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충현
前 삼양옵틱스 대표, 前 삼성전자 상무
1982년 삼성에 입사해 삼성전자 이미징 사업 부문 상품 기획·마케팅 담당 상무까지 지냈습니다. 2013년, 경영이 악화된 카메라 렌즈 전문 기업 삼양옵틱스의 CEO로 전격 발탁돼, 4년 만에 600억원대 매출과 코스닥 상장이란 반전을 일궈낸 굴지의 경영인입니다.
국내 카메라 산업의 대부로 통하는 이가 있습니다. 삼성에서 카메라 영업사원으로 시작해 상무 자리에까지 오른 뒤, 임원 시절인 2009년 일명 ‘한효주 카메라’로 불리는 신상 디지털 카메라를 기획 출시해 3개월 만에 100만대 판매란 대기록을 세운 업계 신화로도 유명합니다. 경영난에 시달리던 카메라 렌즈 전문 기업 CEO로 발탁돼 4년 만에 600억원대 연매출과 코스닥 상장이란 반전을 쓴 입지전적 커리어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바로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 황충현님의 이야기입니다.
그저 탄탄대로의 꽃길만 걸었을 법한 화려한 커리어이지만, 실상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입사 직후부터 사고를 쳐 신입 인사고과에선 최하 수준인 D를 받고, 1년 만에 새 계열사로 발령나 10년 넘게 바닥 영업을 거치며 온갖 고초를 겪은 겁니다. 훗날 CEO가 돼서도 고난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직원들의 외면과 불신에 시달리고, 잇따른 화재와 암까지 겹친 가시밭길이었으니까요.
<“인생은 아이러니예요. 불운이 없었다면 운명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의 말처럼 불운은 곧 운명을 만나게 했습니다. 새 계열사로 발령난 덕에 필생의 동반자인 ‘카메라’ 영업을 시작하게 됐고, 두차례 화재를 극복하며 본인을 괄시하던 직원들과 끈끈한 전우애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사다난한 카메라와의 40년 운명을 숙명으로 뒤바꿔온 집념이 돋보이는 황충현님의 커리어 여정, 리멤버가 직접 만나 생생히 담아봤습니다.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황충현님/리멤버
Chapter. 1
삼성 상무도 신입 인사고과는 꼴찌?!
제적 경고 듣던 ‘불량 학생’… 마음 다잡고 삼성 합격
입사 첫해부터 사고 치고, 소속 부서는 1년 만에 해체
새로 발령난 계열사에서 카메라와 인연 시작
대학(홍익대 무역학과) 졸업 후 무난하게 삼성에 바로 취업하셨어요.
절대 무난한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웃음) 당시 선후배들 사이 ‘홍대 3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황충현이가 어떻게 제때 졸업을 했을까”였어요. 군대 가기 전까지 공부와 담 쌓고 살았거든요. 수업도 매번 빠지고 놀러만 다녔죠. 군 제대 후 학적과에서 “학생, 이대로는 제적이야”란 경고까지 주더라고요.
그제서야 부모님 얼굴이 떠오르며 ‘아차’ 싶더라고요. 부모님이 워낙 엄격하셨거든요. 인생 낭비할까봐 재수도 못하게 하셨는데, 노느라 졸업을 제때 못해 등록금을 더 내야 한단 말씀은 죽어도 못 드리겠더라고요. 그때부터 과 대표도 맡으며 마음을 다잡고 공부했어요. 아마 4학년 2학기에도 저처럼 수업 많이 들은 학생은 홍대 역사에 없을 겁니다. 겨우 학점 맞춰서 졸업했습니다.
그럼 삼성엔 어떻게 들어가셨나요?
80년대만 해도 과 대표를 하면 학교 추천을 받아 웬만한 기업 취직이 가능했어요. 그런데 제 학점으론 그것도 어렵다 하더라고요. 울며 겨자 먹기로 공채 시험이 있는 회사들을 노렸습니다. 대표적인 게 포스코와 삼성이었어요. 마지막 생명줄이라 생각하고 죽어라 공부했습니다. 문제집을 거의 다 외웠더니 두 군데 모두 합격했습니다. 그렇게 삼성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삼성은 3가지 계열로 신입사원을 뽑았어요. 무역·제조, 중공업, 보험·서비스로 말이죠. 잘나가는 문과애들은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이 있는 무역·제조로 갈 것이고, 신세계 백화점이나 삼성생명이 있는 보험·서비스는 지금과 달리 인기가 없었죠. 저한텐 중공업이 잘 맞고 블루오션일 거라 생각해 1~3지망 모두 중공업으로 써서 붙었습니다.
중공업에선 엔지니어들이 핵심 인재였을 텐데 왜 블루오션이라 생각하셨나요?
아무리 좋은 기술로 물건을 잘 만들면 뭐 합니까. 팔려야 의미가 있죠. 넓은 시야로 시장을 읽을 줄 아는 문과생이 기술자보다 더 핵심으로 대우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기술을 워낙 어렵게 생각하다 보니 엔지니어가 커머스를 익히는 걸 더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반대입니다. 공학도들처럼 논리적 사고를 즐겨하는 사람들이 넓은 시야로 부드럽게 사고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게 쉬우면 너무 불공평하죠. (웃음)
들어가니 예상대로 탄탄대로였나요?
아뇨, 첫 인사고과에서부터 D를 받았습니다. 신입사원은 웬만해선 안 주는 점수라고 하니 거의 꼴찌였을 겁니다. 철골 판매 부서의 수출팀으로 발령이 났었어요. 거기서 3개월간 서류 복사랑 파일링 업무만 했어요. 도중에 그만 대형 사고를 쳤죠.
당시엔 해외 입찰 서류를 중앙 관청에 내고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서류를 박스에 담아 광화문 정부 청사의 담당 공무원에게 직접 내러 갔어요. 막상 갔더니 다른 직원이 나와서 “여기 바닥에다 그냥 놓고 가라”는 거예요. 우리로선 정말 중요한 서류였는데 말이죠. 그땐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공무원은 국민을 섬기며 봉사하는 존재들이라고만 생각해, 새파란 신입 주제에 겁도 없이 그 공무원한테 언성을 높이며 대들었습니다.
웬걸. 나중에 회사에 돌아왔더니 난리가 났더라고요. 그쪽에서 제 교육을 어떻게 시켰냐고 엄청 혼을 냈다는 거예요. 설상가상 그 입찰도 떨어져버렸어요. 관청은 같은 입찰을 낸 기업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잖아요. 미운털이 박힌 만큼 저희 입찰 조건이 경쟁사들에 새어나갔을 수도 있죠. 무지하게 혼났습니다.
<“평생의 동반자 카메라와의 만남은 좌충우돌로 시작됐네요.”>
실수를 좀 만회하셨나요?
만회할 기회조차 없었어요. 입사 1년 뒤 소속 사업부가 해체됐거든요. 졸지에 동료들 대부분이 붕뜬 신세가 돼 새 계열사로 발령이 났습니다. 전 삼성정밀이란 곳으로 가게 됐어요. 원랜 항공기 엔진 등 방산 사업을 다뤘는데 수주 텀이 너무 길다 보니까 각종 사업을 추가로 붙였습니다. 시계·복사기·카메라를 했는데 결국 카메라만 남았죠. 인력 수요가 많은 카메라 영업 쪽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제 평생의 동반자 카메라와의 만남은 이렇게 좌충우돌로 시작됐네요.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황충현님/리멤버
Chapter. 2
카메라 영업 10년, 꼴찌가 에이스로!
경쟁력 뒤처지던 삼성 카메라로 바닥 영업 10년
고객 중심 전략으로 거의 매월 매출 목표 달성
신용카드 결제 도입… 대리점→총판으로 유통 혁신
바닥 영업을 10년 이상 하셨다고요.
도매상은 물론 작은 시장의 소매상까지 모두를 대상으로 영업을 했습니다. 원래 영업이란 게 맨땅에 헤딩이니 참 어려웠지만, 80년대만 해도 매출액을 현금으로 수금하다 보니 온갖 부정 사고가 끊이질 않아 더 어려웠어요. 부도, 덤핑, 밀수 등 살면서 안 좋은 현상과 단어는 이 시절에 다 보고 경험한 것 같습니다. 일일이 읊으려면 끝도 없어요.
이를 딛고 매번 실적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연차가 쌓여도 매장 관리 규모와 직위만 달라질 뿐 월 단위로 어떻게든 매출 마감을 지켜야 한다는 건 매한가지라 정말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공중전이었죠.
<“구매한 사람은 왜 구매했는지, 보기만 하다 나간 사람은 왜 나갔는지 죄다 물었죠. 생각지도 못한 이유들이 나오더라고요.”>
가뜩이나 당시 삼성의 카메라 경쟁력이 낮고 해외 밀수품도 많은 터라 훨씬 어려움이 컸겠습니다.
삼성 자사 카메라만 취급하는 직영점 20군데를 2년 동안 총괄한 적이 있어요. 스무곳 매출 실적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했죠. 그런데 저희 제품으론 도저히 승부를 볼 수 없겠는 거예요. 라인업도 다양하지 않은 데다 순수 국산이다 보니 성능 면에서 한참 뒤처졌거든요. 업계에선 무슨 배짱으로 자사 제품만 취급하냐고 엄청 비웃었습니다.
영업하는 사람들이 뭐 별 수 있나요? 성능 좋은 새 카메라를 뚝딱 만들 수도 없잖아요. 대신 매장에 방문한 손님들 이야기라도 정말 열심히 챙겨 들었어요. 구매한 사람은 왜 구매했는지, 보기만 하다 나간 사람은 왜 나갔는지 등을 죄다 물었죠. 그랬더니 생각지도 못한 이유들이 나오더라고요. “국산 카메라니까 애국심에 샀다”, “직원들의 두발이 단정치 않다”, “손톱이 청결치 못하다”…
당장 손 쓸 수 없는 것들만 빼고 모두 반영해봤어요. ‘국산’이란 키워드가 현장에서 정말 잘 먹힌다는 걸 보고 이걸 더욱 내세워 신문 광고, 전단지 등에서 “국산 구매해 애국하자”는 식의 마케팅을 크게 벌여봤어요. 잘 통하더라고요. 직원들의 인사법부터 두발·손톱도 철저히 관리하며 신경 썼습니다. 이전엔 사소하게 생각한 부분인데 개선되니까 희한하게 매출도 오르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손님들 의견을 늘 경청하고 어떤 방법이 매출 상승에 가장 효과적일지 직원들과 날마다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거의 매번 목표를 맞췄고, 이때부터 사업이 영업·마케팅·상품 기획 등 모든 것이 어우러진 복합적인 영역임을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아주 큰 시야로 바라보면 제품과 동떨어진 부분에서도 이익을 크게 늘릴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단 걸 깨달은 시기이기도 하고요.
어떤 단서였나요? 구체적인 경험을 들려주세요.
80년대 후반 신용카드가 막 활성화될 때입니다. 당시엔 카메라가 귀금속으로 분류됐는데, 귀금속은 신용카드로 결제가 안 됐어요. 무작정 BC카드를 찾아가 1년 가까이 매달려 겨우 이 제한을 풀었습니다. 그다음 삼성 카메라를 사는 고객에겐 신용카드 발급을 혜택으로 주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발급 요건이 엄청 까다로워서 아무한테나 내주지 않았거든요. 해소되지 않은 신용카드 니즈를 우리가 교묘히 끌어다 쓰고자 한 거예요. 전략은 정말 잘 통했습니다.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여기에서 끝났다면 단순히 매출 전략을 잘 쓴 이야기에 그쳤을 거예요. 신용카드로 물건을 팔게 되니 할부 없이 돈이 한 번에 팍팍 꽂히더라고요. 카드사가 고객 할부를 대신 상대해주니까요. 이렇게 되니 대리점의 존재 이유가 없겠더라고요. 더이상 대리점을 통해 고객 할부를 관리하게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대리점 대신 총판을 둬서 유통 구조를 단순화하자고 제안했어요. 그 결과 전국 100군데가 넘는 대리점이 정리되고, 15군데의 총판만 남게 됐습니다. 유통 구조가 단순화되니 중간 마진이 아주 크게 늘었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대리점이 사라지면서 리스크 비용이 현저히 줄게 됐어요. 대리점은 1억원짜리 담보를 넣고 10억원어치 물건을 갖고 가서 파는 식이에요. 잘못해서 부도라도 나면 회사로선 엄청난 손해인데 그런 리스크가 사라진 거죠. 회사가 뒤집어졌습니다. 아주 좋은 쪽으로요. 초년에 망했던 인사고과는 여기서 다 만회하고 에이스가 됐네요. 보너스도 두둑하게 받았고요.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황충현님/리멤버
Chapter. 3
1등 기업 임원 등극! 업계 신화를 쓰다
당시 삼성 임원들의 최대 과제는 ‘일류화’
기술 아닌 고객 니즈 초점 맞춰 일본 카메라들과 경쟁
야심작 신상 디카, 출시 3달만 100만대 판매 대기록
바닥 영업을 벗어난 건 언제부터인가요?
90년대 중후반 차장 승진 때부터입니다. 그러다 2000~2004년 CCTV나 비디오 프리젠터를 판매하는 광응용사업의 영업·기획을 총괄하면서 드디어 ‘상품 기획’이란 분야를 경험하고 배우게 됩니다. 영업이 이미 만들어진 제품의 판로를 개척해내는 일이라면, 상품 기획은 향후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 더 잘 팔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과제였죠.
상품 기획에선 무엇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나요?
상품, 특히 제조업 상품은 확실히 기술에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술에만 함몰되는 건 대단히 편협한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시장 공략을 위해 필요한 기능은 3가지인데, 기술 중심으로만 생각하면 10가지를 개발하게 돼요. 그럼 쓸데없이 비용은 커지고 정작 할 일은 못하게 됩니다.
당시 삼성에선 비디오 프리젠터란 상품이 그랬어요. 기술이 뛰어나 각종 성능이 좋은 스웨덴·일본 제품을 무분별하게 따라잡으려다 보니 온갖 기능을 개발해 덕지덕지 붙여놨더라고요. 주요 고객들은 원치도 않는데 괜히 가격만 올려놓은 셈이었던 거죠.
저희의 주 타겟은 국내 학교들이었어요. 학급 현장의 필요에 맞는 기능들만 남기고, 대신 디자인 부문을 더욱 강화한 새 상품들을 내놨죠. 그 결과 고객 만족도는 더 높이면서도 원가는 낮춰 마진율을 크게 올렸습니다. 결국 기술보다 중요한건 우리가 시장의 어떤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지, 그 시장의 고객 니즈가 무엇인지 같아요.
<“기존 링 위에서의 싸움에 승산이 없다면, 새로운 링을 만들면 되죠.”>
2005년 드디어 임원인 상무로 승진해, 4년 뒤 초히트작 ‘듀얼 뷰 카메라’를 내놓게 됩니다. 이 상품 기획의 비결은 무엇이었나요?
당시 이건희 회장의 말씀에 따라 ‘일류화’가 삼성의 가장 큰 어젠다였어요. 삼성 카메라도 어떻게든 일류로 올라서게 만들어야 했죠. 그런데 캐논, 소니, 니콘 등 일본 업체들과의 격차가 너무 컸습니다. 렌즈·기구·센서 등 핵심 소재의 기술이 무려 10년 정도 격차가 났어요.
최초로 셀카 촬영이 가능한 디지털 카메라였던 삼성의 ‘듀얼 뷰 카메라’. 2009년 첫 출시 버전/삼성
제조업 상품이 기술을 배제하고 일류가 될 수 있나요?
기존 링 위에서라면 도저히 승산이 없죠. 하지만 우리한테 유리한 새 링을 만들고, 거기에 경쟁자들을 불러들여 싸운다면 혹시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으로 주력한 아이디어 중 하나가 ‘컴팩트 카메라’로 불린 작은 디지털 카메라였고 거기서 듀얼 뷰 카메라도 탄생했습니다.
먼저, 산업적인 시장 흐름과 소비자들의 목소리에 집중했어요. 2000년대 중반은 휴대폰 카메라의 화소수가 가파르게 높아지던 시기였습니다. 전통 카메라 시장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 중이었죠. “휴대폰 카메라는 날로 좋아지는데, 전통 카메라는 왜 셀카조차 안 되냐”는 불만이 많았어요.
이 니즈를 공략할 수 없을까 고민했고 가능하단 결론을 내렸어요. 촬영창을 앞에도 배치해 셀카가 가능한 ‘듀얼 뷰’를 구현하는 건 일본이 앞선 아날로그적 기술이 아니라, 한국이 앞선 디지털 기술로 풀 문제였거든요.
뿐만이 아닙니다. 디지털 기술 중 한국이 월등한 분야가 바로 통신이잖아요. 블루투스 기술을 넣어 카메라 사진을 휴대폰으로 전송할 수 있게 한 것도 저희가 최초였습니다. 디카에서 영상 촬영이 가능하도록 한 것도 삼성이었어요. 일본 경쟁 업체들이 정말 깜짝 놀랐죠.
출시 3개월 만에 100만대가 팔리고, 뉴욕타임스로부턴 ‘올해의 위대한 아이디어’ 중 하나로 선정됐습니다. 소회가 어떠셨나요?
언제 100만대를 넘겼나 지금은 잘 기억도 안 나고, 일일이 세어본 게 아니니까 정확히 얼마 팔렸는지도 모르겠네요. (웃음) 하지만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기자들을 모아놓고 제품 발표회를 열었는데, 그날부터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건 기억납니다.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황충현님/리멤버
Chapter. 4
CEO가 된 카메라 대가… 그에게 찾아온 최대 위기!?
경영난 허덕이던 삼양옵틱스 구원할 CEO로 발탁
새 대표 향한 불신과 중소기업 특유 관성에 고생
두번의 화재와 위암 시련까지… 함께 극복하며 전우애
삼성에서의 31년을 뒤로 하고 2013년 카메라 렌즈 전문 기업(삼양옵틱스) 대표로 가게 됩니다. 관리 종목으로 지정되는 등 경영난에 시달리던 회사였죠. 어떤 계기로 가신 건가요?
당시 이 회사는 사모펀드인 VIG파트너스(옛 보고펀드)가 옛 삼양옵틱스의 카메라 렌즈 사업부만 분할 인수한 업체였어요. 사모펀드와 내부 경영진이 찾던 새 CEO의 조건이 3가지였대요.
첫째,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인 교환렌즈를 다뤄본 삼성 출신이 왔으면 좋겠다. 둘째, 상품 기획을 제대로 한 경험이 있었으면 좋겠다. 셋째, 영업 베이스가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이걸 종합해 보니 제 경력의 딱 역순이었습니다. 적임자라 생각하고 저를 영입했다고 하더라고요.
신임 대표로서 해결해야 할 이 기업의 문제는 뭐였나요?
당시 삼양옵틱스는 카메라 애호가에게 필수 장비인 교환렌즈와 CCTV용 렌즈를 모두 제조하는 회사였어요. 매출은 교환렌즈에서 60%, CCTV용 렌즈 쪽에서 40%가 나고 있었죠. 사업을 쭉 검토해보고 내린 결론은 ‘미래에 굶어 죽기 딱 좋을 회사’였습니다.
왜 그런 결론을 내리셨나요?
교환렌즈는 초점을 맞추는 방식에 따라 자동과 수동으로 나뉩니다. 시장 규모는 자동이 압도적으로 커요. 수동은 전체 5%밖에 되지 않아 일본은 아예 건들지도 않는 분야죠. 그런데 이 회사는 수동만 생산하고 있더라고요.
물론 수동은 점유율이 70%로 거진 독점 수준이라 가격을 거의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이점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주할 수가 없었어요. 저가 공세로 밀어붙이는 중국 경쟁사들이 맹추격해 기술적으로도 따라잡힐 수 있겠더라고요.
CCTV용 렌즈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주 거래처였던 삼성 측 담당자를 만나서 알아보니 이미 다른 거래 업체를 찾는 중이더라고요. CCTV가 발전하는 만큼 렌즈도 발전해야 하는데 삼양옵틱스는 현 수준에만 안주하고 있으니 버려질 위기였던 겁니다. 그때 그 담당자가 “삼양옵틱스 대표나 고위 임원은 오늘 처음 만나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위기가 오는지도 몰랐던 겁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데 사모펀드와 뜻을 모았습니다. 자동 초점 렌즈 시장에 진출하기로 하고, 에너지를 모으기 위해 CCTV용 렌즈 사업은 아예 중단하고 수동 초점 렌즈는 현상 유지만 하기로 했어요.
<“첫 출근하고 이틀간은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직원들의 반발은 없었나요?
처음엔 리더십 고민으로 머리가 꽤나 아팠습니다. 당시 삼양옵틱스는 법정 관리 체제가 끝나고 10여년간 대표가 4~5번이나 교체된 상황이었어요. 한 대표가 채 2년을 못 버텼던 거죠. 그러니 저도 이들에겐 ‘one of them’이었던 거죠.
첫 출근하고 이틀간은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비서는 여름 휴가 중이라 일주일 넘게 얼굴도 못 봤습니다. 공장 시찰을 가도 보고하러 오는 사람도 없더라고요. 그러면서 본인들끼리는 똘똘 뭉쳐있었습니다. 직책은 제쳐두고 아예 “형”, “누나”, “이모” 이렇게 부르고 있더라고요. 이게 무슨 회사인지, 학교인지 모르겠더라고. (웃음)
이후 업무 보고를 받아보니 일종의 패배주의적 관성이 느껴졌습니다. 잘하던 것에서 벗어나면 망하는 줄 아는 거예요. 새롭게 할 일은 많은데 기존 관성은 강하고, 조직 콘트롤은 너무 어려워 보이고… 설상가상 사고가 연이어 터지고 개인적 시련까지 찾아오더라고요.
어떤 사고와 시련이었나요?
2015년 한해에 두번의 화재 사고가 났어요. 첫 화재는 3월이었습니다. 해외 출장으로 영국 런던에 막 도착한 날이었죠. 시차 때문에 새벽에 뒤척이는데 한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렌즈 공장에 불이 났다.” 짐도 제대로 풀기 전에 바로 한국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와서 보니 많이 타버린 건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결국 건물을 새로 짓게 됐어요. 천장에 그을린 화재 연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까만 알갱이가 돼 떨어지더라고요. 이 알갱이가 공정 중인 렌즈에 들러붙는데 도통 떨어지질 않는 거예요. 도저히 감당이 안 돼 신축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다 8월에 다른 생산 시설에서 또 한번 불이 났어요.
두번째 사고 일주일 뒤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확인해 보니 암이더라고요, 위암. 다행히 초기에 발견돼서 절반 정도 떼어내고 잘 버텨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원래 그해에 상장도 추진하려 했는데 결국 포기했고요. 돌이켜보면 그때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일련의 위기들,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전화위복이 된 것 같습니다. 함께 시련을 겪고 이겨낸 덕분에 직원들하고 일종의 패밀리십이 형성됐어요. 특히 새 건물을 지으면서 다들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직원들 하나하나가 굉장히 헌신적으로 일해주더라고요. 서로 끈끈했던 만큼 회사를 향한 애정도 그만큼 컸던 거죠.
그때 저도 참 감명을 많이 받았습니다. 직원들을 위한 복리후생이나 성과급 체계에도 더 신경을 쓰게 됐고요. 삼성의 관련 제도를 제가 잘 아니까 그걸 참고해 제도를 많이 고쳤죠. 그때쯤 되니까 직원들 입에서 “금방 갈 사람은 아니네” 소리가 나온 것 같아요. 일종의 믿음이 생긴 거죠. 물론 제가 오고 나서 실적이 계속 올라가는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지만요.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황충현님/리멤버
Chapter. 5
4년 만에 쓴 상장 성공 드라마, 반전의 열쇠는?
빠른 신제품 출시, 가격 경쟁력 확보로 신사업 공략
초반엔 실패… “시행착오, 많고 빠를수록 좋아”
신사업 힘입어 취임 4년 만에 코스닥 상장 성공
삼양옵틱스는 2017년 663억의 연매출과 200억원의 영업 이익을 벌며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코스닥 상장도 성공하고요.
신사업이었던 자동 초점 렌즈의 시장 진출을 잘 밀어붙이고 성공시킨 게 주효했기 때문입니다. 한달에 한번씩 온라인 판매 사이트나 매거진에 나온 우리 제품 평가를 쫙 모아서 리뷰를 했어요. 고객들이 우리 제품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다 나와 있잖아요. 데이터와 고객 목소리만 우직하게 들이미니까 직원들도 점차 관성을 깨고 변화의 필요성에 수긍하게 됐죠.
신사업은 지극히 후발주자였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요?
관련 기술을 어느 정도라도 익힌 사람이 회사엔 아예 없었어요. 예전에 삼성에서 인연을 맺었던 분들이나, 일본 퇴역 기술자들을 아파트까지 내주면서 기술 고문격으로 모셔왔어요. 직원들한테 일종의 선생님을 붙여준 거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해도 기술 면에서 일본 업체들을 따라잡을 순 없었습니다. 그들과 비슷한 가격으로 같은 시장 포지션에서 싸우면 필패란 얘기였죠. 그럼 어떻게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도 명확한 겁니다. 우리가 공략 가능한 가격대는 정해져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특정 원가에 맞춰 제품을 생산하는 방법밖에 없는 거죠. 타겟 고객에게 꼭 필요한 기능들만 남겨 군더더기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낮췄습니다.
또 하나의 시장 공략 포인트가 바로 ‘빠른 유통’이었습니다. 보통 고객이라 하면 소비자만을 떠올리지만, 중간 유통 업체들도 당연히 고객이거든요. 우리 제품을 팔아주겠다고 선택하는 이들이니 말이죠. 이들은 신제품을 잘 내놓는 브랜드를 선호합니다. 신제품일수록 상대적으로 더 잘 팔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일본 업체들은 신제품 개발 주기를 대략 2년으로 잡고 연간 신제품을 5개 정도 선보여요. 우린 이 주기를 10개월 안쪽으로 당기고 파생 상품까지 더해 신제품을 연간 10개가량 내놨습니다. 당시 일본 경쟁사 사장과 자주 얘기를 나눴는데 “당신이 부럽다. 우린 죽어도 사이클 단축은 못 한다”고 하소연하더라고요.
삼양옵틱스가 2021년 출시한 자동 초점 렌즈 2종/삼양옵틱스
신제품을 어떻게 그렇게 뚝딱 많이 만들었나요?
비결은 하나죠. 고객의 목소리를 죽어라 듣는 겁니다. 그럼 손쉬운 기술로도 풀어줄 수 있는 여러 니즈를 발견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촬영할 때 신호를 주기 위해 불을 깜빡거리게 하는 것도 정말 간단한 기술로 해결된 건데 고객들이 무척 좋아했죠.
<“시행착오는 빨리, 많이 겪는 게 좋아요. 적어도 다음엔 그 실수들을 안 할 거 아니에요.”>
별다른 시행착오는 없으셨나요?
왜 없었겠습니까. (웃음) 처음으로 출시한 2개 기종의 자동 초점 렌즈는 대실패였어요. 초점을 맞출 때마다 소음이 났기 때문이죠. 귀에도 거슬릴 뿐 아니라 동영상 찍을 때도 녹음이 돼 큰 문제였어요. 아예 예상을 못 했던 문제는 아닌데 일종의 타협을 한 대가였죠. 그렇게 타협한 상품은 다 시장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시행착오도 빨리, 많이 겪는 게 좋아요. 적어도 다음 시도에선 그만큼의 실수들을 죄다 안 할 거 아니에요. 이후 수없이 제품 테스트를 하면서 어떤 부분에서 소리가 나는지 찾게 했어요. 특정 기술이 필요하면 어떤 스펙의 선생님이 필요한지 묻고 어떻게든 모셔 왔죠. 그 결과 소음 문제는 크게 개선됐고 현재까지도 우리만의 시장 포지션에서 잘 살아남고 있습니다.
서울 역삼동 리멤버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황충현님/리멤버
Chapter. 6
40년 카메라 대부에게 카메라란?
올해 8월, 취임 10년 만에 CEO 자리서 물러나
카메라 사업 해답은 “늘 시장과 소비자에 있어”
“‘왜’를 따지며 일해야 10년 뒤 결과물에 만족”
올해 경영에서 물러나셨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났더라고요. 너무 오래 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작년에 먼저 물러나겠다고 했는데 후임자를 찾을 때까지 1년만 더 있어달라 하더라고요. 약속대로 1년이 지난 올해 봄 재차 용퇴 의사를 밝혔어요. 결국 후임을 못 찾았는데 고맙게도 대주주가 직접 대표를 맡겠다고 하더라고요.
향후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관둔 지 며칠 됐다고 벌써 계획이 있겠어요. 쉬면서 책을 좀 많이 보려 하고 있어요. 당장 욕심에 각종 인문, 마케팅 서적을 많이 사놨는데 완독한 책은 그리 많지 않아요. 그래서 뭔가 찜찜하죠. (웃음) 운동도 하면서 체력 관리에도 더 신경 쓸 참입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고질병인 중소기업의 인재 공백 문제엔 관심이 조금 있어요. 특히 능력 있는 시니어 활용을 통한 문제 해결에 말이죠. 사실 직장에 다닐 때부터 가져온 오랜 문제 의식이기도 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삼양옵틱스에서도 시니어 채용을 통해 나름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잖아요. 같은 맥락에서 이번 인터뷰도 여러 기업에 비슷한 영감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수락한 측면도 있어요.
카메라와 함께 한 세월만 40년입니다. 카메라 사업의 본질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사진 예술의 만족과 발전입니다. 이걸 쉽게 풀면 사진 찍는 사람이 의도한 대로 사진이 잘 찍히게 한다는 거예요. 카메라 회사가 진짜 잘나가면 그 방면 전문가나 리더들이 한마디씩 해요. 진짜 유명한 사진가들의 작품엔 카메라가 어떤 기종이고 렌즈는 어떤 제품인지 그 정보가 한줄씩 올라가요.
바로 이 관점에서 카메라 사업을 성찰해봐야 하는 거죠. 단순히 사업이라고 해서 비용 낮춰서 많이 팔자는 문제로만 생각해선 안 되고요. 그리고 결국 이 사업의 본질을 구현할 해답은 특출난 기술에 있다기보다 늘 시장과 소비자에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제품이 안 그렇겠냐만은 특히 제조업은 그 제품을 쓰고 다루는 사람에게 언제나 답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늘 ‘왜’를 자문하며 일하면 좋겠습니다. 그게 10년 후 엄청 다른 결과물을 만들 테니까요.”>
후배 직장인이나 사업가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아무래도 삼성에서 오래 일하고 배우면서 그쪽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거기서 많이 쓰는 말 중 ‘업의 개념’이란 말이 있어요. 쉽게 풀면, 뭐가 됐든 핵심과 본질을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바로 위 질문에서 제가 답했던 말과도 연관되는 얘기죠.
예전에 이건희 회장이 신라호텔의 업의 개념을 얘기했던 일화는 유명하죠. 흔히들 서비스업으로만 생각하지만 부동산업, 설비·장치업도 해당된다는 얘기였죠.
모두가 바쁘다 보니 그저 닥치는 대로 일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그럴수록 ‘이걸 왜 하는 거지?’ ‘왜 이런 방식으로 하고 있지?’를 자문하며 일하면 좋겠습니다. 그 답의 유무에 따라 10년 뒤 결과물은 천양지차로 다를 테니까요. 부디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프롤로그 주인공과의 협업을 원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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