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필훈

커피 뒤에 가려진 얼굴을 드러내는, 한국 스페셜티 커피의 개척자!

2024. 9. 4.

서필훈-커피리브레-스페셜티커피
서필훈-커피리브레-스페셜티커피
서필훈-커피리브레-스페셜티커피

서필훈

現 커피리브레 대표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커피리브레’ 대표입니다. 대학원 재학 중 즐겨 찾던 카페에서 커피의 매력에 빠져 20년째 커피 일을 하고 있습니다. 2009년 커피리브레 창업 후 현재 15개국, 250여 개 농장에서 스페셜티 커피를 직거래하며 국내외 소비자에게 소개합니다.

20년간 외길을 묵묵히 걸어온 스페셜티 커피 전문가가 있습니다. 흐드러지게 칼라꽃이 핀 니카라과의 농장을 인수해 직접 커피를 재배하고, 때론 정세가 불안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좋은 생두를 골라 들여옵니다. 아직도 직접 커피를 로스팅하고 품질 관리를 위해 1년에 5000개 정도의 커피를 커핑합니다.

그는 국내 스페셜티 커피 시장의 개척자입니다. 2005년 이름조차 낯설었던 스페셜티 커피의 세계로 뛰어들었고, 2007년 국내 최초 큐그레이더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2012년부터 ‘월드 로스터스 컵’ 2연패 쾌거를 달성하기도 했죠. 어느새, 그가 연간으로 수입하는 생두만 지난해 기준 국내 1위 규모인 1600톤. 에스프레소 1억6000만잔 분량의 원두가 그의 손을 거쳐 시중에 공급됩니다. 바로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 서필훈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커피를 통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가 커피 일을 시작하기까지 나름의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명문대 대학원까지 진학했으나 이내 학업에 회의를 느껴 방황했고, 장교로 복무하던 중 경남 진주 남강의 잔잔한 파도 곁에서 돌연 일식 요리사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서른 즈음에 커피는 운명처럼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에게 커피는 단순한 사업 수단이 아닙니다. 밸류체인 안에 속한 모든 사람이 노력의 가치를 인정받고 어제보다 더 나은 삶과 행복을 누리도록 하는 매개입니다. “세상을 보는 렌즈”인 커피로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봤다”던 서필훈님. 그가 바라보려는 세상은 무엇일까요?

서울 마포구 커피리브레 본사에서 인터뷰 중인 서필훈님/리멤버  

Chapter. 1
커피 한 잔에 진로를 뒤바꾼 역사학도?!

$[서필훈님의 어릴 적 꿈은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고고학자였습니다. 역사를 공부하겠다는 꿈을 안고 1995년 고려대 서양사학과에 진학합니다.]

<“마음에서 멀어지던 공부, 고배를 마신 일식 자격증, 불확실해진 미래, 그 모든 고민이 뒤엉킨 순간에 털어 넣은 그 커피 한 잔이 제게 실마리를 주는 것 같았어요.”>

어릴 때 꿈이 고고학자였다고요.

저는 평생 자유로운 영혼이었어요. 관심 있는 무언가를 연구하고, 더 깊은 진실을 찾으려 훌쩍 탐험을 떠나, 끝내 이를 발견하고 미소 짓는 인디아나 존스 같은 사람을 선망했죠.

마냥 낭만적으로 보이는 꿈 이면에는 타고난 반골 기질도 작용했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 대단한 말썽꾸러기였거든요. 못된 짓을 많이 해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일에 매번 “왜요?” 토를 달았고 하지 말라는 일만 골라서 했어요. 정말 내키는 대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명문대에 진학하셨어요.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던 시절이었어요. (웃음) 사실 성적이 좀 괜찮은 것 빼곤 정말 지지리도 말을 안 듣는 학생이었어요. 대학 입학도 제 마음대로 했고요. 부모님은 경영학이나 법학 같은 소위 잘나가는 전공을 택하길 원하셨지만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나 서양사학과 원서 넣었어”라고 통보만 했어요. 대학 입학하고선 곧바로 운동권이 됐어요. 부모님 속 참 많이도 썩인 자식이었습니다.

$[1999년 서필훈님은 동대학원에 입학해 석사 과정을 밟지만,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로는 돌연 마음을 바꿔 일식 요리사가 되겠다고 나섭니다. 그러나 자격증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뒤 단골 카페에서 들이킨 한 잔의 커피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회고합니다.]

왜 갑자기 진로를 바꾸신 건가요?

대학원에서도 말 안 듣긴 마찬가지였죠. 처음 전공하려던 분야는 러시아 경제사였는데, 한 학기만 마치고 공군 학사장교로 입대했어요. 당시 40개월의 군 생활 중 대부분을 경남 진주 교육사령부에서 근무했습니다. 장교는 독신자 숙소가 나왔지만, 부대에서 살기 싫어서 진주 시내의 건물 옥탑방에 세 들어 살며 출퇴근했어요. 

혼자 심심하니까 퇴근 후엔 건물 1층에 있던 횟집에 자주 놀러갔습니다. 자연스레 주인 형님과 친해져 일손을 조금씩 도왔어요. 배달도 가고 주말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삼천포에 가서 생선을 떼 왔죠. 도매 시장에서 펄떡이던 물고기는 제가 느껴보지 못한 생생함, 그 자체였어요. 제가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던 다른 세상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학교와 책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날것의 느낌이 횟집과 새벽 시장에 있었습니다.

대학원에 복학해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내게 무엇인가라는 큰 질문을 맞닥뜨렸는데, 답을 찾을 수 없어서 방황했어요. 그러다 막연히 몸 쓰는 일을 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 일식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자격증 따면 진주에 내려가 횟집 형님 도와 일을 더 배우려고 했어요. 

그런데 왜 금방 포기하셨나요?

일식에서는 맛뿐만 아니라 형식미가 대단히 중요한데, 태생이 자유분방한 저랑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자격증 시험을 보는데 하필 닭버터구이가 과제로 나왔어요. 저는 어려서부터 닭을 먹지 않았고 냄새도 싫어했는데, 생닭 뼈를 바르라니 정신을 놓을 수밖에 없었죠. 결국 칼에 손을 베였습니다. 그 길로 시험장을 뛰쳐나왔어요. 

시험을 망치고 곧장 학교 앞 단골 카페로 갔어요. ‘한국 1세대 바리스타’ 박이추 선생님의 제자, 최영숙 점장님이 운영하는 '보헤미안'(현 라플루마 앤 보헤미안)이란 카페였죠. 실망감에 젖은 채 평소처럼 커피 한 잔을 시켜 마시다가 문득 해보지 못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왜 커피 일을 해볼 생각은 안 했을까?’ 그날 마신 커피는 강배전 한 쿠바였는데 유난히 맛있고 신비로운 기운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커피 한 잔이 제 ‘인생 커피’가 됐습니다.

왜 ‘인생 커피’로 꼽으시나요?

생두를 볶아 맛을 끌어내는 작업을 로스팅이라고 해요. 볶는 시간, 열의 세기 조절에 따라 같은 생두도 맛이 달라지죠. 강배전은 말 그대로 강하게 볶은 것, 즉 다크 로스팅이에요. 사실 생두 고유의 향을 살리려면 약배전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커피는 강배전이어서 풍미 자체가 화려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 커피가 꼭 맛으로만 결정되는 건 아니잖아요? 원두 품질이나 커피의 맛과 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커피를 마시는 순간의 기억과 기분, 분위기가 사실 더 결정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마음에서 멀어지던 공부, 고배를 마신 일식 자격증, 불확실해진 미래, 그 모든 고민이 뒤엉킨 순간에 털어 넣은 그 한 잔이 제게 실마리를 주는 것 같았어요. 머릿속 안개가 걷히면서 마치 감전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여기서 커피를 배우고 싶습니다. 일하게 해주세요”라고 최 점장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서울 마포구 커피리브레 본사에서 인터뷰 중인 서필훈님/리멤버

Chapter. 2
스페셜티 커피란 신세계에 눈을 뜨다

$[서필훈님은 2004년부터 약 5년간 ‘보헤미안’에서 근무하며 커피를 배우게 됩니다. 낮에는 카페에서 일하고, 밤에는 커피를 공부하며 ‘주경야독’한 셈이죠. 그러면서 알게 된 스페셜티 커피의 존재는 그를 한국 최초의 큐그레이더(Q-Grader)가 되도록 이끕니다.]

학업은 어쩌시고요?

커피에 미쳐 놔버린 거죠. 뭐. (웃음) 지도 교수님을 포함해서 교수님들이 노발대발하셨어요. 부모님은 커피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인 줄 아예 이해를 못했어요. 그냥 커피숍 아르바이트하겠다는 건 줄 아셨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런 제가 이해도 안 가고 부끄러워 주변 친지에게는 미국으로 박사 학위 따러 유학 갔다고 거짓말을 하셨더라고요. 아무튼 커피에 미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그래도 논문은 쓰고 졸업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논문 주제를 쿠바 여성사로 바꿔서 시시한 석사 논문을 쓰고 간신히 학위를 땄습니다.

'보헤미안'에선 어떤 일을 하셨나요?

공부만 하던 제가 무슨 기술이 있었겠어요. 처음에는 설거지부터 청소, 홀 서빙 등 잡일부터 했어요. 그러다 핸드 드립, 에스프레소, 커핑, 로스팅까지 점점 배움의 범위를 넓혔죠. 그러면서 점점 더 커피에 깊이 빠져들었어요. 밤마다 인터넷과 전자 저널에서 온갖 자료를 뒤지며 커피를 공부했습니다. 당시 보헤미안에는 일어로 된 커피 책이 많았지만 제가 일어를 읽을 줄 몰라 영어 자료만 찾아서 공부했어요. 퇴근하고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좋은 로스팅 방법이 떠올라 새벽에 다시 출근하는 일도 종종 있었죠.

그러다 당시 미국과 북유럽을 중심으로 확산 중이던 스페셜티 커피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아마 보헤미안에서 일한 지 1년쯤 지난 무렵이었어요. 스페셜티 커피란 보통 고급 커피라는 의미로 쓰이는데, 정확하게는 스페셜티커피협회(SCA)에서 규정한 점수를 넘어서는 커피를 지칭하는 기준이에요. 이 ‘커피 신세계’를 제대로 탐구해 보고 싶은 열망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곧 제 몸이 움직이더라고요.

2005년 당시만 해도 스페셜티 커피는 굉장히 생소했죠.

당시 국내에는 스페셜티 커피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로스팅하는 업체도 별로 없었어요. 고급 커피라고 해봤자 일본에서 인기 있던 ‘블루마운틴’이나 ‘하와이안 코나’ 정도였죠. 안암동 ‘보헤미안’은 처음부터 강릉 보헤미안에 계셨던 박이추 선생님께서 볶은 원두만 받아 썼고, 제가 입사하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야 로스팅 기계를 도입했습니다. 최 점장님께서는 제가 로스팅을 전담하도록 배려해 주셨어요.

하지만 그때는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제가 로스팅한 커피 품질이 좋지 않았어요. 제가 로스팅한 커피가 나갈 때면 손님들이 커피 맛이 형편없다고 항의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점장님은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매번 말없이 커피를 다시 손님에게 내어드렸어요. 그럼에도 점장님은 한 번도 나무라지 않으셔서 저는 더 죄송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더 열심히 해서 빨리 보답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저는 어려서부터 겁이란 게 없었고 학교나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할 말 있으면 하고 잘못했으면 그만큼 혼나면 되는 건데, 죽을 것도 아니고 무서울 게 뭐냐는 식이었죠. 그런 제가 처음으로 무섭다는 생각을 한 게 점장님 때문이었어요. 커피에 관해서만큼은 털끝 하나도 허투루 하는 일이 없으셨죠. 지독할 정도였어요. 타인뿐만 아니라 스스로한테도 굉장히 엄격하셨죠. 커피 공부를 손에서 놓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제가 느낀 무서움은 존경의 마음이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데 그런 분이 제 엉터리 같은 커피엔 단 한 번의 나무람도 없으셨던 거예요. 그게 저 스스로를 더 다그치게 했고, 급기야 저 같은 자유로운 영혼에게도 어떤 책임감을 불러일으켰어요. 

2007년 국내 첫 큐그레이더가 되셨어요.

단번에 붙지는 못했어요. 재수 끝에 합격했죠. 당시 큐그레이더는 SCA 산하 국제커피품질협회에서 주관하는 자격증으로,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우 엄격하게 시험이 관리되고 있었어요. 평균 합격률이 10%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큐그레이더는 와인 업계로 치면 국제 소믈리에 자격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5일 동안 실기, 필기 다 합쳐 22과목이나 시험을 봤어요. 

당시 저는 시험 과목이 뭔지도 모르고 무작정 미국에 갔어요. 맛을 보고 향을 감별해야 하는 시험인데, 그 전날 추운 겨울 날씨에 싸구려 호텔에서 잠들었다가 감기까지 걸렸죠. 그럼에도 정말 기적적으로 딱 세 과목만 떨어지고 나머지 19과목은 붙었습니다. 큐그레이더는 떨어진 과목만 다음에 재시험을 치면 돼서 이듬해 남은 과목을 합격해 자격증을 땄습니다.

그렇게 ‘한국 첫 큐레이더’가 됐지만 딱히 자랑할 데가 없었어요. 아무도 그게 뭔지 몰랐을 때니까요. (웃음) 제 커피 실력은 이제 걸음마를 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격증이 부끄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미국을 틈틈이 오가며 각종 커핑과 로스팅 수업을 듣고, 매일 밤 늦게까지 혼자 남아 로스팅을 하며 조금씩 실력이 늘었어요. 그렇게 ‘보헤미안’에서의 로스팅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확신을 얻었고 여기에 인생을 바쳐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커피 산지 페루에서 직접 커핑을 하고 있는 서필훈님/커피리브레 제공

Chapter. 3
볼품없었던 커피리브레의 시작

$[서필훈님은 2009년 ‘보헤미안’에서 독립해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커피리브레’를 설립합니다. 처음엔 매장 낼 돈이 없어 스페셜티 커피 교육과 직접 로스팅한 원두만 판매하는 커피 공방으로 시작했습니다. 매장은커녕, 작은 공방 하나 마련할 돈도 부족해 로스터기를 비롯한 모든 장비를 중고로 구매해야 했죠. 그로부터 3년 뒤에야 연남동 동진시장 골목 한 켠에 월세 30만원짜리 첫 매장을 내게 됩니다.]

<“회사 모토도 ‘우린 아마 안 될 거야’로 정했어요. 아예 실패를 목표로 삼은 거죠. 그러면 실패가 반복돼도 늘 목표를 달성한 게 되는 거잖아요.”>

창업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스페셜티 커피를 집중적이고 전문적으로 다루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어요. 5000만원으로 창업했습니다. 5년간 보헤미안에서 일하면서 1000만원을 모았고, 나머지는 부모님이 주셨던 자취방 보증금을 뺐죠. 사무실 보증금 넣고 중고 로스터기까지 구매하니 금방 돈이 사라지더라고요. 매장은 엄두도 못 냈죠. 주로 커핑과 로스팅 교육을 하며 회사를 운영했어요. 

'커피리브레', 우리 식으로 하면 '자유로운 커피' 정도로 직역할 수 있을까요?

맞아요. 애초에 제가 늘 추구하던 게 '자유'였고, 파는 게 '커피'였으니까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영감을 받은 건 2006년 개봉한 ‘나쵸 리브레’란 영화였어요.

주연을 맡은 잭 블랙이 ‘나쵸’라는 신부 역으로 나와요. 나쵸는 어려서부터 레슬러를 꿈꿨지만 부모님의 뜻대로 수도자의 길을 걷는 인물이죠. 그런데, 담당 보육원 아이들이 자금난으로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결국 마스크를 써요. 대전료를 받아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신부란 신분을 숨기고 프로레슬링 링에 오른 거죠. 당연히 쉽지 않았습니다. 나쵸는 번번이 상대 선수한테 얻어맞으며 괴로워하다가 이렇게 외쳐요. “하느님은 왜 제게 레슬링을 향한 열정과 거지 같은 재능을 함께 주셨나요?”

이 대사는 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어요. 커피를 사랑해서 시작한 일이고 쉽지 않을 것을 예상했지만, 현실은 더 냉혹했죠. 제 커피 실력도 생각만큼 늘지 않았고요. 회사는 매년 적자에 허덕였고 매출은 미미했습니다. 그래서 회사 모토도 ‘우린 아마 안 될 거야’로 정했어요. 아예 실패를 목표로 삼은 거죠. 그러면 실패가 반복돼도 늘 목표를 달성한 게 되는 거잖아요. (웃음) 더 빨리, 많이 실패하고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어요. 회사 로고도 비슷해요. ‘나쵸 리브레’ 주인공에서 따온 이 로고는 승리에 도취된 의기양양한 느낌이 아니에요. 1라운드에서 처참하게 얻어맞고 2라운드에도 다시 링에 올라야 하는 복잡한 심경의 레슬러를 표현한 모습이죠.

/'나쵸 리브레'(제작·배급 파라마운트 픽처스)

2012년에서야 첫 매장을 내셨습니다.

7평도 안 되는 진짜 조그만 매장이었죠. 스페셜티 커피가 생소하던 시절이기도 했고 위치도 후미져서 장사는 시원찮았어요. 그래도 월세가 워낙 싸서 그럭저럭 유지는 했어요. 매장은 오픈했지만 사실 제 관심은 로스팅 사업에 있었습니다. 해외 산지의 좋은 생두를 다이렉트 트레이드로 들여와 로스팅해서 판매하는 것이었죠.

그러다 보니 지금도 매장은 4개밖에 없어요. 코로나 이후 원두 납품 경쟁이 더 치열해져서 영업이나 마케팅을 잘해야 하는데, 저희는 그런 쪽으로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아직도 저는 좋은 품질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게 스페셜티 커피 사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데, 요즘 세상의 기준으로는 참 안일하고 뒤떨어진 생각이죠. 사실 회사 규모를 그다지 키우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스페셜티 커피 비즈니스를 하면서 만나는 밸류체인 위의 모두가 우리와 함께 행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각종 스페셜티 커피를 고작 4000원에 파셨다고요.

당시 스페셜티 커피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가격까지 비싸면 접근성이 더 떨어지잖아요. 당장의 이윤보단 문턱을 낮춰 널리 알리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어요. 재작년까진 4000원을 유지했는데 요새 물가가 너무 올라 작년에 결국 500원을 올렸습니다. 

그런데도 매출은 매해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신기하게도 매출은 창업한 후 조금씩이라도 계속 늘긴 했어요. 제가 노력한 것도 있지만 여러모로 운때가 잘 맞았던 것 같고, 직원들을 비롯해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받은 덕분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회사가 지금까지 계속 성장했다는 건 시장에서 커피리브레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의미이기에 정말 감사하고 내심 뿌듯하기도 합니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 동진시장 커피리브레 첫 매장/커피리브레 제공

Chapter. 4
인생의 스승이 내민 손 잡고 세계 커피 무대 진출!

$[2010년 2월 서필훈님은 스페셜티 커피 전문가로서의 운명을 바꿀 은인을 만납니다. 바로 세계적인 스페셜티 커피 구매 그룹 ‘타임스클럽’을 이끄는 일본 스페셜티 커피 업계의 대모, 유코 이토이 선생입니다. 서필훈님은 유코 선생에게 커피 산지 경험부터 직거래 방법 등을 배우며 사업 시야를 넓힙니다.]

유코 선생은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첫 만남부터 드라마틱했어요. 한국에도 스페셜티 커피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유코 선생님이 안면도 없는 저를 덜컥 니카라과로 초대하셨어요. 저는 커피 산지를 가본 적도 없고 스페셜티 커피에 대해서도 잘 모를 때였는데, 유코 선생님은 커핑부터 산지에서의 예의, 커피나무 보는 법, 가공 방식과 품종, 농가와 직거래하는 법까지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어요.

이뿐만 아니에요. 같은 해 4월엔 미국 에너하임에서 열린 커피 박람회에도 데려가셨죠. 유코 선생님 소개로 다양한 국가의 많은 스페셜티 커피 업계 관계자, 커피 생산자와 안면을 틀 수 있었습니다. 일본 문화에서 누군가를 남에게 직접 소개하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 건 곧 그 사람을 자신처럼 대해 달라는 의미라고 해요. 선생님은 20년간 쌓은 자신의 소중한 네트워크를 제게 아무 대가 없이 공유해 준 셈이죠.

국적도 다른 이에게 왜 그리 큰 도움을 주셨던 걸까요?

저도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어요. 다만 제가 스페셜티 커피에 큰 열정을 갖고 있어서 도와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국적도 다르고 대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여러모로 가르쳐 주시고 도와주셔서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유코 선생님의 지원을 업은 서필훈님은 세계 스페셜티 커피 시장에 뚜렷한 존재감을 남기기 시작합니다. 2010년부터 ‘커피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최고의 원두 경연 대회 ‘컵 오브 엑셀런스(CoE)’에선 국제 심판관으로 활약했고, 이듬해부턴 ‘월드 로스터스 컵’에 참가해 2연패에 성공합니다. 영국 ‘스퀘어마일스’, 일본 ‘마루야마 커피’, 덴마크 ‘커피 컬렉티브’, 미국 ‘인텔리젠시아’ 등 세계적 로스팅 브랜드와 경쟁해 얻은 쾌거였죠.]

2010년부터 CoE 국제 심판관으로 활동하셨어요.

CoE는 매해 각국에서 최고의 스페셜티 커피를 출품해 경쟁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커피계의 오스카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1999년 브라질을 시작으로 주요 커피 생산지 약 15개 나라에서 매년 개최하고 있어요. 여기에 다수의 커피 바이어들이 국제 심판관으로 참여해 뛰어난 커피를 선별하고, 농가들과 직거래 관계를 맺으며 판로를 개척합니다.

커피 바이어로선 너무나 좋은 기회인데, 이것도 유코 선생님 덕에 참가할 수 있었어요. 워낙 유명한 행사다 보니, 저는 지원할 엄두도 내지 못했거든요. 유코 선생님이 “배울 게 많으니 지원해 보는 게 어떠냐”고 조언해 주셔서 용기를 냈어요. 행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이미 참여할 심사위원들은 모두 정해졌을 때였지만, 다짜고짜 직접 CoE 회장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나는 작은 스페셜티 커피 회사를 작년에 시작했고 이번 CoE에 가서 스페셜티 커피에 대해 배우고 싶은데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고 무례한 부탁이었어요. 하지만 바로 회장으로부터 답장이 왔습니다. ‘이미 심사위원과 참관인 자리가 모두 다 찼지만, 자리를 마련할 테니 와도 좋다’는 내용이었어요. 그 후로 매년 CoE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월드 로스터스 컵’은 초대 대회와 이듬해 모두 우승하셨습니다.

당시 세계 커피 업계에선 국제 바리스타 대회만 열리고 있었고 로스팅 대회는 없었죠. 그런데 당시 대만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의 대표적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를 모아 로스팅 국가 대항전 같은 대회를 열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그게 곧 현실화 됐어요.

대회는 동일한 생두를 주최 측으로부터 받은 후 로스팅해서 대만에 출품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저 말고는 모두 세계적으로 이름 높은 로스터들이었는데, 운 좋게 제가 2년 연속 1등을 차지했어요. 덕분에 저희 회사 이름이 조금 빛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젠 국내에서도 스페셜티 커피 시장이 2조원에 육박할 정도로 무척 커졌어요.

처음 생두 직거래를 시작했을 땐 구매량이 워낙 적어 화물 컨테이너를 따로 쓸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구매한 커피를 유코 선생님 컨테이너에 함께 실어 일본으로 보낸 뒤 한국으로 다시 가져왔습니다. 모든 과정이 어려웠지만 처음 구매한 커피 생두가 트럭에 실려 도착했을 때의 환희와 설렘은 아직도 기억날 정도입니다. 이런 시작을 거쳐 다이렉트 트레이드를 시도하는 회사들이 하나둘 늘었고, 한국 스페셜티 커피 시장도 점점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거예요.

에티오피아 커피 산지를 찾은 서필훈님/커피리브레 제공

Chapter. 5
매년 직거래 생두만 1.6억잔 분량… 한국 스페셜티 커피 시장의 개척자

$[커피리브레는 2024년 현재 세계 15개국, 250여 농가와 커피 생두를 직거래하고 있습니다. 작년 기준 생두 1600톤을 수입했는데, 이는 대략 에스프레소 1억6000만잔에 해당하는 분량입니다. 언젠가부터 커피리브레는 업계에서 ‘한국 스페셜티 커피 시장의 선구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1년 중 약 90일을 해외에서 체류하며 커피 농가를 직접 방문하신다고요.

예전에는 100일 이상 있었어요. 이제 나이가 들어서 좀 줄인 거예요. (웃음) 장거리 출장을 다니는 게 힘들기는 하지만, 그냥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래하는 농장의 커피 밭부터 가공 과정 전부를 일일이 확인하고, 지난해 생두를 쓰면서 들었던 의견을 전달하며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아직도 커피 맛을 감별하는 작업인 커핑만 1년에 5000번 정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회사 대표이기 이전에 로스터이자 생두 바이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본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커피 바이어 일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고생의 연속”이라고 회고하신 적이 있어요.

깨끗하고 안락한 호텔에서 아침 햇살을 느끼며 마시는 커피 한 모금. 이런 낭만적인 장면은 드물게 마주하는 것 같습니다. 커피 농가 대부분은 제3 세계의 깊은 산골에 있어요. 요즘은 숙소나 교통 사정이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안락함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가끔은 내전이 있거나 무장 게릴라, 마약 카르텔이 활동하는 지역을 통과하기도 하고, 바주카포를 든 무장 요원이 정문을 경비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호텔에 묵기도 합니다. 체력도 중요합니다. 낮에는 긴 시간 차를 타고 이동해 가파른 농장을 헐떡이며 오르내리고, 오래 서서 많은 샘플을 커핑하고, 밤에는 숙소에서 노트북을 켜고 낮에 방문했던 농장과 커핑했던 커피 관련 데이터를 남기거나 밀린 이메일에 답하다가 잠들기 일쑤입니다.

사실, 이젠 매번 농가를 일일이 방문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70%가 오랜 거래처거든요. 그럼에도 매년 현지를 찾는 건 산지의 상황을 가까이 살피고 생산자들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서예요. 그러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 서로에게 신뢰도 쌓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농가와의 관계가 단순한 구매자-판매자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엘살바도르에선 가치가 떨어진 커피를 외려 웃돈을 주고 구매하고, 온두라스 농가엔 장비 지원까지 하셨다고요.

그 엘살바도르 농장의 이름은 ‘놈브레 데 디오스’로 ‘신의 이름으로’란 뜻인데, 저희와는 아주 인연이 깊은 곳이에요. 저희의 첫 직거래 농장이거든요. 그런데, 2012년 이곳에 40년 만의 기록적 폭우가 쏟아지면서 그해 농사를 완전히 망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수확량이 40%나 줄고 품질도 떨어졌지만 이 농가는 어쩔 수 없이 생두 가격을 올려야만 했죠.

이런 사정의 이메일을 받고 잠깐 구매를 망설였지만, 결국 생산자가 제시한 금액에 5%를 더 얹어 주기로 했어요. 눈앞의 이득만 생각했다면 다른 농장을 찾아보는 게 나았겠지만, ‘신의 이름’을 농장에 붙일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농사짓는 이들이란 걸 잘 알기에 그럴 수 없었어요. 분명 이 위기를 넘기면 더 좋은 커피를 길러내리라 믿었어요. 그리고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 농장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저희 중요 거래처로 남아 있습니다. 

온두라스 차기테 마을 생산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처음 찾아갔을 땐 단돈 100달러면 살 수 있는 펄퍼(원두 껍질을 벗기는 장비)가 없어 헐값에 커피 열매를 넘기고 있더라고요. 안타까웠습니다. 그 마을은 생두 잠재력이 높아 보였거든요. 그래서 필요한 장비를 지원하고 커피 가공법을 차근차근 알려줬습니다. 그 결과 모든 농장의 커피 품질이 빠르게 좋아졌습니다. 그 이후로 저희는 매년 좋은 커피를 안정적으로 구매할 수 있고 생산자들은 이전보다 서너 배 높은 가격에 커피를 판매할 수 있어 모두가 행복하답니다.

온두라스 차기테 마을 농부들이 직접 그린 서필훈님의 모습/커피리브레 제공

$[서필훈님은 2015년부터 직거래를 넘어 현지 농장 경영에도 나섰습니다. 니카라과의 커피 농장 17만평을 직접 매입한 겁니다. 이곳에 ‘핀카 리브레’(리브레 농장)란 이름을 붙이고, 직접 커피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니카라과에 있는 농장까지 직접 인수하셨어요.

원래 저희 거래 농장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농장주가 농장을 팔려고 하는데 관심이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처음에는 그냥 둘러나 볼까 해서 방문했는데 그날따라 농장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칼라꽃이 지천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마치 농장을 사라는 하늘의 계시 같더군요. (웃음) 그 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커피 농장을 방문하며 어깨 너머로 배운 경험을 직접 테스트 해보고 싶은 욕심도 들었습니다. 

심지어 절반은 보호림이라 재배가 불가능한 땅으로 압니다.

니카라과는 중미 최빈국이어서 한국 기준으로 따지면 농장 가격 자체는 크게 비싸지 않았어요. 하지만 커피 경력이 오래된 친구들을 비롯한 제 주변에선 다들 “미쳤다”고 했죠. 매년 좋은 생두만 골라서 구매하면 되는데 굳이 농장까지 경영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커피 농사를 지을 줄 아는 것도 아니고, 현지에서 많은 시간을 머물며 관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 커피 농장을 운영하는 스페셜티 커피 회사는 극히 드뭅니다. 농장 경영에 전력투구해도 수지타산 맞추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죠. 실제로 농장 인수 후 9년간 내리 적자였습니다. 

그래도 인수 후 5년 만인 2020년부터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일본, 프랑스, 미국 등지로 생두를 수출하고 있다고요.

커피는 심고 수확하기까지 4~5년은 걸려요. 인수 당시엔 농장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커피 생산량이 적었고 품질 좋은 커피는 더 적었어요. 그 후로 몇 년 동안 새로운 품종들을 다양하게 심고 농장에 많은 투자를 하면서 수확량도 늘고 품질이 좋아졌어요. 덕분에 요즘은 여러 국가의 스페셜티 커피 회사에 커피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 니카라과 CoE에서 게이샤 품종이 8위에 오른 데 이어, 올해는 게이샤와 에티오피아 품종으로 각각 3위와 9위에 올랐습니다. CoE 성적이 좋은 농장을 판단하는 기준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니카라과 핀카 리브레에서의 서필훈님/커피리브레 제공

Chapter. 6
스페셜티 커피와 함께한 20년, ‘커피의 얼굴’을 복원하다

$[서필훈님은 커피 원두를 소개할 때 되도록이면 커피를 재배한 생산자의 얼굴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려고 합니다.]

<“프로란 책임지는 사람”>

판매하는 원두 봉투에 누군가의 얼굴이 인쇄되어 있는데요.

저는 커피가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이 아니라 개별 생산자가 1년을 정성 들여 재배한 농산물이자 작품이란 걸 얼굴을 통해 알리고 싶었습니다. 한 잔의 스페셜티 커피가 테이블 위에 오르기까지는 바리스타, 로스터, 커피를 운송한 사람들, 커피 생산자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들의 정체성을 저는 얼굴로 표현하려 했고, 그 얼굴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채 커피를 소비하는 현실에서 그것들을 복원해 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원두 봉투에 생산자의 얼굴을 이미지로 인쇄하게 됐습니다. 

그런 의도에서 ‘우린 아마 안 될 거야’였던 회사 모토도 바꿨습니다. ‘얼굴 있는 커피'로요. 저희는 커피 회사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커피 생산자의 얼굴을 담은 원두 패키지/커피리브레 제공

인도 아라쿠 지역의 여학생 기숙 학교에 학비 지원을 하고 계십니다. 처음엔 30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그 수가 430명에 달한다고요. 이 역시 얼굴 복원의 일환인가요?

그 지역은 원래 커피로 유명한 곳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2000년대 비정부기구 난디(Naandi)가 나서 이곳 주민들에게 커피를 재배하도록 권유했죠. 그러면서 시작된 게 저도 국제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던 ‘젬스 오브 아라쿠’라는 커피 경연대회였어요. 덕분에 좋은 커피를 발견하고 한국에 꾸준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난디에선 이곳 여학생들이 머물 기숙 학교도 설립했는데, 워낙 가난한 지역인 데다 대중교통도 없고 여성 차별이 심해 많은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했어요. 상당수 학생들이 저희와 거래하는 커피 농가의 딸이라는 얘기를 듣고 조금씩 학비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은 430명이 됐습니다. 어느덧 졸업해 대학까지 학업을 이어가는 아이들이 나오고 있어요. 인도 여학생들의 학비 지원은 제게 가장 보람찬 일이에요. 사실 제대로 말하자면, 회사 명의로 후원하고 있기 때문에 저 개인이 아니라 고객분들의 뜻을 모아 저희는 전달만 하고 있습니다. 고객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인도 아라쿠 지역 기숙학교 학생들과 함께 한 서필훈님/커피리브레 제공

$[서필훈님은 커피를 학문적으로 전파하는 데도 힘쓰고 있습니다. 매주 외국의 우수 논문이나 보고서를 번역해 ‘커피리브레’ 홈페이지에 소개하고 있죠. 2015년 시작한 이래 현재 1000여 편 이상이 올라왔습니다. 커피 관련 해외 우수 도서 출판도 진행 중입니다.]

커피 학술 자료를 꾸준히 소개하고 계십니다. 관련 출판도 하시고요.

제가 커피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마땅한 자료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스페셜티 커피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정보와 자료를 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논문 번역을 시작한 게 지금에 이르렀어요. 아마 전 세계 스페셜티 커피 회사의 오픈된 아카이브 중에선 최대 규모일 거예요. 

커피 업계에 몸담은 지 20년이 넘으셨습니다. 커피란 어떤 의미인가요?

저에게 커피는 ‘세상을 보는 렌즈’ 같아요. 아는 것이 커피밖에 없다 보니 커피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커피라는 범주 안에 있는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자꾸 많은 것을 커피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듯합니다. 쉽게 말해 커피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고 있는 셈이죠. 제겐 익숙하고 편안한 렌즈지만 그게 이 세상을 보는 단 한 가지 관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서울 마포구 커피리브레 본사에 전시된 커피리브레 로고/리멤버

서필훈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프로란 책임지는 사람== 아닐까요?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성공과 실패에 대해 남 탓하지 않고 책임지는 태도를 갖는 사람입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제게도 여전히 너무 어려운 과제예요.

서른 즈음까지 저는 겁없이 하고픈 일만 하며 살았어요. 제 안의 목소리에만 응답하면 그만인 사람이었죠. 하지만 이젠 마냥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에요.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저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기대로 여기까지 왔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지금은 즐겁지만 책임감을 갖고 계속 마스크를 쓰려고 합니다. 영화 '나쵸 리브레'에선 주인공 나쵸가 몰래 레슬링복을 입다가 들통나는 장면이 나와요. 그 순간 외친 대사는 이렇습니다. "다 큰 사람도 때론 쫄쫄이를 입는 법이에요."

서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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