.
그리고 그 무렵 지원했던 또 하나의 분야가 바로 ‘광고’였습니다. 다짜고짜 전화번호부를 펼쳐 업종을 쭉 살폈는데 가장 끌리는 게 광고였거든요. 거기 적힌 광고 회사들에 닥치는 대로 전화해 사람을 구하고 있는지 물었어요. 마침 코래드가 구인 중이었기에 바로 지원했고, 합격했습니다.
연봉까지 깎으면서 신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제가 경영학과 출신이잖아요. 삶의 중대한 기로에 설 때마다 판단 기준으로 삼은, 경영학에서 깨친 몇가지 원칙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바로 ‘현재가치’와 ‘미래가치’입니다. 전자가 말 그대로 어떤 재화의 현재 가치를 말한다면, 후자는 그 재화의 가치가 훗날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말하는 거죠. 이 관점에서 광고계의 미래가치가 더 높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물론 저도 사람인지라 눈앞의 월급은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움켜쥔 게 아쉬워 끝내 그 손을 놓지 못하면, 결국 다른 새로운 걸 담을 수 없잖아요. 어릴 때 ‘구름사다리’ 한 번 쯤 건너보셨죠?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무섭더라도 반드시 그 손을 놔야지만 앞으로 갈 수 있죠. ‘최호진’이란 브랜드의 미래가치를 올려갈 수 있는 길이라면 당장의 이익은 미련 없이 놓을 수 있겠더라고요.
완전히 색다른 분야였는데 적응에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무지 힘들었죠. 광고의 기역자도 몰랐으니까요. 콘셉트, 썸네일, 스토리보드… 각종 용어부터 생소한 것투성이였습니다. 입사 동기가 한 명도 없어 외롭기까지 했죠. 원래는 저 포함 2명이 뽑혔는데, 다른 한 명은 입사 직전 다른 회사로 가버렸거든요.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그때 너무 힘들어서 관두려고 KBS 아나운서 지원서도 받아왔다니까요. 하지만 결국 지원은 못했습니다. 바빠도 너무 바빴거든요. (웃음)
사실 광고업계는 완전 프로들의 세계예요. 서로 가르치고 배우기보다는 혼자 알아서 살아남는 분위기가 강하죠. 저도 어떻게든 살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궁리하다가, 문득 묘안을 떠올렸습니다. 저한텐 ‘금융’이란 저만의 무기가 있었잖아요? 이걸로 동료들과 딜을 한 거예요. 저는 제 장기를 살려 동료들에게 재테크 조언을 해주고, 동료들은 그들의 업무 노하우를 제게 알려주는 식이었죠. 광고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순수한 편이라 재테크엔 약하거든요. 다행히 딜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적응해 나갔어요. 아나운서 시험도 더는 치지 않았습니다. (웃음)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호진님/리멤버
Chapter. 2
좌충우돌 방황 끝, 광고의 A-Z를 배우다
$[1992년 코래드 입사와 동시에 최호진님은 대우전자 브랜드 광고 전담팀에 합류합니다. 드디어 광고 기획자로서의 첫 발걸음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무슨 일이든 ‘본질’을 계속 상기하지 않으면, 수단이 목적화되고 방향을 잃게 돼요.”>
맡게 된 업무가 무엇이었나요?
광고 대행사 업무는 크게 기획, 제작, 미디어, 관리로 나뉘어요. 이중 광고와 직접 맞닿은 영역이 바로 기획과 제작입니다. 먼저 기획이 광고의 목적과 대상에 부합하게 전반적 광고 전략과 기획 의도를 수립하면, 제작은 그에 맞춰 실제 광고물을 만들죠.
좋은 광고가 나오려면 제작 못지 않게 기획의 역할도 몹시 중요합니다. 기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광고 캠페인을 관리하고 책임지거든요. 공급자적 마인드가 강한 기업 광고주와 아무래도 소비자 측에 사고가 치중되는 제작 스태프를 동시에 아우르고 조율해 최적의 결과물을 내야 하죠. 무엇보다 기획의 방향과 각이 ‘뾰족하게’ 잡혀야만 제작의 집중력과 창의성도 극대화될 수 있고요. 이 기획을 전담하는 사람을 광고 기획자, 업계 용어로 AE(Account Executive)라고 하는데 제가 바로 이 AE였어요.
대우전자 전담팀엔 어떻게 합류하게 되셨나요?
이전 광고 시리즈부터 코래드는 대우전자에 공을 많이 들이고 있었어요. 입사 당시엔 탱크주의 광고가 한창 준비되고 있었는데, 때마침 운 좋게 저도 해당 팀에 합류하게 된 거예요.
$[최호진님의 소속 부서가 주력으로 맡은 광고는 “탱크처럼 견고한 제품으로 초일류 기업이 되겠다”는 슬로건으로 유명한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캠페인이었습니다. 제품의 내구성과 편리함을 중시하는 특유의 기업 철학을 앞세운, 일종의 브랜드 광고였죠. 이 광고는 개시 첫 해인 1993년 국내 광고계 최고 권위상인 한국방송광고대상(현 대한민국광고대상) 대상을 수상합니다. 총 1000여편의 경쟁작을 물리친, 그야말로 메가 히트 광고였죠. 최호진님은 퇴사 전까지 무려 7년간 이 탱크주의 팀에 몸담으며 광고 기획의 A-Z를 배워나갑니다. ]
당시 탱크주의 광고는 여러 면에서 센세이션했어요. 사장이 직접 광고에 출연한 것도 이례적이었을 뿐 아니라, 오로지 기업 철학만 내세운 광고란 점도 파격이었죠.
당시 가전회사는 금성(현 LG)과 삼성전자의 2강 체제였어요. 대우전자가 여기에 가전 3사라고 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죠. 가전 2.5사라고나 할까요. 빅2를 넘어서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다른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금성과 삼성전자는 화려한 CG를 활용해 첨단 기술을 강조하는 광고를 선보였어요. 물론 TV·신문 가리지 않고 물량 공세를 펴 효과는 있었을 테지만, 지나치게 공급자적 마인드에 갇힌 광고들이라고 봤습니다. 사실 가전제품의 주 타겟은 주부잖아요.
그럼 탱크주의는 무엇에 초점을 맞췄나요?
다시 대학 때 얘길 잠깐 하겠습니다. 어느날 무역학개론 수업 중 교수님이 “무역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어요. 대부분 ‘수출로 돈벌기’ 정도를 생각했죠. 그런데 뜻밖에도 정답은 ‘수입’이었어요. 내가 갖고 싶은 걸 얻기 위해 내가 가진 걸 준다는 거예요. 수출은 수단일 뿐이고, 결국 본질적 목적은 수입인 거죠. 이처럼 무슨 일이든 ‘본질’을 계속 떠올리지 않으면, 수단이 목적화되고 방향을 잃게 돼요. 광고도 마찬가집니다. 제품의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해요.
그럼 가전제품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우린 3가지를 꼽았어요. 튼튼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고, 편리해야 한다. 거기에 대우전자가 강조하는 ‘백투더 베이직’, 즉 기본에 충실한 제품을 만들자는 철학을 접목시켰죠.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탱크주의였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걸 보여줄 소재가 마땅치 않은 거예요. 한참을 고민하다 나온 아이디어가 당시 최고 경영자였던 배순훈 사장을 모델로 내세우는 전략이었어요. 친근한 외모와 나긋나긋한 목소리, 또 ‘경기고-서울대-MIT 공학 박사’인 똑똑한 이미지가 주부들에게 먹힐 것 같았거든요. 다행히 그분도 흔쾌히 승낙해 주셨죠.
탱크주의는 7년이나 지속된 광고 캠페인이었고 아주 큰 상도 받으셨습니다.
그 팀의 일원이란 것만으로도 정말 큰 행복이었어요. 최고의 팀에서 배운다는 뿌듯함이 컸죠. 그리고 비로소 ‘아, 내가 각광받는 일을 드디어 하는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광고업계에 나를 더 던져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게 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대우전자 탱크주의 광고. 지면 속 남성은 당시 대우전자 배순훈 사장/본인 제공
Chapter. 3
업계 1위 제일기획에서 광고 기획 1인자로!
$[IMF 여파가 한창 몰아치던 1999년, 최호진님은 광고업계 1위 기업인 제일기획으로 이직합니다. 총 11년간의 재직 중 8년 동안 CJ제일제당 광고 캠페인을 전담하게 됩니다. ]
제일기획으로 이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IMF 사태가 운명을 바꿨던 거죠. 외환 위기로 실물 경제가 위축되면서 가장 먼저 광고업계가 타격을 받았어요. 줄줄이 도산해 가는 마당에 광고에 투자할 겨를이 없었던 거죠. 설상가상 코래드의 모기업인 해태마저 부도가 났습니다. 그 여파로 직원 넷 중 하나는 무급 휴가를 보냈고, 나머지는 30%씩 연봉을 삭감했어요. 그마저도 월급이 세 달씩 밀렸죠. 다들 ‘이번 달은 월급이 나올까’ ‘이거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걱정하던 때, 다행히 여러 곳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중 업계 1위였던 제일기획을 택했어요.
CJ제일제당 쪽 광고를 주로 하셨어요.
처음엔 금융 분야를 맡았어요. 광고는 10년 주기로 메인 스트림이 바뀌는데 70년대는 제약, 80년대는 식음료, 90년대는 가전, 그리고 2000년대가 금융이었거든요.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광고인들이 금융에 약하잖아요. (웃음) 또 한 번 제 무기를 써먹을 기회가 왔던 거죠. 이때부터 증권사·카드사 등 각종 금융사 광고를 도맡게 됐습니다. 서울증권(현 유진투자증권)·삼성생명의 첫 TV 광고들도 저희가 했어요.
그러던 2003년, CJ제일제당 담당 AE로 팀을 옮기게 됐습니다. 당시 CJ제일제당은 리서치·마케팅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마케팅의 사관 학교”라 불릴 만큼 업계에 정평이 난 회사였어요. 대행사 담당팀 입장에선 일은 많은데 그만큼 실적 효율은 안 날 수 있는, 어려운 광고주였죠. 다들 2~3년 하다가 손 들고 나왔는데, 저는 어쩌다 보니 거기서 8년을 버텼네요.
$[최호진님은 CJ제일제당 대표 상품인 다시다·햇반 등의 광고 캠페인을 기획하게 됩니다. 특히 당시로선 생소했던 상품밥 시장에서 햇반을 연매출 300억원을 일으키는 명실상부 최고의 상품밥 지위에 올려놓는 데 기여하면서, 국내 수위권 광고 기획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햇반 광고가 아주 큰 성공을 거뒀어요.
햇반이란 제품의 본질을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당시만 해도 햇반은 ‘집밥보다 편리하게 해 먹을 수 있다’는 편리함을 강조했어요. 하지만 이것만으로 시장을 공략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주부들에게 ‘길티 마인드’가 있던 거예요. 실제로 주부들이 가족이나 손님한테 햇반을 내어줄 땐 ‘밥하기 귀찮아서 이걸 내놓는다고 생각하면 어쩌지?’하고 느끼기 일쑤였죠. 무슨 죄라도 지은 것처럼요.
고객들에게 이런 길티 마인드가 남아있는 한, 햇반은 현 수준의 성장세를 넘어설 수 없다고 봤습니다. 그럼 해답은 확실했죠. 바로, 햇반과 집밥의 차별점을 부각하며 ‘편리함’을 강조하던 기존 전략을 과감히 내려놓고, ‘정성’과 ‘맛’을 강조해 길티 마인드를 없애주는 쪽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겁니다. 그래서 나온 캐치프레이즈가 “집밥보다 맛있는 밥”이었어요. 결국 이게 제대로 통했던 거예요.
이처럼 성공도 거뒀지만 무척 고생스럽기도 했던 시기였어요. 뭐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있는 게 없었고 우여곡절도 많았죠. 하지만 돌아보면 이때가 절 가장 크게 성장시킨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어떤 일을 ‘기획’한다는 걸 또렷이 배운 시기였거든요. 본질을 힘써 고민하고 그에 걸맞은 전략을 제대로 도출해내는 것, 이런 ‘진짜’ 기획만이 참된 성취를 만들어낼 수 있단 걸 말이죠. 향후 제 커리어 여정에서 직면한 수많은 도전 가운데 가장 중심이 돼 준, 아주 소중한 배움이었습니다.
여전히 햇반 마케팅 활동에 활용되고 있는 ‘집밥보다 맛있는 밥’ 콘셉/CJ제일제당
Chapter. 4
20년차 광고맨, 광고를 넘어 시장을 꿰뚫다
$[2010년 최호진님은 제일기획을 떠나 동아제약에 광고팀장으로 합류합니다. 더이상 대행이 아닌, 광고주의 입장에 서서 ‘내 회사의 제품’을 위한 광고를 기획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이는 첫 이직 때처럼 연봉도 대거 삭감한, 매우 도전적인 이직이었습니다. ]
<“경험이 다양하면 중구난방이 될 거란 걱정이 많죠. 하지만 그 모두를 관통할 알맹이를 찾아 키워낼 수만 있다면, 남다른 시야를 얻고 더 큰 기회도 잡을 수 있어요.” >
돌연 제약회사로 이직하셨어요.
광고업계 쪽 지인을 통해 스카웃 제안을 받았어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라 벙쪄 있었는데, 당장 다음날까지 답을 달라는 거예요. 그때 문득 스친 생각이 기회의 신 ‘카이로스’ 이야기였어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이로스는 앞머리는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대머리예요. 한번 지나가 버리면 다신 붙잡을 수 없죠. ‘그래, 기회란 다시 돌아가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고민을 멈추고 덥석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곧바로 면접을 보고 일사천리로 이직했어요.
연봉을 또 한 번 크게 깎고 들어가셨다고요.
다시 미래가치를 따져 본 거죠. 업계 사이클로도 기회가 오고 있다고 판단했어요. 한동안 제약이 좀 주춤했지만, 고령화 현상과 더불어 헬스케어 쪽이 분명 재차 각광받을 것 같았거든요. 뿐만 아니라 동아제약만 해도 그때 이미 80살이 다 된 회사였어요. 광고 대행사가 없던 시절부터 직접 광고를 해왔던 업계인 거죠. 실제로 코래드를 창립하신 분도 제약업계 출신이고요. 광고에서 잔뼈가 굵은 회사인 만큼, 광고맨이었던 제가 기여할 것들이 분명 많을 거라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우물 밖 세상을 경험하고 싶기도 했고요. 20년 넘게 광고를 해왔으니, 40대엔 더 큰 세계에서 놀아보고 싶었죠. 전 한 우물만 파기보단 다양한 경험을 쌓아 서로 융합하는 걸 더 지향했거든요. 흔히들 경험이 다양하면 이도 저도 아닌 중구난방이 될 거란 걱정이 많죠. 하지만 그 모두를 관통할 알맹이를 찾아 키워낼 수만 있다면, 훨씬 남다른 시야를 얻고 더 큰 기회를 잡을 거란 믿음이 있었어요. 이를 위해서라면 연봉 삭감이 두렵진 않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또 한 번의 구름사다리를 건너게 됐던 거죠.
$[최호진님의 리드하에 동아제약은 수많은 광고를 연달아 히트시킵니다. 2012년 ‘풀려라, 4천8백만! 풀려라, 피로!’란 캐치프레이즈의 박카스 광고 캠페인은 그해 메가 히트를 기록, 대한민국광고대상 은상을 수상하고 ‘OO회복은 피로회복부터!’ 등 후속 캠페인도 연이어 큰 성과를 거둡니다. 비단 박카스뿐이 아닙니다. 2015년엔 가그린의 TV 광고 ‘첫 니 가그린’ 캠페인 역시 대한민국광고대상 동상을 수상합니다. 이 같은 연타석 히트와 맞물려 최호진님은 2013년 임원으로 승진, 광고는 물론 마케팅까지 총괄해야 하는 미션을 부여받게 됩니다.]
‘풀려라, 4천8백만! 풀려라, 피로!’ 캠페인은 아직도 박카스하면 떠오르는 대표 광고 중 하나입니다. 주력 포인트가 무엇이었나요?
당시 광고 대행사에 3가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어요. 첫째는 ‘피로’란 단어를 놓치지 않을 것. 광고인들은 단기적 히트를 위해 종종 파격을 택하곤 해요. 하지만 그 때문에 대중이 그 제품의 본질을 놓치게 해선 안 됩니다. 박카스로 치면 ‘대한민국 대표 피로 회복제’라는 이미지를 절대 잃어선 안 되는 거죠. 둘째는 단발성이 아닌, 장기적 캠페인의 틀을 만들라는 것이었어요. 누적된 반복의 힘은 정말 강하니까요. 마지막 셋째는 광고 마지막에 반전 요소를 넣으라는 거였죠. 이게 박카스 광고만의 특색이 돼줄 거라 봤거든요. 이런 요구들을 잘 녹여내 멋진 광고를 만들어준 대행사 분들께 감사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노린 효과들이 적중했고, 매출 성과도 뒤따랐으니까요.
‘풀려라, 5천만! 풀려라, 피로!’ 캠페인의 지면 광고. 캐치프레이즈 원안 중 인구수 부분이 후일 수정됨/동아제약
‘OO회복은 피로회복부터!’ 등 후속 시리즈까지 히트였어요.
광고는 같은 시리즈라도 매번 새롭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때문에 단건의 광고 제작을 넘어, 지속가능한 틀도 꾸준히 고민해야 했죠. 바로 이 맥락에서 한국경제신문과 함께한 ‘박카스 29초 영화제’가 나왔습니다. ‘OO회복은 피로회복부터!’를 주제로 젊은이들에게 영상 공모를 받았고,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숱한 아빠와 딸들의 공감을 자아낸 '대화회복'편이 탄생했죠.
‘박카스 29초 영화제’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만든 TV 광고 속 장면들/동아제약
가그린의 성공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줄곧 넘지 못하던 매출 100억대를 돌파시켰습니다.
가그린의 성공은 광고의 성공이자, 마케팅의 성공이기도 합니다. 가그린 출시가 1982년이에요. 참 괜찮은 제품인데 매출 100억을 끝내 못 넘고 있었죠. 이때도 제품의 본질에 먼저 집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양치만 하면, 굳이 가글까진 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 강했고 이걸 깨부셔야만 했어요. 그래서 반대로 우리가 질문을 재정립해 던지기로 했죠. ‘칫솔질을 했는데도 왜 충치가 생길까요?’ 의심을 심어주는 거죠. 그뒤 “칫솔질만으론 충치균을 다 없앨 수 없다. 때문에 가그린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광고는 성공했어요.
그런데 이때 의도치 않은 일이 생깁니다. 당장 우리 매출이 오른 건 좋았는데, 경쟁 제품인 리스테린이 더 큰 후광 효과를 본 거예요. 이제 광고뿐 아니라 경쟁 제품과의 점유율 전쟁이란 마케팅적 관점의 고민이 시작됐어요. 그래서 나온 기획이 바로 어린이 가글 시장을 공략하는 거였어요. 가그린의 친근함과 안전성을 강조하는 게 특히 부모들에게 소구력이 있을 거라 봤죠. 여기서 ‘첫 니 가그린’ 캠페인이 나왔고, 결과적으로 점유율 면에서 아주 톡톡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가그린의 TV 광고 ‘첫니 가그린’ 캠페인 속 장면/동아제약
목표하신 대로 제품 기획에서부터 광고, 마케팅을 다 아우르는 제너럴리스트가 되셨네요.
사실 앞서 광고팀장을 하면서도, 홍보도 겸하는 커뮤니케이션 실장 역할도 하고 있었어요. 나중엔 마케팅 실장 직함까지 달게 됐고요.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습니다. 제 결재를 받으려 다들 제 방 앞에서 줄을 서야 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덕분에 이때를 기점으로 비즈니스를 한 단계 위에서 넓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생겼습니다.
마케팅을 이루는 4가지 요소가 Product(제품), Promotion(홍보), Price(가격), Place(유통)예요. 흔히 4P라고 하죠. 광고팀장만 할 땐 홍보의 P 하나만 알다가, 마케팅까지 총괄하게 되니 유통과 가격의 P도 얼마나 중요한지 또 알겠더라고요. 이때부터 유통과 가격 정책 등도 열심히 공부하고, 현장에서 실무 경험을 쌓으며 성장해 나갔어요. 제 직무 세계가 더욱 확장된 겁니다.
2017년 제5회 ‘박카스 29초 영화제’에서 시상 중인 최호진님/본인 제공
Chapter. 5
‘경영자 최호진’, 박카스 너머의 성공을 기획하다
$[2016년 최호진님은 동아제약 대표이사로 전격 발탁됩니다. 전무·부사장 등을 거치지 않은 쾌속 승진이자, 제약회사에서 광고인 출신이 최고 경영자에 오르는 파격 인사였습니다.]
제약업계에선 대단히 이례적 인사였습니다.
당시 ‘박카스의 아버지’였던 고(故) 강신호 회장님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시면서, 사장단에 대폭적인 인사가 있었어요. 특히 박카스란 브랜드를 전담하는 동아제약 대표이사는 부담이 대단히 클 수밖에 없는 자리였습니다. 회사에선 더 젊은 동아로의 변화와 혁신을 기대했기에 외부 출신의 ‘굴러온 돌’이기도 한 저를 그 자리에 임명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리더십 측면에서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아요.
동아제약은 보수적인 분위기의 회사였어요. 입사 당시 제가 ‘푸조’라는 프랑스 외제차를 타고 있었는데, 인사팀에 “이 차를 끌고 다녀도 되냐”고 지레 겁먹고 물을 정도였죠. 그간 다닌 광고회사들은 분위기가 자유로운 편이었으니 상대적으로 더 그리 느끼기도 했죠.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꼭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혁신적 조직에서 온 사람이라고 꼭 성공 모델을 갖고 있으리란 법은 없거든요. 게다가 고작 한 사람이 조직 전체를 바꿔낼 수도 없고요. 무엇보다 경영인의 진짜 중요한 책무는 조직 분위기를 입맛대로 요리조리 바꾸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조직에 필요한 새 성장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잖아요. 그에 필요한 단초만 세워도 큰 성공이란 마음으로 욕심을 비웠습니다. 홈런 치려고 욕심 내다 안타도 못 치면 실패잖아요. 점진적으로 공감 가능한 변화를 추구했기에, 직원들도 큰 무리 없이 잘 따라준 것 같습니다.
‘대표이사 최호진’에게 부여된 미션은 무엇이었나요?
동아제약은 1932년에 세워졌고, 박카스의 첫 출시가 1961년이에요. 제 대표 취임 당시 박카스의 나이가 이미 55살이었어요. 사업의 새로운 방향성이 절실했죠. 가장 큰 문제는 박카스가 차지하는 전체 매출 비중이 60%가 넘어 지나치게 크다는 점이었어요. 박카스를 뺀 나머지 부문은 연간 160억원의 적자 상태였고요. 이 구조를 개선하는 게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최호진님의 대표이사 취임 이래 동아제약은 제품 다변화에서 비약적 개선을 이뤄냅니다. 취임 직후인 2017년 60%에 달하던 박카스 매출 비중은 2021년 44%, 2023년 38%로 절반 가까이 감소합니다. 그럼에도 기업의 전체 매출과 영업이익은 오히려 상승했습니다.]
박카스 의존도 개선 전략의 주안점은 무엇이었나요?
동아제약이 그간 제품 다변화 시도를 하지 않은 게 아니었어요. 과거에도 매년 신제품을 30개씩 개발해 출시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실패였죠. 전 그 원인으로 ‘장기적 기획의 부재’를 꼽았습니다. 아이를 낳기만 하고 알아서 크라는 식이면 안 되잖아요. 많이 팔아내면 인센티브 던져주는, 판촉에만 집중하는 전형적인 방식은 이제 더는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거든요.
제 취임 이후론, 이런 관행부터 싹 바꾸어 나갔습니다. 단순히 출시하고 끝이 아니라 계속 추적 관찰하면서 어떤 전략으로 제품을 키워나갈 것인지, 우리만의 성장 전략을 고민하도록 한 거죠. 이 변화된 기조에서 탄생한 결실 중 하나가 바로 독일제 수입 비타민 ‘오쏘몰’의 성공이었습니다.
동아제약이 수입해 판매하는 독일제 비타민 오쏘몰/동아제약
오쏘몰은 연매출 10~20억원대에서 이젠 1000억원을 넘을 정도로 성장하며 동아제약의 효자 수입 상품이 됐습니다.
물론 이 제품 자체의 성공도 기쁩니다. 그러나 제가 중시하는 기획 중심 체제로 바꾸고 나서의 성과였다는 점이 더욱 뿌듯합니다. 사실 오쏘몰 도입은 제가 대표이사가 되기 한참 전부터 시작됐어요. 제품 자체의 역량이 컸기에 굉장히 안목 있는 선택이었죠. 이런 좋은 제품에 장기적 관점의 기획이 더해져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 겁니다. 프리미엄한 이미지를 바탕으로 브랜드 대전략을 세웠고, 그에 맞춰 굉장히 일관된 마케팅을 꾸준히 펼쳐 갔죠. 이렇게 구축된 체제는 비단 오쏘몰의 성공에만 머물지 않을 단단한 발판이 돼 줄 거라 자부합니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호진님/리멤버
Chapter. 6
팔색조로 누빈 35년, ‘프로 최호진’에게 업이란?
$[2022년 말 최호진님은 부회장으로 승진하며 동아제약 경영 일선에서 물러납니다. 현재는 프리랜서 경영·기획 자문가로서의 활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프로란 본인만의 업을 정의하고 만들어가는 사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신 소회는 어떠신가요?
아쉬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에요. 마침 역대 최고 매출과 영업이익을 냈던 터라 더욱 그랬습니다. 취임 때 ‘비전 2025’라고 해서 9년 후의 중장기 목표를 세웠거든요. 제가 2016년 말부터 2022년까지 했으니, 야구 투수로 비유하면 6회까지 잘 던지고 이제 3회만 남은 상태에서 물러난 거나 마찬가지였죠. 어느 투수나 완투승을 노리잖아요. 그만큼 아쉽긴 했죠.
그런데 생각을 바꾸고 나니 그저 감사해지더라고요. 동아제약이 2013년 지주사 체제로 바뀐 뒤 제가 첫 외부 출신 부회장 자리에 올랐으니, 어쩌면 회사에서 제가 가장 출세한 사람 아닌가 싶더라고요.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더구나 6회까지 잘 던졌지만 7회에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면 박수 받으며 내려오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지금으로선, 승리 투수 자격을 갖추고 물러날 수 있어서 참 다행이고 영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후임 대표이사는 ‘비전 2032’라고 해서 창립 100주년인 2032년까지의 중장기 목표를 맡게 됐어요. 공교롭게도 햇수로 또 9년이네요. 어찌 보면 제가 남긴 3회의 마무리 투수이자 새로운 경기의 선발 투수를 맡은 거죠. 그분께 “못다 한 나의 마무리를 부디 잘 마쳐 주시고, 새롭게 시작할 당신의 경기도 꼭 멋지게 치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내려왔어요.
프리랜서 자문 활동은 어떤 계기로 준비하시게 됐나요?
주변에서 책을 한번 써보라고 권유해 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강연도 틈틈이 했고요. 그런데 그렇게만 시간을 보내긴 너무 아쉽더라고요. 도움이 필요한 기업들이나 후배들에게 제 경험과 역량을 자유롭게 나눠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특히 저는 평생 기획을 해온 사람이잖아요. 기획이라는 건 ‘어떤 일이 되게끔 무언가를 꾸미고 추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하죠. 그 부문에서 분명 의미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염두에 둔 회사명은 ‘파란’입니다. ‘깰 파[破]’에 ‘알 란[卵]’, 말 그대로 ‘알을 깬다’는 의미죠. 알은 밖에서 깨는 게 아니라 안에서 깨는 거잖아요. 모든 조직의 유의미한 변화는 밖이 아니라 안에서 이뤄지는 거예요. 제가 그래왔듯, 스스로의 진정한 변화를 꿈꾸는 분들께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30년 가까이 광고를 주된 업으로 삼아오셨어요. 본인만의 관점에서 광고를 정의해 보신다면요?
‘넓을 광[廣]’에 ‘알릴 고[告]’, 즉 ‘널리 알린다’는 게 광고잖아요. 그런데, 요즘 광고인들은 이 정의에 회의를 느낄 거예요. 1대1 커뮤니케이션이 점점 늘어가면서 아예 “광고는 죽었다”고까지 말하는 분들도 많죠. 그러다 보니 최근엔 많은 광고인들이 제품의 호감도나 설득도를 높이는 일보단 어떻게든 주목도를 높이는 쪽에만 집중해요. 소재적으로는 전보다 훨씬 파격적이고 현란한 것들에 주목하고요.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럼 광고의 본질은 뭘까요? 전 제품에 주목만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호감을 일으켜 서로 통하게 하는 소통의 역할이 광고의 진짜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물건과 사람이든, 사람과 사람이든 서로를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죠. 마치 영화 ‘ET’에서 외계인과 소년이 손가락을 맞대며 만나는 것처럼 말이죠. 즉,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연결해내는 게 바로 광고의 본질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발전해도, 무언가를 만들고 파는 사람은 그걸 사는 사람과 연결되고자 할 거예요. 이 본질에 집중하면서 둘 사이의 접점을 어떻게 잘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광고맨의 쓰임은 늘 살아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비단 광고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에요. 마케팅이나 브랜딩, 더 넓게는 경영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죠. 동아제약 대표이사 시절, 박카스 병이 올드하다며 캔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캔으로 가야 젊은 층을 흡수하는 것 아닌가’하는 의견들이 있었거든요. 전 반대했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신기하고 젊은 느낌 덕에 캔 버전이 많이 팔릴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의 이미지를 깎고 자칫 음료들과 경쟁하는 음료수로 보이게 하는 등 본질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었죠. 지금 20대들도 3040이 되면 박카스를 찾아 먹게 돼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말고, 후배들에게 잘 물려주자”고 설득했습니다. 긴 안목을 갖고 본질을 지키면서 변화와 발전을 꾀하는 것, 이게 정말 어려운 일이면서도 모든 일을 ‘진짜 되게’ 만드는 힘인 겁니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최호진님/리멤버
최호진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프로란 본인만의 업을 정의하고 만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직업’이란 단어를 보면 ‘직’과 ‘업’이 주는 뉘앙스가 각기 달라요. 직은 직장이나 직무처럼 자신이 속해있는 그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죠. 반면 업은 대업, 과업처럼 그 사람이 마음을 담아 해나가고 있는 일 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누가 어떤 업을 하고 있다고 들으면 그 사람에게선 프로가 연상되죠.
저는 겉보기에 이 업이란 걸 참 많이 바꿨어요. 금융업에서 광고업, 그리고 제약업까지. 하지만 이것들이 제 진짜 업을 의미하진 못한다고 생각해요.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업이 무엇일까 저 스스로 저만의 업을 정의하고 만들어 봤습니다. 제 진짜 업은 바로 ‘기획’입니다. 저는 기획하는 업자, 즉 일이 되게끔 꾸미는 사람이었던 거죠.
여러분도 자신만의 업을 통찰해내고 정의해보세요. 그럼 그때부턴 자기만의 방식으로 문제들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게 될 거예요. 그렇게 하루하루 실력을 쌓다보면, 결국 그 업에서 각광받는 프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모두들 건투를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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