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성현
現 카이스트 전산학부 명예 교수
40년간 250여 편의 논문을 쓴 학문 외길의 베테랑 석학이자 국내 1세대 AI 전문가입니다. 1980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서던메소디스트대에서 전산학 학위를 받은 뒤 1987년 템플대 조교수로 임용, 이듬해 시러큐스대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정보 검색 분야 연구를 시작합니다. 1994년 충남대 교수로 귀국하면서부터 정보 검색과 자연어 처리의 간학문적 연구에 매진, 관련 전문가로서 2013년 한국형 AI ‘엑소브레인’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해 10년간 핵심 기술 연구를 이끕니다. 현재 카이스트 전산학부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며 올해 ‘AGI 시대와 인간의 미래’란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2022년 11월 30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혁신 기술 하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컴퓨터·인터넷·스마트폰의 등장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 이상의 파급력을 지닌 신기술의 등장이었죠. 바로 이날 생성형 AI 챗GPT가 처음 공개된 겁니다.
주간 사용자만 전 세계 2억명, 인간처럼 대화하는 AI는 우후죽순 각계 ‘인공지능 붐’을 일으키며 등장 2년도 안 돼 사회 전반을 뒤바꾸고 있죠. 하지만 그 속도와 달리 AI는 하루아침에 외따로 만들어진 기술이 아닙니다. 일정 데이터베이스 안에서 문서를 정확히 탐색하는 정보 검색, 컴퓨터가 사람의 말을 인식하게 하는 자연어 처리, 뇌신경과학 등 수십년의 제반 연구가 농익어 탄생한 초융복합 기술입니다.
오늘 프롤로그는 정보 검색에서 출발, 생성형 AI의 중추인 자연어 처리 분야에 40년을 매진한 베테랑 연구자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10년간 한국형 AI 개발을 이끈 주역이기도 하죠. 그 주인공은 바로 카이스트 전산학부 명예 교수이자 한국 1세대 AI 전문가, 맹성현님입니다.
<“대단한 기술도 대단한 학자도 하루아침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본분에 헌신하며 오래도록 자기 길을 걸을 줄 아는 고집들이 이끌어 가는 게 세상이거든요.”>
세계 톱 클래스 학술 대회를 이끌고 유수의 글로벌 조직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은 세계적 석학으로 통하는 그이지만, 오늘날 학자로서의 명성을 만든 건 “타고난 재능도, 유리한 환경도 아닌, 순간순간의 어리숙한 고집”이라고 회고합니다.
당대 엘리트만 모인 금오공고를 문자 그대로 야반도주, 단돈 113불만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 좌충우돌의 ‘범생이’가 40년 학문 외길의 ‘거장’이 되기까지, 그를 이끈 고집의 힘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리멤버가 맹성현님을 직접 만나 그 생생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봤습니다.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인터뷰 중인 맹성현님/리멤버
Chapter 1.
한국 1세대 AI 전문가, 알고 보니 고교 자퇴생?!
$[맹성현님은 1972년 국내 최초의 ‘특목고’인 금오공고 1기생으로 선발됩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에서 공업입국을 내세우며 설립한 동양 최대 규모 공업고등학교로, 당대 최고 이과생들이 모인 곳이었죠. 그러나 졸업이 채 1년도 남지 않은 시점에 돌연 그는 학교를 자퇴합니다.]
<"기어코 고3 때 야반도주해 도망쳐 나왔습니다. 아마 제가 ‘금오공고 1호 탈주자’일 거예요.">
졸업을 1년도 안 남겨두고 자퇴하셨습니다.
졸업하면 꼼짝없이 군대에서 5년이나 의무 복무를 해야 했거든요. 중학교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집안 형편이 무척 어려워졌어요. 전교 1~2등을 놓쳐 본 적이 없지만 학비가 없어 고등학교도 못 갈 상황이었죠. 그런데, 금오공고란 학교는 먹여주고 재워주는 데다 전국 최상위권 학생들만 선발한다는 거예요. 담임 선생님도 “넌 여기를 가는 게 딱이다”라고 강하게 추천하시니 고민 없이 거길 지원했어요.
그런데 웬걸, 입학하고 나니 학교가 병영이나 다름없는 거예요. 매일 등굣길은 물론 식당에 밥 먹으러 갈 때도 제식에 맞춰 걸어야 하는 데다, 선배가 선임처럼 후배를 얼차려 주고 심지어 ‘빠따’까지 치는 분위기였죠. 여름 방학 땐 4주씩 군사 훈련도 받았고요. 사실 실력 좋은 부사관 양성이 목표인 학교였으니 이상할 건 없었습니다. 다만 그걸 제가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죠. 졸업하면 부사관으로 복무한단 사실도 2학년 올라가서야 듣게 됐고요. 선생님 말씀만 듣고 무작정 입학했다가 뒤늦게 날벼락을 맞은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기어코 고3 때 야반도주해 도망쳐 나왔습니다. (웃음) 아마 제가 ‘금오공고 1호 탈주 성공자’일 거예요. 사실 2학년 때도 한번 달아나려 했는데 붙잡혔습니다. 괜히 요주의 인물로 찍히기만 하고 외박도 못 나가는 처지가 됐어요. 하지만 아무리 처벌이 무서워도 여기 더 있는 것만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날 점호가 끝난 뒤 야밤에 몰래 뛰쳐나와 그 길로 냅다 누나가 있던 춘천으로 도망쳐 버렸어요. 한동안 꼼짝 않고 거기서만 숨어 지냈습니다.
$[맹성현님은 다른 고교로 전학하는 대신 검정고시를 치른 뒤 국내 대학에 진학합니다. 그 후 1980년, 돌연 유학길에 올라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에 편입학합니다.]
검정고시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나름 공부 좀 했다고 웬만한 지방 학교에 편입하는 건 성에 안 차더라고요. 당시 공부 잘하는 애들은 죄다 경기고·서울고 같은 명문고를 다녔습니다. 그런 학교들에 못 갈 바엔 차라리 고등학교 졸업장은 포기하기로 하고 검정고시를 본 거예요. 대학엔 꼭 가고 싶었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제 꿈이 과학자였거든요. 넉넉지 않은 살림에 부모님이 사 주신 과학전집이나 위인전을 달달 외울 만큼 읽곤 했습니다. 어른들이 “너 커서 뭐 할래?” 물으면 대답도 언제나 같았고요. 정작 연구란 게 뭔지,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는 녀석이 의지는 제법 어른마냥 확고했던 거죠.
돌이켜보면 인생이란 참 아이러니하죠. 금오공고에 진학한 덕에 또 거기서 도망쳐 나온 덕에 과학자가 됐으니까요. 아마 평범한 형편이었다면 기술고시를 쳐 한자리하는 관료로 살았거나, 대기업에 들어가 좀더 부유한 삶을 살았을 겁니다. 괜찮은 인생들이지만 지금보다 행복하진 않았을 거예요. 저는 관심 있는 일이라면 무섭게 몰입해 끝장을 봐 버립니다만, 체질에 안 맞으면 도통 견디질 못하거든요. 지금도 제 친구들은 그럽디다. “범생이 맹성현이 야반도주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그거야말로 참 맹성현다운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지금 널 만들었다"고요.
해외여행도 어려운 시기에 유학을 가셨어요.
마침 미국에서 외삼촌이 대학교수를 하고 계셨거든요. 제가 공부에 뜻을 뒀다고 하니 “미국으로 건너오라”시면서 유학을 돕겠다고 하셨죠. 그래서 입학 허가서와 비자까지 발급받고 모든 준비를 마쳐 놨는데, 별안간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외삼촌께서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오시기로 했다는 거예요. 현지엔 외숙모와 사촌들만 남고요. 딱히 제가 재정적 도움을 받을 순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허나 도저히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겠더라고요. 해외 유학은 제가 인생 마지막 동아줄이라 생각한 기회였거든요. 그래서 눈 딱 감고 저질러 버렸습니다. ‘무조건 간다'는 마음으로 편지에 적힌 주소만 들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단돈 113불만 들고 말이죠.
113불만 들고 미국으로요?
딱 그만큼만 수중에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죠. 그나마 그 푼돈 덕에 현지 공항서부터 외삼촌댁까지 어떻게든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설픈 영어에 손짓 발짓까지 해 가면서 우여곡절 끝에 말이죠. 다행히 외삼촌이 귀국하시기 전이고 며칠간 말미가 있으셔서 첫 학기 등록금까진 직접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숙식이었죠.
때문에 처음엔 양로원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숙식까지 다 제공해 주는 정말 괜찮은 곳이었거든요. 헌데 머잖아 도망을 나왔습니다. 학생 비자로는 미국에서 취업을 못하거든요. 어느 날 관청에 지문을 등록해야 한다길래 할 수 없이 도로 짐을 쌌습니다. 그 다음부턴 뭐 가릴 새도 없이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어요. 한인 커뮤니티에서 알음알음 소개받아 식당 설거지나 서빙, 청소까지 안 해 본 게 없었죠. 공부까지 병행해야 하니 몸은 완전히 축났습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건강했어요. 어찌 됐든 제가 원하는 걸 하고 있던 거잖아요. ‘처지를 비관하지 말자. 모든 게 계획대로 잘 되고 있다.' 스스로 다독이며 그렇게 버텼습니다.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인터뷰 중인 맹성현님/리멤버
Chapter 2.
전 재산 113불 유학생, ‘전산학’ 박사가 되다
$[1984년 맹성현님은 캘리포니아주립대 전산학과를 졸업, 곧이어 같은 해 미 남부 텍사스의 서던메소디스트대(SMU)에서 전산학 석박사 과정도 밟게 됩니다.]
전산학을 전공으로 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시절엔 저 하나만 가난한 게 아니었죠. 나라 전체가 가난했습니다. 다들 잘 살아 보겠다고 기를 쓰던 때죠. 그런데 하루아침에 선진국들을 따라잡기가 쉬웠겠나요. 그 시절 한국인으로서 저도 고민해 보던 찰나 어쩌다 프로그래밍이란 걸 접하게 됐어요. 그리고 직감했습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야말로 우리나라가 가야 할 길이다.’
당시에도 지금으로 치면 구식이긴 하지만 ‘메인프레임’ ‘미니 컴퓨터’ 같은 PC들이 대학에 들어와 있었거든요. 우리가 이런 기계들은 당장 만들어 낼 수 없지만, 그걸 활용할 소프트웨어는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소프트웨어를 공부하는 학문이 바로 전산학이었고요. 전산학이 요즘 말로 컴퓨터공학이거든요. 좋은 머리만 있으면 뭐든 해낼 수 있는 게 소프트웨어니까 이 공부에 매진해 보기로 한 겁니다.
석박사부터는 SMU로 학교를 옮기셨어요.
장학금 때문이었어요. 사실 내로라하는 명문대 대학원에도 합격은 더러 했습니다. 하지만 장학금까지 주는 데는 없더라고요. 헌데 SMU에선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다 주겠다는 거예요. 한 달에 600불씩이나요. 집사람 수입이랑 보태면 살림에 지장은 없겠더라고요. 아내가 학부 때부터 줄곧 맞벌이로 함께 고생하며 동행해 주고 있었거든요.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단 사실이 무척 좋았던 한편, 아내를 향한 고마움도 정말 컸습니다.
그럼에도 막판까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간판이 아쉬웠던 게 사실이라 석사를 마친 시점에 박사는 다른 곳에서 하려고도 했죠. 하지만 희한하게 SMU랑은 운때가 정말 잘 맞더라고요. 보통 석사 과정 대학원생은 연구 경력이 없으니 수업 조교를 많이 하는데, 여기선 입학하자마자 운 좋게 연구 조교를 하게 됐죠. 마침 그때 지도 교수님께 그 TO가 꼭 필요했거든요. 게다가 인품마저 너무 훌륭하셨고요. 대학원생 입장에서 지도 교수 잘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해요. 괜히 다른 학교에서 연구를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기존 지도 교수님 아래서 연구에 더욱 몰입하고 빨리 학위를 마치는 게 좋겠단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택이 됐죠.
$[1987년 맹성현님은 ‘정보 검색’을 주제로 논문을 작성, 마침내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일정 데이터베이스 안에서 검색 성공률을 높이는 효과적 메커니즘과 그 수학적 모델을 개발하는 연구였죠.]
박사 논문 주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나요?
제 연구 분야는 정보 검색이었어요. 쉽게 말해, 문서 같은 특정 데이터를 찾아내는 일종의 검색 엔진 기술을 연구하는 거였죠. 혼동하시면 안 되는 게 여기서 검색이란 지금 같은 웹 검색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땐 웹이 등장하기 전이거든요. 대신 기업이나 도서관 등의 서버에 중구난방으로 쌓인 데이터베이스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개념으로 보시면 됩니다.
바로 이 검색 성공률을 어떻게 높이느냐가 연구의 핵심 주제였어요. 당시엔 검색이 특정 키워드를 활용하는 방식이었는데, 사실 같은 키워드라도 원하는 검색 결과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거든요. 가령 ‘조선’이란 키워드를 넣을 때 누구는 ‘조선의 역사’가 궁금할 수 있지만, 또 누군가는 ‘조선 산업’을 알아보고 싶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당시는 그 검색 결과값이 거의 똑같다는 게 문제였죠.
그래서 주목하신 게 ‘사용자 프로필’이었던 거죠?
맞아요. 사전에 이 사람의 관심사 등을 토대로 프로필을 구축해 두면, 그 의도를 잘 헤아려 좀더 맞춤형 검색이 가능할 수 있단 아이디어였죠. 이를 가능케 할 여러 형태의 수학적 모델을 만들고, 무엇이 더 좋은 결과가 나오는지 주야장천 실험해 어떤 모델이 가장 좋은지 규명해 내는 게 제 박사 논문이었습니다.
하마터면 논문 통과가 안 될 뻔 하셨다면서요?
학과장한테 미운 털이 세게 박혔었거든요. 저를 자기 연구 조교로 끌고 오려고 무진장 애를 쓰셨는데, 딱 잘라 거절하니 나중엔 별의별 술수를 쓰고 심지어 협박까지 하더군요. 나중에 저희 지도 교수님이 알게 돼 둘이 대판 싸우기도 했습니다. 헌데, 그 화가 논문 심사에까지 미칠 뻔했던 거예요.
원래 학과장은 제 논문 심사위원이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논문 발표장에 불쑥 들어오더라고요. 그러곤 친한 교수한테 자기 질의를 남기고 사라졌는데 결국 그 질문이 제 발목을 잡지 뭡니까. 베테랑이 초년 연구자한테 무슨 트집을 못 잡겠어요.
속수무책으로 당황하던 찰나, 구원자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제 지도 교수님이었죠. 차근차근 징검다리 질문을 놔 주신 덕에 겨우 정신줄 잡고 무난히 답변할 수 있었어요. 가까스로 발표를 마치고 심사장 밖에서 대기하다 잔뜩 긴장한 채 다시 들어왔습니다. 절 보자마자 지도 교수님이 이리 말씀하시더군요. “콩그레츄레이션, 닥터 맹!”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인터뷰 중인 맹성현님/리멤버
Chapter 3.
세계 최고 과학 기관 프로젝트 수주… 미 대학 종신 교수로!
$[같은 해 맹성현님은 필라델피아 템플대 조교수로 임용되며 처음으로 강단에 서게 됩니다. 곧이어 이듬해인 1988년부턴 뉴욕주 시러큐스대로 적을 옮겨, 정보 검색 분야 전문가로서 관련 연구를 본격 심화해 나갑니다.]
박사 졸업 직후 바로 템플대 조교수로 임용되셨습니다.
정말 겨우 들어간 겁니다. 사실 그땐 정보 검색 분야로는 교수를 뽑는 대학이 아무 데도 없었거든요. 딱 10년만 뒤였어도 처지가 바뀌었겠지만 그땐 푸대접이었죠.
그러다 우연히 템플대에서 정보 시스템 쪽 연구자를 찾는다는 걸 알게 돼요. 제 전공인 정보 검색이랑 좀 다른 결이지만 그래도 ‘정보’란 키워드는 겹치잖아요? 어떻게든 비벼 보자는 마음으로 지원해 봤는데 웬걸, 합격시켜주더라고요. 유일한 선택지였으니 더 고민할 것도 없었죠. 곧장 오퍼를 수락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1년도 안 돼 시러큐스대로 가셨어요.
요상하게 템플대는 영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대도시 슬럼가에 있는 대학이라 그런지 학교 분위기도 어째 삭막하게 느껴지고, 학과 규모가 커서 교수들끼린 인사도 잘 안 해 데면데면했죠. 그런 와중에 담당 전공은 저랑 딱 맞지도 않으니 여러모로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어수선하게 한 학기를 보내고 이듬해 대학별 잡 서치 리스트를 쭉 살펴봤어요. 그런데 시러큐스대에서 정말 기가 막힌 공고가 떴습니다. ‘정보 검색’ ‘사용자 프로필’ 등 핵심 키워드들이 죄다 저랑 딱 맞지 뭡니까. 꼭 절 뽑으려 만든 공고 같았달까요. 면접도 일사천리였습니다. 교수들이랑 말도 너무 잘 통했죠. 연봉마저 1만불이 넘게 올랐고요. 모든 면에서 ‘땡큐’였습니다.
$[시러큐스대 부임 3년차인 1990년 맹성현님은 미 국방성 산하 DARPA(국방 고등연구계획국)로부터 연구비 100만달러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합니다. DARPA는 인터넷, GPS, 탄소 섬유, 자율 주행 등 시대를 막론한 당대 최첨단 기술을 탄생시킨 세계 최고의 국방 과학 연구 기관 중 하나죠. ‘현대 첨단 연구의 산실’로도 불리는 바로 이 기관에서 당시 동양인으로선 유일하게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연구자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겁니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맹성현님은 4년 뒤 시러큐스대에서 테뉴어(정년 보장)를 받습니다.]
DARPA로부터 연구 프로젝트를 따내셨습니다.
솔직히 그리 대단한 기관인지 몰랐어요. 오히려 그래서 용감했습니다. DARPA 프로젝트는 보통 베테랑 연구자쯤 돼야 따올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서로 연차가 비슷한 동료 조교수랑 팀을 꾸려 지원했습니다. 이게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더군요. 선배 교수들이 하나같이 그럽디다. “맹 교수, 축하해. 이제 당신 인생 다 풀렸어!”
그래서일까요. 4년 뒤 테뉴어를 받으셨습니다. 미국에선 심사 절차가 유독 까다롭기로 유명한데요.
DARPA의 명성이 대단하긴 대단하더라고요. 많이들 좋아했습니다. 저 개인한테도 영광이지만 학교 평판에도 큰 도움이 되니까요. 더구나 미국에선 교수가 과제를 따내 연구비를 받으면 학교와 절반 나누거든요. 당연히 연구 실적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이 프로젝트 덕분에 테뉴어를 좀더 수월히 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해당 프로젝트의 연구 주제가 무엇이었나요?
‘문장 단위 검색’이었습니다. 이전까지의 ‘키워드 검색’ 방식은 한계가 명확했어요. 아무리 사용자 프로필로 개인화한들 결국 키워드-데이터 간 일대일 짝 맞추기에 머무는 수준이니까요. 그런데 문장 단위 검색은 완전히 다른 게임이 됩니다. 가령 ‘1990년 첫 생산된 비행기 기종을 알려줘’란 문장 검색과 ‘비행기’-’1990년’-’첫 생산’을 한 묶음으로 하는 키워드 검색의 기대 효과를 생각해 보세요. 차원이 다릅니다.
문제는 문장 단위 검색부턴 기존의 일대일 짝 맞추기가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찾는 문서가 검색 텍스트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존재할 리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시한 게 바로 검색에 ‘자연어 처리’를 도입하자는 아이디어였습니다. 결국 인간이 사회에서 자연스레 쓰는 언어 텍스트, 즉 자연어를 마치 인간처럼 머신도 파악할 수 있어야 검색 정확도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거란 주장이었죠. 자연어 처리는 AI 연구 중 하나인데 박사 논문 때 반영하진 않았지만, 워낙 관심이 많아 그 즈음부터 조금씩 연구하고 있던 분야이기도 했어요.
자연어 처리는 현재 챗GPT 등 생성형 AI의 중추 기술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제가 고안한 아이디어가 문장 텍스트를 머신이 파악할 ‘개념 그래프’로 도식화하는 일이었어요. 가령 ‘철수가 영희에게 선물을 줬다’는 문장을 떠올려 봐요. 철수-영희, 철수-선물, 영희-선물 등 핵심 개념들 간 관계가 성립하죠. 이 관계를 그래프로 표현하는 겁니다. 다른 문장들도 이런 식으로 그래프를 만든 뒤 서로 붙이고요. 문장들 간 네트워크가 생기는 거예요.
그럼 이 네트워크에 기반해 일종의 추론이 가능하죠. ‘철수’가 서로 다른 문서에 나오더라도 동일인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나아가 각 개념에 계층적 정보들까지 붙이면 더욱 고도의 추론도 가능해지죠. ‘영희’한테 ‘여성’ ‘카이스트 학생’ 등 추상화된 딱지를 붙여 놓으면, 검색에 ‘영희’란 키워드가 들어가지 않아도 이 딱지들로 추론해 필요 정보들을 찾아낼 수 있는 거예요. 지금은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엔 이처럼 자연어 처리와 의미 기반의 표현을 토대로 검색하는 게 아주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지금의 챗GPT 같은 생성형 AI와도 개념적으로 연관이 되는 아이디어이기도 해요. 사실 이 당시도 이론적으론 생성형 AI를 꿈꿔 볼 순 있던 겁니다. 다만 그 시절엔 지금처럼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학습 데이터가 없었고 그 학습을 수행할 컴퓨터의 연산력도 턱없이 모자랐을 뿐입니다. 여하간 DARPA에서도 자연어 처리 분야 잠재력을 높이 사 저희 연구안을 채택했던 겁니다. 헌데, 나중 가선 엉뚱하게도 이 연구의 본질보단 부차적인 게 더 많은 주목을 끌게 되더라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당시 제 연구 파트너가 맡은 작업이 텍스트마다 패턴에 기반해 그 구조를 찾아내는 일이었어요. 본격적인 자연어 처리에 돌입하기 전 텍스트를 먼저 잘 분해해 놓는 부차적 과제였던 셈인데, 연구 발표 땐 이게 매번 더 주목을 받았습니다. 발표 순서상 이 동료가 늘 먼저 나오는데 쇼맨십이 너무 좋아 관심을 다 끌어가 버리더라고요. 외부 교류도 활발해 이 연구가 마치 자기 주도인 양 밖에 엄청 떠들고 다니기까지 했죠. 연구 중요도나 비중으로는 제가 80%를 하고 있는데, 정작 주인공은 20%의 부차 과제와 이 친구가 돼 버린 거예요.
주객이 완전히 전도됐군요.
스포트라이트를 뺏겼단 사실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게 일종의 심리적 트리거가 돼 제 멘탈에 큰 영향을 줬다는 게 더 문제였죠. 연구 발표가 끝나면 DARPA 책임자들과 여러 대학 교수들이랑 뒷풀이를 했는데 매번 하나도 즐겁지가 않더라고요. 잠깐 연구나 전공 이야기를 나눠도 그마저도 주인공은 미국인인 그 동료였고 그 밖엔 딱히 나눌 말이 없었죠. 어려서부터 미국 사회를 경험한 것도 아니고 영어도 똑같이 구사할 수준이 못 되다 보니 엄연한 소통 장벽이 있던 거예요.
그때쯤 미국에서 머문 10여 년을 한번 되돌아봤습니다. 그간엔 인지조차 잘 못했지만, 사실 매순간이 제겐 긴장의 연속이었더라고요. ‘내가 잘해야 한국이 욕을 안 먹는다. 그래야 고국의 후배들한테도 기회가 더 열린다.’ 당시로선 해외에 몇 안 되는 한국인 연구자였으니 남모를 부담에 짓눌려 살았던 거예요. 헌데 그때부턴 이게 최선인가하는 생각이 든 거죠. 그러면서 점점 제 고국, 쉼 없이 달려오느라 묻어 둔 한국을 향한 그리움도 조금씩 커져 갔습니다.
대전 카이스트 강의실에서의 맹성현님/리멤버
Chapter 4.
14년 만의 귀국! 고국의 토양에 첨단 정보 검색의 싹을 틔우다
$[1994년 맹성현님은 충남대 컴퓨터공학과 교수로 임용되며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당시 미진한 인프라에도 불구, 국내 첨단 정보 검색 분야 연구를 나름의 방식으로 개척해 나갑니다.]
<"결국 대기업 책임 연구원 자리는 고사했습니다. 제가 봐도 전 순수 연구자가 제격이었거든요.">
테뉴어를 받자마자 귀국을 택하셨어요.
여느 날처럼 강의하던 중 문득 꿈처럼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어요. 강의실에 앉은 학생들이 전부 한국인이고 전 모국어로 강의하는 장면이었죠. ‘이게 현실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 집사람한테 심경을 다 털어놓고 상의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죠. 일단 한국에 무작정 한번 들어가 보기로요.
십수년 만의 첫 귀국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났어요. 정말 좋고 편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땐 한 번도 경험치 못한 느낌이었죠. 돌아오고 나니 한국에 돌아가고픈 마음이 점점 더 커졌어요. 그러던 차에 우연히 2가지 오퍼가 동시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제안들이었나요?
하나가 KT의 책임 연구원 자리였습니다. 당시 마흔이 안 된 나이였는데 덜컥 유치 과학자로서 부장 대우까지 해 주겠다지 뭡니까. 게다가 아파트까지 구해 준다는 거예요. 마다할 이유가 없더라고요. 거의 결심을 굳히고선 마지막으로 저보다 세상 물정에 밝은 학계 선배들한테 전화를 걸어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구동성으로 전부 반대를 했어요. “맹 박사, 자네 같이 연구 외길만 걸은 사람이 갈 데가 아냐.” 순수 연구보단 사업이 더 중요한 곳이고 나름 정치 감각도 필요할 텐데 그쪽에 워낙 전 젬병이니 한사코 말린 겁니다.
결국 그 자린 고사했습니다. 제가 봐도 전 순수 연구자가 제격이었어요. 마찬가지로 그래서 충남대 교수 자리를 택한 겁니다. 마침 연구 단지에 있어 장점이 큰 데다 학교에서도 영입 의지가 강했고, 아파트값 등을 고려하면 서울로 갈 엄두는 안 났거든요. 더구나 당시 안식년이어서 여차하면 시러큐스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이가 겨우 10살이라 적응을 못하면 돌아가려 했는데, 피는 못 속이나 봅니다. 모두 무사히 적응해 여지껏 한국에 머물고 있으니까요. (웃음)
당시만 해도 선진국과 연구 인프라 격차가 더욱 두드러졌을 텐데요.
벌써 30년 전 이야기잖아요. 물리적 인프라는 말할 것도 없고 연구 시스템도 연구에 집중하기 어려운 구조였어요. 미국보다 담당 과목도 훨씬 많고 연구생들도 대부분 석사급이라 연구 환경 구축부터 상당히 버거웠죠. 과제를 따와도 연구비가 턱없이 모자랐고요. 그래도 넋 놓고 있을 순 없잖아요. 대신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디지털 도서관’이었어요. 서적을 디지털로 변환하고 컴퓨터에 인식시켜 본문 검색까지 가능하게 하는 기술 연구였죠. 이 기술 분야는 잠재력이 무궁무진했어요. 같은 원리를 그림이나 도자기에 적용하면 디지털 갤러리나 뮤지엄도 가능하고, 요즘 같으면 가상 현실에도 적용해 온갖 지형 지물까지 디지털화해 탐색할 수 있으니까요. 당시 미국에선 3~4년 전부터 연구가 활발해진 주제였는데 한국은 아무도 안 하고 있더라고요. 때문에 제가 직접 정부 지원 과제에 아이디어를 내고, 적극 이슈 레이징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2003년 맹성현님은 당시 정보통신부 산하 신생 대학 한국정보통신대(ICU)에 전격 합류합니다. 정통부·KT 등 국내 IT 기관이 공동 설립해 훗날(2009년) 카이스트와 통합되는 IT 전문 연구 대학이었죠. 이 무렵부터 맹성현님은 자연어 처리 연구에 더욱 몰두, AI와도 밀접한 시맨틱 웹과 텍스트 마이닝 등으로 연구 범위를 확장합니다.]
ICU 합류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제 연구가 뒤처지고 있다는 조바심이 들었어요. 귀국 전까지 전 제 연구 분야에서만큼은 톱이었거든요. 헌데 점점 미국에서 연구할 때만큼 그 결과가 안 나오는 거예요. 여전히 해외 톱 콘퍼런스에 논문을 내긴 했지만, 갈수록 해외 연구자들과 격차가 벌어짐을 느꼈죠. 그러던 와중에 ICU에서 영입 제안이 온 겁니다.
사실 처음엔 망설였어요. ‘연구 중심의 소수 정예 대학’이란 나름의 명성은 있었는데, 워낙 신생 학교다 보니 살짝 꺼려지더라고요. 그런데 듣자 하니 학생 수준이 서울대랑 맞먹는다는 겁니다. 실제로 특강을 한 번 나갔는데 학생들이 아주 똑똑하더라고요. 명성이 빈말이 아닙디다. 위치도 똑같은 대전이겠다 한번 옮겨 보자 결심했죠. 결과는 대만족이었습니다. 확실히 연구에 좀더 집중 가능한 인프라였어요.
이 시기부턴 자연어 처리에 연구가 더욱 집중됩니다.
우리한테 여지껏 익숙한 웹을 ‘신택틱(syntactic) 웹’이라 불러요. 사람이 직접 문서를 읽다 새 정보가 알고 싶으면 거기 걸린 링크를 쭉쭉 타고 들어갈 수 있게 만든 그 웹이죠. 여기선 각각의 정보가 저마다의 문서에 따로따로 매칭되는 구조라 문서들은 그저 외따로 존재할 뿐이죠.
그런데 그 무렵부터 ‘시맨틱(semantic) 웹’이란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건 문서들이 각자도생 않고 서로 의미 관계로 엮이는 방식이에요. 가령 구글에서 ‘아이작 뉴턴’을 검색한다고 합시다. 원래대로면 국적, 학력, 직책, 생몰 연도, 관계 인물 등 관련 정보가 다양한 웹페이지에 출현하겠죠. 시맨틱 웹 서비스란 이걸 전부 엮어 한 판 정리돼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검색의 의미를 파악해 각기 다른 문서에서 필요 정보들을 모두 엮어 뽑아내는 겁니다.
단순히 키워드와 정보를 매칭하는 방식이 아니라 의미 단위로 검색이 가능해지는, 검색의 패러다임을 혁신하는 개념이었죠. 헌데, 당시에는 문서마다 관계를 도출하고 연결하는 작업을 전부 사람이 해야 했어요. 한계가 너무 명확하잖아요? 바로 여기에 자연어 처리를 활용해 자동화시키고자 했던 게 제 연구 주제였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국내 최초 텍스트 마이닝 분야 연구도 시도하셨습니다.
의미 단위 검색이 제대로 성공하려면 그만큼 아주 대량의 문서를 살펴 봐야 하는데, 사람이든 기계든 데이터가 엄청 많으면 그걸 어떻게 하나씩 파악할 수 있겠어요. 때문에 그 방대한 데이터베이스에서 필요 정보들만 콕콕 집어내는 기술, 즉 텍스트 마이닝 연구가 반드시 필요했던 겁니다. 결국 이 기술도 자연어 처리의 일부인지라 여기에 매진해 온 제 접근이 좀 빨랐습니다. 덕분에 한국에서 최초로 이 기술을 소개하는 논문까지 내게 됐네요.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인터뷰 중인 맹성현님/리멤버
Chapter 5.
MS가 인정한 세계 일류 석학, 한국형 AI 연구를 이끌다
$[2007년 맹성현님은 마이크로소프트(MS) 연구소로부터 전 세계 20명뿐인 연구비 지원 대상자로 선정됩니다. IT 분야에서 최우수 연구 역량을 갖춘 석학들을 지원하자는 취지로, MS가 각국 100여 대학서 연구 제안서를 받아 심사한 결과였죠. 바로 여기에 맹성현님은 유일한 한국인이자 유이한 아시아계 연구자로 이름을 올립니다.]
MS가 지원하는 세계적 IT 연구 분야 석학에 선정되셨어요. 아시아에선 단 2명뿐이었습니다.
마침 MS가 아시아권 연구자를 발굴하고자 베이징에도 연구소를 세운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어요. 거기 한국 전담 직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을 통해 우연히 알게 돼 연구 제안서를 써 본 겁니다. 그 분을 알게 된 게 큰 행운이었죠. 아까 말씀드린 텍스트 마이닝 관련 연구 제안을 냈는데 이게 선정이 된 거예요.
물론 기초 연구였기에 눈에 보이는 프로덕트가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연구자로서 조바심이 깊어지던 차에 나름의 큰 기쁨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인연을 계기로 MS란 글로벌 대기업과 국내 관련 연구자들 간 협력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단 점도 뿌듯했고요.
2010년 카이스트-MS 공동연구협력센터 책임자로 발탁되셨어요. 무려 10년간 센터장으로 계셨습니다.
카이스트엔 저 말고도 훌륭한 연구를 하고 있는 선후배 연구자들이 많거든요. 이 분들을 MS에 소개하고 연구비를 지원받게끔 하는 데 주력했어요. 우수 학생들은 그쪽 연구소 인턴으로도 보내 연구 경험을 쌓도록 했고요. 시니어 연구자로서 굉장히 보람 있던 활동이었습니다.
$[2013년 ‘엑소브레인’(Exobrain)이란 이름의 한국형 AI 프로젝트가 출범합니다.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카이스트 등 국내 산·학·연 전문가들이 합동 추진한 국가 R&D 사업으로, 긴 문장 단위 질문을 이해해 정확한 답을 제시하는 고도의 질의응답 AI 개발이 그 골자였죠. 맹성현님은 해당 프로젝트의 세부 과제 책임자로 낙점돼 AI에 적용할 선도 기술 개발을 이끕니다.]
이즈음 연구부터 정보 검색에서 질의응답으로의 주제 변화가 두드러집니다.
“자, 이거야. 읽고 답은 네가 찾아”가 정보 검색 단계라면, 질의응답은 “자, 네가 찾던 답이 이거지?”인 겁니다. 검색해서 문서를 찾는 목적이 뭡니까. 그 문서에서 정확한 답을 찾고 싶어서잖아요. 그럼 문서 말고 아예 답을 바로 찾아 주면 더 좋은 거죠. 마침 텍스트 마이닝을 연구하다 보니, 자연스레 질의응답에 관심이 더 쏠리기도 했어요. 아주 뾰족한 정보만 골라내자는 게 텍스트 마이닝이니, 결국 이걸 잘할수록 그만큼 질의응답도 고도화할 수 있겠더라고요.
더구나 학계에선 검색 분야 연구가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어요. 이미 구글이 너무 잘하고 있었거든요. 인프라적으로 이쪽 연구는 더이상 대학들이 따라잡기 어려워진 거예요. 이쪽 분야에선 ACM(미국컴퓨터학회) SIGIR 등 글로벌 학술 대회의 학술위원장까지 맡았던 학자로서 회의감이 컸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텍스트 마이닝 등 질의응답 분야에 연구력을 집중한 겁니다.
엑소브레인 프로젝트엔 어떤 계기로 참여하신 건가요?
2011년 학계에 큰 충격을 준 일대 사건이 벌어져요. 1980년대부터 지금껏 방영 중인 ‘Jeopardy!’란 미국의 초장수 퀴즈쇼가 있는데, 어느 날 IBM에서 개발한 질의응답 AI ‘왓슨’이 도전자로 출연해요. 그런데, 무려 74연승 중이던 우승자를 왓슨이 이겨 버린 겁니다. 점수도 3배나 벌리면서요.
챗GPT만큼의 파급력은 아니었지만 학자들한텐 충격이 굉장히 컸어요. “우리도 얼른 개발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터져 나왔고, 마침 정부에서도 필요성을 느껴 대대적인 합동 프로젝트가 추진된 겁니다. 프로젝트 전반은 ETRI가 총괄했고, 카이스트는 순수 연구에 집중해 질의응답 AI에 적합한 신기술 개발을 맡았어요. 그 연구를 제가 리드했고요.
/조선일보
$[프로젝트 출범 3년 만인 2016년 엑소브레인은 EBS ‘장학퀴즈’에 참가해 역대 왕중왕, 수능 만점자 등을 제치고 우승을 쟁취하는 파란을 일으킵니다. 2021년엔 맹성현님이 이끄는 카이스트 연구진이 관련 연구로 스탠퍼드대 ‘Multihop QA’라는 퀴즈 챌린지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기도 했죠. 지난해 10년간의 연구 끝 완성된 엑소브레인은 현재 국내 2300개 이상의 기관에서 활용, “한국 AI 연구 기반과 산업 생태계 조성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엑소브레인엔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가 적용됐나요?
사실 엑소브레인 모델은 프로젝트 전반부와 후반부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도중에 세상이 뒤집어지기 시작했거든요. 전반부까지만 해도 엑소브레인은 ‘기호’에 기반한 AI였습니다. 쉽게 말해, 방대한 텍스트들을 아까 언급한 개념 그래프로 치환해 저장하는 방식이었던 거예요. 예를 들어 ‘훈민정음을 창제한 조선의 임금은?’이란 질문이 나오면, 훈민정음·조선·임금 등 개념끼리 구축된 관계를 토대로 데이터베이스 안에서 ‘세종대왕’이란 정답을 추려내는 거죠.
그런데 2015년쯤부터 ‘뉴럴 네트워크’ 기반 AI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뇌 속 뉴런을 모방해 모델링한 네트워크인데, 이게 나오면서 자연어 처리의 패러다임이 바뀌게 돼요. 가령 우리 뇌에 아까와 똑같은 질문이 들어가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뉴런들이 마구 연결돼 ‘세종대왕’이란 답을 내잖아요? 여기에 착안해 만들어진 AI인 거죠.
고백건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이런 방법의 한계를 옛날에 이미 경험했으니까요. 헌데 환경이 바뀌었고 학생들이 먼저 발 빠르게 이걸 공부하고 있더라고요. 논문까지 쓰겠다는 대학원생도 많았고요. 저도 궁금해져서 가만 들여다 보니 웬걸, 금방 지나갈 이슈가 아닌 겁니다. 그때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엑소브레인도 뉴럴 네트워크 기반으로 AI 모델을 교체했고요. 당시엔 꽤 우려도 있었는데 완전 기우였죠. 이젠 전부 뉴럴 네트워크에 기반해 AI를 하니까요.
장장 10년을 이어간 연구였습니다. 회고하신다면요?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ETRI의 공이 매우 컸습니다. 특히 ‘장학퀴즈’ 우승은 각종 매스컴에 대서특필 학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나름의 의미들이 굉장히 큽니다. 그러나 연구자로서 평가하는 엑소브레인의 가장 큰 의의는 좀 다른 데 있습니다. 바로 국내 자연어 처리 연구의 뚜렷한 질적 향상이 이뤄졌다는 거예요.
자연어 처리에도 단계가 있거든요. 형태소부터 시작해 단어, 문장 등 단계별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어야죠. 단어를 모르는데 문장을 알 순 없는 거잖아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의미만 안다고 대화할 수 있나요? ‘말은 잘한다’는 문장이 칭찬인지 비꼬는 말인지도 알 수 있어야죠. 즉, 의미 저변의 뉘앙스나 의도까지도 파악해야 비로소 대화가 제대로 되는 겁니다.
이 프로젝트 전까지 한국어 대상 자연어 처리 연구는 오래도록 어휘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어요. 그런데 엑소브레인까지 나온 마당에 국내 연구자들이 그 윗 단계들까지 연구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 학계 연구 수준이 세계적 스탠다드에 발맞춰 가게 된 거예요. 이게 엑소브레인이 가져다 준 진짜 선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대전 카이스트 전산학동 로비에서의 맹성현님/리멤버
Chapter 6.
다가올 AGI 시대, 40년 IT 거장의 다음 시선은?
$[2022년 11월 30일, 전 세계 산업계를 뒤흔들 혁신 기술 하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컴퓨터·인터넷·스마트폰의 등장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 이상의 파급력을 빚어낼 IT 신기술의 등장이었죠. 바로 이날 오픈AI가 개발한 생성형 AI 챗GPT가 공개된 겁니다. 사람처럼 대화하고 다양한 주제에 문장으로 답변할 수 있게 설계된 AI로, 맹성현님이 몸담은 연구 분야의 최첨단을 총망라한 집약체가 탄생한 겁니다.]
<"프로란 자신만의 길을 걸어나갈 줄 아는 사람">
챗GPT의 등장은 문자 그대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어요. 저로서도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챗GPT의 기반이 되는 GPT는 우리가 꾸준히 파악해 오고 있었어요. GPT란 인간처럼 언어를 이해하고 글을 생성하도록 만든 AI고, 이 AI가 인간과 잘 대화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다양한 문제 해결을 돕는 서비스가 바로 챗GPT거든요.
갑자기 확 튀어나온 듯 보여도 GPT는 여러 버전이 있었습니다. 그중 챗GPT는 GPT-3.5 버전이 적용돼 나온 건데, 사실 GPT-2까진 저희가 철저히 분석을 했어요. 그래서 그 능력도 잘 알고 있었는데, GPT-3.5는 그 차원이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챗GPT는 이전과 어떻게 차별화가 가능했던 건가요?
이전에도 사람과 컴퓨터 간 질의응답이 가능은 했어요. 단지 ‘싱글 턴’, 즉 거의 한 차례로 끝나서 문제였던 거죠. 부분적으로 늘릴 순 있지만 제대로 수차례 대화가 가능한 ‘멀티 턴’을 만드는 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챗GPT는 바로 이 멀티 턴이 가능해 놀라웠던 거예요. 그것도 아주 매끄럽게요.
저희도 차이가 궁금해 당장 연구해 봤습니다. 나름 처음으로 이 메커니즘을 규명해 논문으로 발표도 했는데, 결국 ‘AI의 뉴럴 네트워크가 얼마나 고도화돼 있느냐’가 관건이었어요. 단적으로 GPT-2는 뉴럴 네트워크가 12층으로 구축돼 있습니다. 헌데 GPT-3는 이게 96층이나 돼요. 층을 거듭하며 데이터 변환이 많이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AI의 추상화 역량이 올라갑니다. 고도의 추론에 입각한 대화가 가능해지고 설계자조차 생각지 못한 창발 능력도 나오게 되는 거죠.
$[챗GPT 등장 이래 AI의 발전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있습니다. 특히 학계, IT 산업계 일각에선 “2028년이면 AGI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란 예측까지 속속 내놓고 있습니다.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즉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 이상의 지능을 발휘하는 범용인공지능의 세상이 머지않아 실현될 거란 전망이죠. 이 분야 연구에 40년간 매진해 온 학자로서 맹성현님은 “우리 모두가 AI로 인한 변화의 본질을 통찰하고 더욱 근본적인 수준의 고민에 나서야 할 때”라고 역설합니다.]
올해 6월 ‘AGI 시대와 인간의 미래’(2024)란 저서를 출간하셨습니다. 그간 매진하신 기술·연구 위주의 시각이 아닌 인문·사회학적 관점에서 쓰인 책이란 점이 두드러집니다.
챗GPT 이후 세상이 피부에 와닿게 달라졌죠. 대학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생이나 교수나 챗GPT를 안 쓰는 경우가 드물어졌죠. 편리함도 커졌지만 혼란도 무척 컸어요. 당장 교수 입장에선 과제를 채점하려 해도 이게 학생이 한 건지 기계가 해 준 건지 분간하기도 어려워졌죠. 심지어 챗GPT가 코딩까지 해내는 판국이니까요.
그러던 차에 우연히 ‘챗GPT와 교육’이란 주제로 강연을 해 달란 요청을 받아요. 이전까진 누구 앞에서 당당히 떠들 만큼 생각을 끓이진 못했는데, 강연을 준비하면서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었고 나름의 생각들이 분명해졌습니다. 제가 이쪽 분야 연구만 수십년이잖아요. 머잖아 찾아올 AI로 인한 변화와 그 파장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강의를 해 보니 대다수가 전혀 딴 곳에 관심이 가 있는 거예요. 다들 이걸 어떻게 써먹고 응용할지에만 관심을 뒀죠. 그 뒤에도 비슷한 강연을 네다섯 군데 나갔는데 번번이 마찬가지였습니다. 두고만 볼 게 아니라 작정하고 할 얘기를 좀 해야겠다 싶어 책까지 내게 됐네요.
AGI 시대를 전망하십니다. 예측하시는 변화와 그 우려를 짚어 주신다면요.
챗GPT, 이거 정말 유용하고 편리하죠. 단적으로 아이가 공부할 때 부모도 교사도 거의 필요가 없어지는 시대가 곧 올 겁니다. 어른으로서도 마찬가지고요. 원래 무언가를 잘하려면 본인 스스로 전문성을 갖추거나 누군가와 대화하며 협력도 해야 했는데 지금은 그 필요가 현저히 줄어 버렸죠.
그 속도는 훨씬 더 가속화할 거예요. 그리고 그 진폭도 더 커질 겁니다. 머지않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만큼 혹은 인간보다 더 똑똑한 AI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거든요. 그게 바로 AGI의 시대입니다. 물론 아주 당장은 AI가 작곡가보다 음악을 잘 만들고 PD보다 영상을 잘 다루긴 힘들겠죠. 하지만 인간에 버금가게는 충분히 해낼 거고 역전은 시간 문제일 겁니다.
그럼 그때 인간은 뭐냐 이거죠. 흔히들 인간만이 창의적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어 왔는데 이 믿음이 깨지고 있잖아요. 이렇게 당연한 인식들에 기반해 탄생한 사고방식, 의사 결정 체계, 크고 작은 행동 양식이 전부 바뀔 수 있는 겁니다. 당장 부모나 교사가 아이를 어떻게 기르고 가르쳐야 하는지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헌데 우리 사회엔 이를 조망할 거시적 안목이 결여돼 있어요. ‘너무나 당연히 세상은 변한다. 그런데 그 변화는 엄청 빠르게 오고 있다. 그러니 제대로 알고 단단히 준비를 좀 하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 거의 아무도 안 하는 것 같아서요.
40년간 학문 외길을 걸으셨습니다. 후배 연구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 주고 싶으신가요?
철새가 되지 마세요. 작년엔 메타버스가 유행이라고 들입다 연구하다가, 철이 좀 지나니 올해는 AI를 해 보겠다고 하는 부류의 연구자들이 더러 있어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학자란 한 가지를 깊이 들여다볼 줄 알아야 내공이 생기는 법입니다.
세상을 깜짝 놀래킬 새로운 기술이란 것도 절대 한순간에 튀어나오지 않아요. AI만 봐도 그렇잖아요? 그 저변에서부터 각자 치열하게 자기 분야에 몰두하면서 지금의 AI 기술이 준비돼 간 거지, 절대 ‘AI가 뜰 거니까 AI만 죽어라 파야지’하면서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수십년간 연구 현장에서 이걸 생생히 목도한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치열하고 진득하게 고민하고 몰입한 학자만이 새 조류가 나타났을 때 자신만의 내공을 빛낼 수 있는 겁니다.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인터뷰 중인 맹성현님/리멤버
맹성현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프로란 자신만의 길을 걸어나갈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어느덧 학문에 몸담은 지 40년입니다. 학자로서 나름 인정받고 영광도 누린 삶이지만, 실은 한치 앞의 예측도 어려웠습니다. 저도 알았겠습니까? 자랑스레 입학한 고등학교를 졸업 1년도 안 남아 야반도주해 자퇴까지 할 줄, 단돈 113불만 들고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날 줄, 정보 검색에서 시작해 일평생 자연어 처리를 연구하고 이제 AGI의 시대를 논하고 있을 줄 말이에요.
그 모든 게 우연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필연이었습니다. 인생이란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느 장소에 있느냐로 결정되는데, 우연하게 보이는 무수한 일들이 사실 본인이 그 자리에 있길 택했기 때문에 일어난 겁니다. 즉, 자기 의지로 결정한 일들이었단 거죠. 제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순간순간 제가 부렸던 어리숙한 고집들이 학자로서 제 인생을 만든 필연들이었던 거예요.
자신의 본분을 안다면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 보세요. 길 위에서 누굴 만나고 어떤 기회를 접하느냐는 운에 달렸지만 거기서만 만날 인연과 기회가 곧 자신의 필연이 돼 줄 거거든요. 그리고, 우연에 기대지 않고 필연을 만들 줄 아는 존재만이 비로소 철새 같은 아마추어가 아닌 독보적 프로로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곧 AI가 모든 걸 할 수 있는 세상이 올 테죠. 그러나 AI가 곧 죽어도 못 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인간처럼 본분을 알고, 열정과 호기심을 간직하며, 우직하게 살아가는 것. AGI의 시대에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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