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성
現 영화·드라마 음악 감독, 現 음악 스튜디오 모노폴 대표
국내 역대 박스오피스 1·2위 흥행작 '명량'·'극한직업'을 비롯, 총 4편의 '천만 영화'를 탄생시킨 충무로 대표 영화 음악 감독입니다. 1999년 아마추어 대학생 신분으로 2년여간 100여 편의 영화 예고편 음악을 만든 뒤, '안녕! 유에프오'(2002)를 시작으로 영화 음악 감독에 데뷔했습니다. 현재까지 총 70편 이상의 영화 음악을 제작했고, 2014년부턴 영역을 넓혀 ‘SKY 캐슬’·‘나의 해방일지’ 등 다수의 히트 드라마 음악 작업을 총괄했습니다.
‘명량’ ‘극한직업’ ‘범죄도시2’ ‘파묘’ 무려 4편의 ‘천만 영화’ 음악을 만든 작곡가가 있습니다. 이밖에도 ‘시라노;연애조작단’ ‘최종병기 활’ ‘1987’ 등 그가 음악을 책임진 영화만 70여 편, 도합 7000만이 넘는 관객을 극장으로 이끈 충무로 대표 흥행 음악 감독이죠.
영화만이 아닙니다. ‘SKY 캐슬’ ‘멜로가 체질’ ‘나의 해방일지’ 등 다수 히트 드라마 음악을 총괄하기도 했죠. 바로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 김태성님의 이야기입니다.
<“작품이 안되면 늘 제 음악 탓을 해요. 그래야 하나라도 더 배우니까요. 그러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좋아하는 일이지만 싫어지는 순간이 너무 많잖아요.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기적입니다.”>
처음부터 성공가도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손대는 영화마다 흥행 참패였죠. 입봉 후 10년 가까이 실패작만 쌓여 이른 은퇴를 결심할 정도였는데요. 이처럼 긴 좌절을 딛고 그를 국내 최고의 흥행 음악가로 변신케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창작의 고통과 실패의 쓰라림에도 좋아하는 일을 계속 좋아할 수 있는 김태성님만의 저력은 무엇일까요? 누구나 한 번쯤 봤을 법한 히트 영화·드라마 음악의 흥미로운 탄생 스토리와 함께 자세히 담아봤습니다.
서울 강남구 본인의 음악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김태성님/리멤버
Chapter. 1
200억짜리 프로젝트에 합류한 스무살 대학생?!
$[중학생 시절부터 김태성님은 동네 ‘인기 작곡가’였습니다. 다니던 교회 성극 음악을 도맡아 제작하고 근방 교회에서도 배우러 찾아올 정도의 실력자였죠. 음악적 재능을 살려 김태성님은 1998년 경희대 작곡과에 진학합니다.]
<"필요한 음악을 만들어주겠다면서 무작정 들이댔어요. 새파란 스무살짜리가 정말 겁도 없었죠.">
중학교 때 작곡을 시작하셨다고요.
교회 문학의 밤 같은 행사 때 종종 성극을 지어 올렸어요. 거기 쓰일 음악을 제가 직접 만들었죠. 나름 지역 교회 커뮤니티 안에선 인정을 좀 받았지만 실은 아마추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어요.
음악을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하셨나 봐요.
일찍부터 좋아하는 게 명확했어요. 제 어릴 때만 해도 전래 동화 구술 테이프가 유행이었는데 그걸 매일 닳도록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땐 영상이 흔치는 않던 때라 제 또래면 비슷한 경험들이야 많으실 텐데, 전 좋아하는 포인트가 좀 독특했어요.
저는 이야기보단 그 사이사이에 삽입된 음악들이 너무 좋았거든요. 그걸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엉뚱한 상상에 빠지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또다른 이야기로 빨려 들어갔죠. 부모님이 맞벌이셔서 홀로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잠깐 딴 세상에 가 있는 듯한 기분이 좋았어요. 이렇게 깨작대며 음악을 듣고 만든 경험들이 모여 여기까지 온 것 같네요.
대학에선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셨습니다. 음악 엘리트 코스를 밟으셨어요.
솔직히 말하면 음악을 제도권 안에서 제대로 공부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싶던 건 맞지만, 막연한 꿈이었지 체계적인 준비가 있던 건 아니에요. 고등학교도 인문계를 나왔고 음대 진학도 뒤늦게 결심했죠. 성적이 애매해 공부로 좋은 대학 가긴 어려웠거든요. 대신 음악을 혼자서도 곧잘 하니 부모님이 음대를 추천해주셨고 그래서 작곡과에 들어간 거예요.
입학하고 보니 예술중·고를 나온 음악 엘리트들이 많더라고요. 인문계 출신인 저를 되게 신기해 할 정도로요. 저도 어차피 클래식을 배우려던 게 아니다 보니 학과 공부는 내팽개치고 하고픈 음악을 하러 학교 밖으로 많이 나돌았습니다. 1학년만 마치고 바로 휴학도 했고요. 군대부터 가려고요.
$[이듬해 김태성님은 돌연 입대를 미루고 ‘로보트 태권V 부활 프로젝트’에 참가합니다. 70~80년대를 풍미한 국산 애니메이션 ‘로보트 태권V’를 21세기 버전으로 리메이크하는 민간 프로젝트였죠. 원조 제작진인 유현목·김청기 감독이 참여하고 총 예산 200억원이 들어가는 이 대형 프로젝트에 겨우 만 스무살의 김태성님이 파일럿 에피소드 음악 감독으로 낙점됩니다.]
갑자기 입대를 늦추고 ‘로보트 태권V 부활 프로젝트’에 참여하셨습니다.
입대까지 텀이 있다 보니 이런저런 일들을 알아보던 중 어느날 신문에서 ‘로보트 태권V가 부활한다’는 기사를 보게 돼요. 곧장 신문사에 전화해 스튜디오 감독님을 소개받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뜸 “애니메이션에 필요한 어떤 음악이든 만들어드리겠다”고 질렀어요. 정 안되면 입대하면 됐으니까요.
당연히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새파란 스무살짜리한테 덜컥 뭘 맡길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웬걸, “한번 만들어 갖고 와 봐”라고 하시는 거예요. 발등에 불이 떨어졌죠. 실은 그때 미디(디지털 작곡 툴)조차 다룰 줄 몰랐거든요. 부랴부랴 아는 형한테 배워 3일 만에 15곡을 만들어 갔습니다. 진짜 죽을 둥 살 둥 했죠. 끽해야 한두곡쯤 만들 줄 아셨는지 엄청 놀라시더라고요. 그 덕인지 제게 파일럿 에피소드 음악 감독 자리가 주어졌어요. 입대부터 바로 연기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프로젝트가 무산돼 버렸어요.
반년쯤 지나 갑자기 프로젝트 전체에 제동이 걸렸어요. 알고 보니 판권 문제가 명확히 정리되지 않아 다른 제작사에서도 비슷한 리메이크를 추진 중이었던 거예요. 법정 다툼으로 이어져 결국 프로젝트 자체가 흐지부지됐습니다. 휴학하고 입대까지 연기해가며 음악도 많이 만들어 놨는데 허무하게 붕 떠버린 거죠.
서울 강남구 본인의 음악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김태성님/리멤버
Chapter. 2
초짜 음악 감독, 예고편 업계를 주름잡다
$[2001년 김태성님은 배우 유오성 주연의 영화 ‘챔피언’(2002) 예고편 음악 감독을 맡게 되며 영화 음악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챔피언’ 예고편 음악은 어떻게 맡게 되신 거예요?
국내 제작사들한테 무작정 전화를 돌리고 다녔어요. “무조건 마음에 드는 음악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요. 당시엔 사람들이 다 착했던 것 같아요. 어린애 말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하나같이 다 와 보라고 하셨거든요.
무작정 제 데모 음악 CD들을 싸들고 찾아가 PD님들한테 나눠 드렸어요. 그 CD가 흘러 흘러 당시 픽셀이란 가장 유명한 예고편 제작사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이곳이 바로 ‘챔피언’ 예고편 음악을 맡은 회사였어요. 한참 동안 저를 잊고 계셨다가 어느날 급히 저를 찾으시더라고요. 투자사가 믹싱 하루 전날 돌연 곡이 마음에 안 든다며 바꾸라고 지시했다는 거예요. 하루 만에 새로운 곡을 써 줄 수 있겠냐 해서 덥석 알겠다고 했습니다. 밤새 죽어라 곡을 만들었고 다행히 그게 채택됐어요.
영화 본편과 다른 예고편 음악만의 특징이 있다면요?
대다수는 본편 음악 감독이 예고편 음악도 함께 만들거나, 본편 음악을 뚝 잘라 예고편 음악을 만든다고 생각하죠. 전혀 아니에요. 둘은 철저히 분리돼 있어요. 작업 시기부터 다릅니다. 본편 음악은 영화 후반 작업 때부터 진행되는데, 그때쯤이면 예고편은 이미 만들어져 영화 홍보에 쓰이고 있죠. 서로 목적도 다릅니다. 본편 음악이 전적으로 스토리텔링을 위해 존재하는 데 반해, 예고편은 철저히 마케팅 영역에 있어요.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 할 포인트를 극대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거죠.
$[2000년대 초반은 국내 영화 산업의 급속한 성장기였죠. 김태성님은 이 시기 ‘연애소설’(2002), ‘라이터를 켜라’(2002), ‘황산벌’(2003) 등 총 100여 편의 예고편 음악을 제작하며 ‘한국 영화 르네상스기’를 대표하는 예고편 음악 감독으로 자리매김합니다.]
2년여간 무려 100편 이상의 예고편 음악을 만드셨어요.
당시 예고편 음악 시장은 픽셀과 모팩이란 두 회사가 양분 중이었어요. 그 나머지를 다 제가 맡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편당 이삼백만원을 받고 한달에 서너편씩은 작업했으니 벌이는 진짜 짭짤했어요. 본편 음악 감독 초창기보다 이 때가 돈은 더 많이 번 것 같아요.
지금은 아마추어 대학생한테 예고편 음악을 맡기는 데가 아예 없을 거예요. 제대로 된 인프라 없이 그저 주먹구구였던, 모든 게 알음알음 이뤄지던 때니까 가능했던 일이죠. 어설펐던 건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고요. 자질은 좀 있었을지 몰라도 아무 전략도 없이 막무가내로 곡을 써댔으니까요.
/'연애소설'(제작 팝콘필름, 배급 코리아픽쳐스), '라이터를 켜라'(제작 A-sarts 엔터테인먼트, 배급 시네마 서비스), '황산벌'(제작·배급 씨네월드)
벌이가 괜찮았는데 왜 예고편 음악 작업을 관두셨나요?
이쪽 음악을 하는 대다수의 최종 목표는 영화 본편 음악 감독일 거예요. 저도 그랬던 거죠. 물론 초반엔 예고편 음악도 영화 음악의 일부라 생각해 열심히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만들어도 예고편 음악은 작품으로 인정받진 못 하더라고요.
갈수록 본편 음악의 갈망이 커졌어요. 그리고 자신감도 있었고요. 예고편 음악을 잘하니까 본편도 잘할 거라 스스로 믿은 거예요. 뭘 몰라도 정말 한참 몰랐던 거죠.
서울 강남구 본인의 음악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김태성님/리멤버
Chapter. 3
꿈꾸던 영화 음악 감독 데뷔! 하지만 연이은 흥행 참패
$[김태성님은 2004년 개봉한 ‘안녕! 유에프오’를 통해 영화 본편 음악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이 영화는 이범수, 고(故) 이은주 등 주연 배우들의 호연과 재치 있으면서도 감동적인 시나리오로 기대를 모았으나 흥행에는 크게 실패합니다. 이후로도 ‘백만장자의 첫사랑’(2006), ‘눈부신 하루’(2006) 등 당대 충무로 기대작들의 음악 감독을 연이어 맡게 되지만 이렇다 할 흥행작을 남기지 못합니다.]
<"좋은 음악이 다 좋은 영화 음악이 되는 건 절대 아니더라고요. 좋은 영화 음악이 다 좋은 음악은 아닌 것처럼요.">
‘안녕! 유에프오’로 영화 음악 감독에 정식 데뷔하셨습니다. 발탁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그 무렵 생겨난 ‘필름메이커스’란, 영화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영상 제작자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는데 여기 영화 음악 관련 첫 구직 게시글이 “공짜로 음악 만들어 드립니다”란 제 글일 거예요. 정말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았죠. 덕분에 한창 예고편 음악을 만들면서도 단편 영화 쪽으론 ‘맨땅에 헤딩’해 가며 꾸준히 작업 경험을 쌓고 있었어요.
그러다 우연히 큰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당시 ‘안녕! 유에프오’의 음악 감독이 제작진과의 음악적 견해차로 관두는 일이 있었는데, 공석이 된 바로 그 자리에 제가 지원 제안을 받게 된 거예요. 예고편 분야론 나름 좋은 업계 평판을 쌓아둔 덕이었죠. 쟁쟁한 베테랑 음악 감독님들도 더러 지원하셨는데 결국 제가 뽑혔습니다. 너무 뜻밖이면서도 영광스러운 자리였어요.
/'연애소설'(제작 우리영화, 배급 튜브엔터테인먼트), '백만장자의 첫사랑'(제작 보람영화사, 배급 롯데쇼핑(주)롯데엔터테인먼트), '눈부신 하루'(제작·배급 인디스토리)
예고편, 본편 모두 ‘맨땅에 헤딩’으로 기회를 따내셨네요.
주변에선 저를 다 비웃고 욕했어요. “쟤는 아직도 철이 없다” “언제 포기하고 정신 차릴까”라고요. 영화 음악을 하고 싶으면 대학원에서 관련 학위를 따거나 유명 작곡가 밑에 조수로 들어가 배우는 일이 다반사였거든요.
왜 그리 무모하게 ‘맨땅에 헤딩’만 해댔는지 아직도 잘은 모르겠어요. 어쩌면 제가 만화를 좋아해서인지도 몰라요. 어려서부터 ‘H2’ 등 아다치 미츠루의 소년 만화에 빠져 살았거든요. 거기 나오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무모해요. 밑도 끝도 없이 도전하고 꺾이죠. 하지만 스스로 개선점을 찾아내 각성하고 마침내 극복해내죠. 이런 삶을 동경하다 보니 없던 용기도 낼 수 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원래 겁도 수줍음도 많은 성격인데 음악만 관련되면 기라성 같은 제작자, 감독님들이 무섭지가 않더라고요.
좋은 시나리오로 호평받던 작품이지만 흥행엔 실패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큰 기대를 받았던 작품이에요. 데뷔작이긴 했지만 김진민 감독님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조감독 출신이었고, 각본가님들도 아주 유명하고 실력 있는 분들이셨죠. 배우님들 연기력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고요. 때문에 제작사에서도 되게 야심차게 준비했던 작품입니다. 저는 제가 금방 잘될 줄 알았어요. (웃음)
하지만 제가 너무 서툴렀어요. 지금도 TV에서 가끔 이 작품을 보면 떼굴떼굴 굴러요. 부끄러워서요. 그땐 영화 음악이 어때야 하는지 개념이 아예 없었거든요. 결국 저 때문에 실패한 겁니다. 실제로 제 초창기 영화들은 줄줄이 잘 안 됐잖아요.
흥행 실패가 음악 감독만의 책임은 아닐 텐데요.
음악 자체로는 좋았다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좋은 음악이 다 좋은 영화 음악이 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좋은 영화 음악이 다 좋은 음악은 아닌 것처럼요. 영화 음악은 그 자체만의 작법이 있고 아주 중요한 미션이 있습니다. 헌데 그걸 모르고 아무 전략 없이 음악을 만들고 넣었으니 영화에 도움이 안 될 수밖에요.
그럼에도 일은 안 끊겼으니 진짜 운이 좋았습니다. 다들 뭘 모르는 시기니까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냥 망해 가면서들 배운 거죠. 그러고 보면 한국 영화와 저는 우연찮게도 성장의 궤를 같이했던 것 같아요.
서울 강남구 본인의 음악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김태성님/리멤버
Chapter. 4
실패가 무너뜨린 아집… 영화 음악 본질 깨닫고 흥행 작곡가로 우뚝!
$[2008년은 실패가 거듭되던 김태성님께 분수령이 된 해였습니다. 그의 커리어에 가장 큰 전환점을 선사한 두 작품, ‘가루지기’와 ‘크로싱’이 바로 이 해에 개봉했기 때문입니다.]
<"생각 하나 고쳐먹었을 뿐인데 많은 결과가 달라지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아집도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2008년을 커리어의 가장 큰 변곡점으로 꼽으십니다.
그땐 제가 영화 음악을 관두려던 시절이에요. 꿈이고 뭐고 예고편 음악만 하며 먹고살아야겠다고 좌절하던 무렵이죠. 제 모든 걸 쏟아부어 만든 ‘가루지기’마저 실패했던 때거든요. 이 영화는 전형적 섹시 코미디물이지만, 저나 감독님 모두 이 작품이 그저 그런 유치하고 저렴한 작품으로 소비되지 않길 바랐어요. 우리나라에서 성을 다루는 코미디는 나름 역사가 깊고 족보 있는 장르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가루지기’를 한국 성인 영화계의 새로운 고전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음악도 굉장히 수준 높게 들려주려 했고요. 불가리아의 소피아 필하모닉이란 세계적 오케스트라까지 동원했고 그 어느 때보다 흡족한 음악이 나왔어요. 그러나, 결과는 완벽한 대실패였습니다.
원인이 무엇이었다고 보세요?
관객들은 야하고 웃긴 영화 한 편을 보려고 극장에 왔던 거예요. 헌데 쓸데없이 너무 고퀄리티인 데다 전반적 분위기와 안 맞는 진지하고 슬픈 음악들이 곳곳에 깔려있으니 당황할 수밖에요. 결국 제가 하고픈 음악만 들려주려다 ‘가루지기’란 영화의 본질을 무시한 게 패인이었던 거죠. 이땐 그걸 미처 몰랐습니다.
그 때문인지 뒤이어 작업한 ‘크로싱’마저도 실패했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크로싱’은 제게 단순히 실패로만 기록될 수 없는 작품이에요. 영화 음악 감독으로서의 김태성은 이 영화 전과 후로 나뉠 만큼 제게 아주 큰 터닝 포인트를 선물해줬거든요.
사실 한창 작업할 땐 감독님과 정말 많이 싸웠습니다. 당시 동유럽 클래식 음악에 빠져 있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낯선 사운드도 집어넣고 불협화음도 써 가면서 되게 세련된 음악을 만들려 했거든요. 그게 감독님은 마음에 안 드셨던 거예요. “왜 그리 음악을 어렵게 만드냐”며 맨날 따지셨죠. 그러던 어느날, 여느 때처럼 저한테 화가 나 소리를 지르시다가 돌연 눈물을 보이고 우시더라고요. 제가 너무 말을 안 들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순간 벙찌더라고요. 너무 심했나 싶어 죄송하기도 했고요. 결국 제 고집을 꺾었습니다. ‘어차피 이 영화 끝나면 관둘 거잖아. 원하시는 대로 한번 해드리자’고 생각을 고쳐먹었죠. 복잡한 음악은 대부분 없애고 감독님 의도대로 음악을 다시 깔았어요. 물론, 그래도 흥행은 실패였습니다. 하지만 기분 좋은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우선 이 영화로 큰 상들을 받게 됩니다. 그해 한국 영화평론가협회상과 춘사국제영화제에서 음악상을 탔어요. 뒤이어 제 음악이 해외까지 알려지기 시작해요. 녹음 때 뵀던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님이 ‘크로싱’ 음악을 너무 좋아해 방송국 관계자들한테 막 뿌리고 다니신 거예요. 급기야 그게 HBO(미국 유명 드라마 제작사)까지 흘러가 사장님이 절 한번 만나보겠다고 한국에 찾아오시는 일까지 벌어졌죠. 생각 하나 고쳐먹었을 뿐인데 많은 결과가 달라지더라고요. 그러면서 제 아집도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가루지기'(제작 프라임 엔터테인먼트, 배급 쇼박스), '크로싱'(제작 캠프B, 배급 빅하우스(주)벤티지홀딩스)
$[2008년의 연이은 실패를 기점으로 김태성님은 ‘시라노;연애조작단’(2010), ‘최종병기 활’(2011),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2012), ‘타워’(2012) 등에서 연달아 수백만 흥행을 터뜨리며 히트 영화 음악 감독으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합니다.]
‘크로싱’ 이후로는 흥행 실패작이 거의 없어요.
그 다음 ‘시라노;연애조작단’은 아예 힘을 빼고 쉽게 만든 작품이에요. 실제 연주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미디로만 만들었거든요. 그럼에도 이상하게 평이 괜찮더라고요. 여기저기서 “음악 좋다”는 전화를 많이 받았죠. 그러면서 차츰 깨닫습니다. ‘시나리오를 잘 따라가기만 해도 성공이구나.’ 제가 놓친 영화 음악의 아주 중요한 미션이 있던 거예요. 어쩌면 음악은 영상보다 더욱 중요한 이야기 전달자라는 거죠.
/'시라노;연애조작단'(제작 명필름, 배급 롯데쇼핑(주)롯데엔터테인먼트), '최종병기 활'(제작 다세포클럽·디씨지플러스,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제작 AD406·두타연, 배급 넥스트 엔터테인먼트 월드), '타워'(제작 CJ엔터테인먼트·더타워픽쳐스, 배급 CJ엔터테인먼트)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요?
영화 음악은 관객들이 어느 씬에서 몰입하고 어디서 힘을 빼야 하는지, 각 장면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핵심 표지예요. 연기, 대사만으론 시나리오 저변의 모든 맥락을 담아낼 수 없거든요. 가령, 코미디 영화에 악당이 나와 주인공을 위협하는 장면에 음악을 입힌다고 해봐요. 예전의 저라면 별생각 없이 무서운 음악을 깔았을 거예요. 그러나 지금의 전 음악을 아예 안 깔 겁니다. 자칫 음악의 무거운 에너지가 그 이후로도 영향을 미쳐 분위기를 쭉 가라앉힐 수 있거든요. 그럼 코미디란 이 영화의 본질은 망가지는 거죠.
이걸 깨닫고 나니 그제서야 음악, 영상을 너머 관객들이 보이더라고요. 작품에 임할 때마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 기대하는 본질적 포인트가 뭘까’부터 고민하게 된 거죠. 물론 시나리오나 감독, 배우 등에 따라 구현 방식은 천차만별이지만 고민의 요점은 지금도 늘 똑같습니다. 이렇게 차근차근 깨닫는 것들을 하나둘 접목했더니 그후론 실패가 거의 없었네요.
서울 강남구 본인의 음악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김태성님/리멤버
Chapter. 5
충무로 최고 흥행 작곡가, ‘천만 영화’의 별을 쏘다
$[2014년 김태성님은 영화 ‘명량’의 음악 감독을 맡게 됩니다. 이 작품은 같은 해 관객 1761만명을 동원한 역대 최고 한국 흥행 영화로,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극한직업’(2019), ‘범죄도시2’(2022), ‘파묘’(2024) 등의 음악을 연이어 제작, 무려 4편의 ‘천만 영화’ 흥행을 이끌어냅니다. 명실상부 국내 최고 히트 영화 음악 감독으로 발돋움하게 된 겁니다.]
역대 1위 한국 흥행 영화의 음악 감독이세요.
‘명량’은 하늘이 내린 기회였어요. 당시 ‘시라노;연애조작단’이 잘되고 나서 두 편의 시나리오를 받아요. 하나가 바로 김한민 감독님의 ‘최종병기 활’, 다른 하나가 ‘7광구’였습니다. 저는 김 감독님 각본 특유의 에너지가 좋아 전자를 골랐는데 주변에선 “미쳤다”는 반응이었죠. 당시만 해도 ‘7광구’가 워낙 기대작이었으니까요. 그때 선택을 잘못했다면 김 감독님의 ‘이순신 3부작’과도 못 만났을 겁니다.
음악적 측면에서 히트작들의 흥행 요인을 꼽아 보신다면요?
연출자들도 자기 영화 이해가 완벽하진 않아요. 작품에 대한 객관화가 안 된 경우도 많죠. 이때 음악이 나서 영화의 본질을 끄집어내 줄 수 있어요. 음악을 듣고 비로소 감독의 무의식에만 있던 중요한 무언가가 이끌려 나오기도 하고요. 제 블로그에선 ‘음악으로 연출하는 사람’이란 문구로 저를 소개하는데, 이 말처럼 영화 음악은 그 나름의 작품 해석을 반영한 연출이기도 해요. 음악과 영상의 연출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영화의 본질을 구현해낼 때 비로소 흥행도 뒤따라 오는 것 같아요.
/'명량'(제작 빅스톤픽쳐스, 배급 CJ ENM MOVIE), '한산: 용의 출현'(제작 빅스톤픽쳐스,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노량: 죽음의 바다'(제작 빅스톤픽쳐스,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극한직업'(제작 어바웃필름·영화사해그림·CJ엔터테인먼트, 배급 CJ엔터테인먼트), '범죄도시2'(제작 (주)홍필름·빅펀치엔터테인먼트·비에이엔터테인먼트, 배급 ABO엔터테인먼트·플러스엠)
$[업계 안팎에서 김태성님은 ‘장르 영화 음악의 귀재’로도 불립니다. 올해 개봉한 ‘파묘’를 비롯해 ‘검은 사제들’(2015), ‘사바하’(2019) 등 장재현 감독의 ‘오컬트 3부작’ 음악을 모두 맡아 “김태성표 음악으로 오컬트 장르만의 묘미를 살렸다”는 평을 얻었죠. 특히 ‘사바하’는 같은 해 ‘기생충’을 제치고 청룡영화상 음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장르적 특성이 강한 오컬트 영화 3편의 음악을 내리 만드셨어요.
이제껏 한국에서 오컬트라 칭하며 나온 영화 대부분은 그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했어요. 귀신이나 괴물이 나온다고 다 오컬트가 아니거든요. 그냥 판타지죠.
저와 장 감독님이 바라보는 오컬트는 지극히 ‘현실’에 기반한 장르예요. 초자연적 현상을 다루긴 하지만 자극과 공포에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아주 평범한 일상에 나타나는 찰나의 이질적 순간과 거기서 파생되는 미묘한 균열에 주목하는 장르인 거죠. 때문에 그 어느 장르보다 리얼하고 생생해야 해요. 장 감독님과 그런 생각의 결이 잘 맞아 의기투합하게 됐어요.
/‘검은 사제들’(제작 오퍼스픽쳐스·영화사집, 배급 CJ엔터테인먼트), ‘사바하’(제작 외유내강·필름케이, 배급 CJ엔터테인먼트), '파묘'(제작 쇼박스·파인타운 프로덕션, 배급 쇼박스)
음악에서도 리얼함을 배가하려는 노력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매일 고민했던 게 ‘어떻게 하면 이 세계를 관객들이 더 실제라고 믿게 할까’였으니까요. 때문에 ‘진짜’를 보여줄 수만 있다면 뭐든 했던 것 같아요. ‘사하바’ 땐 티베트까지 찾아가 고산 지대 수도승들의 목소리와 연주를 직접 담았고, 이번 ‘파묘’ 속 주술 장면들에도 실제 일본 현지 스님들의 소리를 담아냈죠.
상당수 관객들이 그저 부분적 음향 효과로만 생각했던 대부분의 소리도, 알고 보면 세심히 디자인하고 설계한 음악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파묘’의 이글대는 불꽃이나 흐르는 물 소리 등은 전부 규칙적 리듬과 음가로 구현한 음악이에요. 단순히 불, 물 소리를 잠깐 들려주고 끝내려던 게 아니거든요. 일련의 장면을 통해 이 영화만의 오묘한 분위기를 잡아야 했기에 일정한 플로우로 구축된 음악으로써 구현해낸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파묘’의 첫 무덤 등장씬에 나타난 정적조차 철저히 설계된 음악의 일부예요. 등장 직전까지 흐르던 베이스 사운드를 일시적으로 확 끊어 관객이 느낄 낯설음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이었던 거죠.
덕분에 흥행을 넘어 음악적 작품성도 높은 평가를 받아 오셨어요. ‘사바하’는 칸과 오스카를 휩쓴 ‘기생충’을 제치고 청룡영화상 음악상을 타기도 했죠.
사실 티베트로 떠나기 직전까지도 안 갈 궁리만 하고 있었어요. 너무 귀찮고 힘들었거든요. 일단 가는 과정 자체가 험난했습니다. 실제로 가 보니 산이 워낙 험준해 추락한 폐차들이 길 여기저기 널려 있을 정도였죠. 거기 다녀온다고 돈을 따로 더 받은 것도 없었어요. 전부 제 사비를 써서 갔습니다. 더구나 다른 작업 일정도 빠듯했어요. 주변 모두가, 심지어 장 감독님까지 만류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능가하는, 가장 강력한 가야할 이유가 있었어요. ‘이 영화의 본질은 리얼함에 있고, 그러려면 진짜를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 앞에서 다른 건 다 하찮아지더라고요. 예전처럼 저만의 허영과 고집 때문에 생떼를 썼던 거랑은 완전히 다른 얘기입니다. 그 무렵부터 저한텐 그 어떤 대단한 오케스트라 연주도 본질과 무관하면 아무 쓸모가 없게 느껴졌어요. 반면, 본질에 부합하면 세계 어디로든 달려가야 한다고 봤죠. 그 목적 하나만 바라보며 우직하게 밀어붙인 점이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2019년 제40회 청룡영화상에서 수상 소감을 말하고 있는 김태성님/방송 화면 캡처
Chapter. 6
드라마 음악 진출! ‘SKY 캐슬’ ‘나의 해방일지’ 등 대박 히트를 견인하다
$[김태성님은 2014년 tvN ‘응급남녀’ 음악 감독을 시작으로 드라마에도 진출합니다. ‘SKY 캐슬’·‘멜로가 체질’·‘로스쿨’·‘나의 해방일지’(JTBC), ‘유미의 세포들 시즌1·2’(TVING) 등 다수의 히트 드라마 음악을 제작하게 됩니다.]
드라마 음악 감독은 어떤 계기로 맡게 됐나요?
예전엔 드라마 자체에 회의적이었어요. 영화에 비해 휘발성이 너무 강하다고 봤거든요. 아무리 히트를 쳐도 금세 새 드라마가 나와 덮어 버리잖아요. 시대가 지나도 영원히 남는 드라마라는 게 있을까 싶었죠. 그러다 tvN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를 보고 이런 제 선입견이 깨져요. 긴 호흡의 이야기가 남길 수 있는 마음 깊은 여운이 존재하더군요. 그렇게 드라마에도 마음이 열려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감사하게도 그간 이 바닥에 흥행작들을 잘 쌓아둔 덕에 작업 기회가 곧잘 주어졌습니다. 특히 ‘나의 아저씨’ 박해영 작가님 작품을 언젠가 꼭 하고 싶었는데, 제가 박 작가님의 열성팬이라고 업계에 열심히 소문을 내고 다녔더니 기회가 만들어졌죠. 그래서 같이 한 작품이 ‘나의 해방일지’였어요. 웹툰 때부터 워낙 팬인 ‘유미의 세포들’은 제게 먼저 연락이 와 하게 됐고요. 이처럼 제가 원하는 작품과 작업할 기회를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건 창작자로서 너무 설레고 복받은 일이에요.
/'SKY 캐슬'(제작 HB엔터테인먼트·드라마하우스 스튜디오, 채널 JTBC), '멜로가 체질'(제작 삼화네트웍스, 채널 JTBC), '나의 해방일지'(제작 스튜디오피닉스·초록뱀미디어·SSL, 채널 JTBC)
음악 작업에 있어 드라마와 영화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서로 시청 태도가 확연히 다르잖아요. 일단 영화는 극장에서 각 잡고 봐요. 관객들이 초집중하는 환경이죠. 때문에 음악이 몰입을 깨선 안 됩니다. 멜로디가 그 자체로 너무 튀면 안 되는 건 기본이고, 아직 관객들이 충분히 따라오지 못 했는데 음악이 나서 뭔가를 설명하려 해도 안 됩니다. 불가피하게 그런 게 필요할 땐 아주 예민하고 섬세하게 접근해야 해요.
반면 드라마는 영화에 비해 시청 몰입도가 덜한 편이죠. 밥 먹으면서도 운동하면서도 누워서도 볼 수 있잖아요. 더구나 이야기 호흡도 원체 길죠. 그래서 음악이 나서 장면을 이끌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그만큼 전체 스토리를 대변할 대표곡을 만드는 게 중요하기도 합니다. 가령, ‘SKY 캐슬’ 작업 때 대본을 받자마자 했던 게 이 드라마의 전체적 콘셉을 확인하는 일이었어요. 여기서 파악된 콘셉, ‘모든 인물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에서 착안돼 나온 곡이 ‘We All Lie’입니다. 곡의 가사, 전반적 분위기 등에 이 드라마의 많은 이야기가 함축돼 있어요.
‘SKY 캐슬’은 주변의 참여 만류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유독 주변 반대가 심했던 작품이에요.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려 고군분투하는 엄마들의 이야기? 그게 재밌겠어?” 이런 반응들이 많았죠. 교육이 주 소재인 드라마가 흔치 않고 더군다나 성공 사례는 거의 없으니까요. 영화 쪽에서 잘나가는데 굳이 모험하지 말라고들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참여를 결정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약간 반골 기질 같은 게 있어요. 사회에 무언가 노이즈를 불러일으키는 것에 관심이 많죠. 단지 사회 의식이 투철하거나 정의를 추구해서가 아니라, 기존 사고 프레임을 부수는 것 자체가 창작자로서 너무 재밌습니다. 작품의 막이 내린 후 종전과 전혀 다른 생각이나 감정이 환기되는 데서 묘한 미감을 느껴요. ‘SKY 캐슬’도 교육을 다루는 지루한 드라마일 거란 예상을 보기 좋게 깨는 이야기라 망설임 없이 참여했어요.
비슷한 이유로 ‘82년생 김지영’도 너무 해보고 싶던 영화였습니다. 사실 원작 때부터 이 작품에 가해지는 욕이 엄청 났잖아요. 영화화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특히 ‘저 영화는 전달 태도부터 분명 잘못됐을 거야’란 선입견이 많았죠. 하지만 실제로 극장에 와서 보셨다면 그리 안 느끼셨을 거예요. 감성에 호소해 무턱대고 특정 성별을 피해자로, 다른 한 편을 가해자로 부각하려는 작품이 아니었거든요. 음악으로도 그걸 여실히 보여주려 했고요. 프레임엔 전혀 관심 없다는 듯 무심히 흘러가는 듯한 음악들을 깔았습니다.
이처럼 이야깃거리가 많은 작품을 하면 그만큼 배우는 것도 많이 생기더라고요. 작품 안팎으로 뻗는 눈도 넓고 깊어지고, 표현이나 접근법도 더 섬세하고 세련돼질 수 있죠. 나아가 ‘나는 음악을 통해 무엇을 만들고 전하는 사람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도 있고요. 물론 너무 어려워서 끝날 수 있는 고민인진 모르겠지만요. (웃음)
서울 강남구 본인의 음악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중인 김태성님/리멤버
Chapter. 7
‘국내 대표 음악 감독’ 김태성, 그에게 일과 음악이란
$[2018년 김태성님은 ‘모노폴’이란 이름의 음악 스튜디오를 설립합니다. 후배 작곡가 대여섯을 모아 꾸린 일종의 음악팀으로, 드라마·예능 분야 음악을 함께 제작해 오고 있습니다.]
<"프로란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좋아할 수 있는 사람">
스튜디오 설립 계기가 무엇인가요?
영화 음악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드라마는 그게 힘들어요. 제작 편수가 워낙 많으니 홀로 작업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죠. 그래서 저와 결이 맞는 친구들로 팀을 꾸린 거예요. 팀 단위로 받는 작품들은 주로 후배들이 작곡을 담당하고, 저는 총괄자 격으로 어레인지를 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후배들이 커 나갈 인프라를 구축하고픈 이유도 있어요. 함께하는 친구들 대부분이 대학 출강 때 인연을 맺은 제자들이에요. 얘들을 보고 있자니 20대 초반 제 모습이 떠올라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더라고요. 혈혈단신으론 살아남기 쉽지 않은 바닥이거든요. 꾸준히 실전 경험을 쌓아가면서 훗날 자기 필드에서 독립할 수 있게 잘 서포트하려고 해요. 벌써 독립한 친구도 나왔는데 굉장히 뿌듯합니다.
다른 제작사들과 비교해 인원이 적습니다. 규모를 더 키울 계획은 없으세요?
많게는 스태프를 30명까지 두더라고요. 그에 비하면 저흰 회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죠. 사실 돈 버는 데 더 욕심이 있었다면 사람도 많이 뽑고 작업도 훨씬 많이 받았을 거예요. 하지만 스태프가 많을수록 그 음악에 담긴 제 색깔도 옅어질 수밖에 없어요. 물론 더 많은 후배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만의 음악색을 훼손해 가면서까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같은 창작 쪽 사람들은 돈을 쫓으면 오히려 돈에서 멀어진단 생각도 있어요. 저희 본분은 그저 작품을 제대로 만드는 거예요. 돈을 벌고 굴리는 건 그에 걸맞고 재능 있는 다른 분들의 역할이죠. 각자가 제 역할에 충실할 때 돈도 따라온다고 봅니다. 그리 살았더니 제가 평생 먹고살 만큼은 벌게 됐네요. 더 큰 욕심은 없습니다.
같은 분야의 음악 후배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있다면요?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늘 이렇게 말해요. “정말 안 했으면 좋겠다. 너무 힘드니까.” 그런데 한편으론 또 신기해요. 제가 솔직하게 말해줘도 계속할 녀석들은 결국엔 꾸역꾸역 남아있더라고요. 바로 이런 친구들만 이쪽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 않고선 못 배길 만큼 이 일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만요.
물론 어느 일이든 잘하려면 다 힘들겠죠. 근데 창작 쪽 일은 ‘적당히 잘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어 더 힘든 것 같아요. 연출진, 제작사는 물론 불특정 다수의 관객들한테도 아주 호된 심사를 받죠. 특히 대중의 평가는 정말 냉혹합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하는 게 대중일 정도로요. 죽을 둥 살 둥 해도 될까 말까 하는, 필연적으로 처절히 힘들 수밖에 없는 시장입니다. 그 와중에 버틸 힘을 주는 원천이 바로 간절히 좋아하는 마음인 거예요.
서울 강남구 본인의 음악 스튜디오에서 전자 키보드로 작업 중인 김태성님/리멤버
김태성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프로란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음악 말곤 다른 걸 한 게 없어요. 그만큼 좋아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 어려움이 늘 많습니다. 다른 창작물도 마찬가지겠지만 음악이 어디 뚝딱 나오나요. 2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처음처럼 너무 어려워요. 맨날 떼굴떼굴 구르며 만들죠.
포기하려던 순간도 분명 있었어요. 하지만, 이 바닥도 버티다 보면 기회는 와요. 이야기는 마르지 않거든요. 끊임없이 작품은 나옵니다. 좀 망해도 괜찮아요. 사실 잘된 작품에선 배울 게 별로 없거든요. 반면 실패한 작품은 배울 게 천지죠. 지금 제게 주어지는 흥행과 성공은 하나하나씩 망해가며 깨달은 대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작품이 잘 안 되면 모든 걸 음악 탓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어떻게든 더 배울 수 있잖아요.
그러니 이 모든 과정이 얼마나 괴롭겠어요? 이걸 버티려면 좋아하는 일을 미워하지 않고 끝까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는 제가 싫어하는 일은 정말 1초도 못 해요. 하지만 음악은 정말 좋아하는 일이니까 20년도 넘게 할 수 있었던 거죠. 운 좋게도 한두 편이 아니라 꽤 여러 작품이 흥행하며 음악 감독으로서 롱런하고 있는데요. 저는 더 오래하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좋아할 수 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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