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원
現 롯데쇼핑 마트사업부 상무
롯데마트의 와인 전문 매장 ‘보틀벙커’를 탄생시킨 외식 사업 전문가입니다. 글로벌 경영 컨설팅 펌에서 10년 이상 근무한 베테랑 컨설턴트 출신으로, CJ푸드빌·와인주막차차 등에서 외식 사업 경험을 쌓았습니다. 현재는 롯데마트·슈퍼의 마케팅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2021년 말 등장과 함께 국내 와인 유통 업계의 판도를 뒤바꾼 와인 매장 브랜드가 있습니다. 4000종 이상의 와인이 구비된 당시 최대 규모의 와인 매장으로, 불과 1년 만에 연매출 200억원을 달성했습니다.
뒤따라 현대·신세계 등에서도 초대형 와인 매장을 내놨고, 중·소형 와인샵들은 줄줄이 이 매장 브랜드 특유의 큐레이션을 도입하고 있죠. 롯데마트의 와인 전문 매장 ‘보틀벙커’의 이야기인데요. 오늘 프롤로그의 주인공은 바로 이 보틀벙커를 탄생시킨, 경영 컨설턴트 출신의 외식 사업 전문가 강혜원님입니다.
<“삶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사실 일상의 작은 변화들이에요. 평범한 밥상에 올려진 와인 한 잔처럼요. 그 변화를 모두에게 선사하는 게 이루고 싶은 꿈입니다.” >
보틀벙커의 성취엔 푸드 페어링, 시음 코너 등 ‘쉬운 와인’ 전략이 주효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략의 기저엔 강혜원님을 외식 사업으로 이끈 저 꿈이 있었는데요. 과연 10년 넘게 잘나가던 베테랑 경영 컨설턴트를 ‘와인 대중화에 미친 자’로 홀려낸 그 마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롯데마트 보틀벙커 서울역점에서 만난 강혜원님/리멤버
Chapter. 1
뉴요커 동경하던 서울대생, IMF 한복판서 마주한 현실
만화 보며 뉴욕 누비는 커리어 우먼 꿈꿔
IMF 때 홈쇼핑 MD 취업… “매일이 전투”
화려한 커리어 뒤편 ‘치열한 현실’ 깨달아
서울대 의류학과를 나와 처음엔 홈쇼핑 회사에 다니셨습니다.
‘뉴욕 길거리에서 정장에 근사한 백을 메고 출근하는 커리어 우먼.’ 어릴 적 로망이었어요. 만화를 어려서부터 좋아했는데, 선망하던 주인공들이 다 이런 커리어 우먼이었거든요. 막연히 무슨 직업이 됐든 엣지 있고 세련되게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죠. 의류학과에 가고자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에요. 아주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취업 땐 홈쇼핑도 비슷한 이유로 끌렸어요. 처음엔 주변에서 하도 고시를 많이 보길래 저도 CPA를 했어요. 딱 일주일만이요. (웃음) 원체 호기심이 많아 엉덩이 붙이고 하나만 들입다 파는 일은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가뜩이나 당시 IMF였으니 빨리 포기하고 취업을 알아봤죠. 다 고만고만한데 딱 한 회사가 눈에 띄더라고요. 그게 바로 LG홈쇼핑이었죠. 당시만 해도 홈쇼핑은 완전 첨단(?) 비즈니스였어요. 매일 엣지 넘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했습니다. 합격해 MD(상품기획자)로 근무하게 됐어요.
홈쇼핑 MD로서의 삶, 기대대로였나요?
재미는 있었어요. 말이 ‘상품 기획’이지 그보다 훨씬 다양한 일을 했거든요. 홈쇼핑은 하나의 유통 채널이지 직접 상품을 만들진 않잖아요. 그래서 상품 입점 기획부터 납품·재고 관리, 유통까지 판매의 A-Z를 다 신경 써야했습니다. 이 과정을 MD들이 다 책임졌고요. 방송 펑크가 나면 대타 출연도 했어요.
하나하나 결코 쉽지 않았어요. 당황의 연속이었죠. 당시 IMF 때문에 판로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홈쇼핑으로 입점 문의가 물밀듯 쏟아졌어요. 입점 업체 상대는 보통 연차가 좀 있는 선배들이 맡는데, 일이 너무 많으니까 신입인 저한테까지 내려왔죠. 업체들은 나름의 절박함으로 왔는데, 웬 새파란 신출내기가 상대하니 대번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다짜고짜 반말에 “윗사람 데려와!”라고 윽박지르기 일쑤였죠.
<“현실은 정글이었죠. 동경하던 만화 주인공들의 삶도 치열한 발버둥 끝에 얻어지는 보상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대응하셨어요?
윽박질만 하면 사실 다행이죠. 어린 제가 만만하니까 뒤통수까지 치는 경우도 많았어요. 한번은 제조사가 기일이 지나도록 납품을 안 해 회사가 뒤집어진 적이 있어요. 당장 쫓아가 보라 해서 찾아가니 뻔뻔하게 타사 제품을 만들고 있더라고요. 좋은 말로 따졌더니 오히려 눈을 부라리며 영업 방해라고 나가라지 뭡니까. 눈물이 나오려다 기세에서 밀리면 큰일이겠다 싶어 꾹 눌렀습니다. 대신 버티고 앉아 죽어라 큰 소리치며 밤새 뻗댔어요. 그제야 겨우 요청대로 움직이더라고요.
고작 1년차 때 일들이지만 현실은 정글이란 걸 여실히 체감했어요. 어릴 적 동경하던 만화 주인공들의 삶도 사실은 치열한 전투와 발버둥 끝에 얻어지는 보상이란 걸 깨닫는 순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과는 별개로 MD란 직업은 끝까지 배우고 싶은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4년 넘게 하셨잖아요?
MD란 ‘무엇이 잘 팔릴까’를 판단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 판단을 대부분 노하우나 감에 의존하고 있더라고요. 홈쇼핑이 워낙 초기니까 원체 활용할 데이터가 많이 없기도 했고요. MBTI상 파워 J(계획형)거든요. (웃음) 논리나 체계 없이 일해야 한다는 게 잘 적응이 안 되고 불만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차에 접어들 무렵, 저희 상무님께 한 통의 이메일을 보내게 됩니다.
롯데마트 보틀벙커 서울역점에서 인터뷰 중인 강혜원님/리멤버
Chapter. 2
“컨설팅은 천직” 베테랑이 돌연 사표 쓴 사연?
상품기획자→경영 컨설턴트 직무 전환
IBM·BCG서 11년차 베테랑 거듭나지만
해외서 다양한 성공 목도하고 새 도전 결심
무슨 이메일을 보내신 건가요?
당시 회사 안에 전략기획팀이 새로 생긴다는 거예요. 연차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들로만 구성하기로 해서 갓 1년된 전 대상자가 아니었죠. 하지만 직감했습니다. ‘나도 저 팀에 반드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름부터 ‘전략기획’이니까 왠지 업무가 아주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처리될 것 같았거든요. 너무 하고 싶었던 동시에 너무 잘 맞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메일을 보낸 거예요. 상무님이 그 팀 담당이셨거든요. “막내로서 해야할 일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PPT 잘 만들 자신 있어요. 절 받아주십쇼!” 이런 내용들이었는데 완전 미쳤던 것 같아요. (웃음) 다행히 상무님이 귀엽게 받아주신 덕에 이 팀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남들은 제가 PPT 잘해서 들어간 줄 알았어요.
그럼 LG홈쇼핑 4년반 중 3년 이상을 MD가 아닌 컨설턴트로 일하신 거군요?!
네, 일종의 사내 컨설턴트였죠. 업무를 어떻게 체계화·효율화할지 연구하고 생산성을 개선해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가령 홈쇼핑 콜센터 직원들의 주문 처리가 늦어지는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는다거나 하는 일이었어요.
논리와 체계를 요하는 이런 컨설팅 업무가 기대대로 너무 잘 맞았습니다. 완전 천직이었죠. (웃음) 오죽하면 팀 선배들한테 “여기 있지 말고 컨설팅 펌으로 가라”는 말까지 들었을 정도예요. 실제로 나중에 IBM 컨설턴트들과 협업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제안을 받아 거기로 이직하게 됐습니다.
경영 컨설턴트로 아예 전업을 하셨군요. 잘 적응되셨나요?
아니요, 처음부터 당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입사 다음날부터 바로 현장에 보내더라고요. 생판 처음 겪는 산업과 클라이언트를 상대해야 하는데 말이죠. 앞에선 다 알아듣는 척하고 있었지만, 뒤에선 땀이 삐질삐질 나더라고요.
결국 공부만이 살 길이었습니다. 프로젝트마다 각종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연구하느라 밤샘이 기본이었고, 주말에도 서점에 처박혀 관련 분야 책을 열댓권씩 읽었어요. 그래야만 현장에서 바보가 되지 않고 잘 소통해 해결의 실마리들을 찾아나갈 수 있었으니까요.
몸은 부서질듯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희열이 정말 크더라고요. 프로젝트가 아무리 어렵고 복잡해도 해결책을 찾아냈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어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고 싶었고요.
그런데 IBM으로 이직한 지 3년 만인 2007년 돌연 프랑스로 유학을 떠납니다.
일은 너무 재밌었지만 체력적 한계에 다다랐어요. 당장의 재충전이 필요했습니다. 마냥 쉴 순 없으니 겸사겸사 경영 관련 이론적 베이스도 쌓고자 했던 거죠. 그래서 파리 인근의 인시아드 경영대학원이란 곳에 경영학 석사(MBA)를 하러 간 거예요. 열심히 해서 1년 후 학위도 잘 땄습니다. 당시엔 그게 참 기뻤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유학 생활에서 가장 값지게 건진 건 학위가 아니더라고요.
<“유럽에선 성공을 바라보는 시각이 굉장히 느긋하고 다양했습니다. 돈, 명예 아닌 다양한 성공 척도를 보고 배웠죠.”>
그럼 어떤 게 가장 값졌나요?
이 학교는 유난히도 국제적이었어요. 해외 경영대학원은 보통 자국인이 60~70%는 되거든요. 그런데 여긴 특정 국가 출신이 10%를 넘지 않게 아예 교칙으로 못 박아놨었어요. 더구나 유럽은 나라마다 역사·산업·성향이 모두 다르잖아요. 그만큼 이야기가 저마다 다채로웠고 삶의 태도도 한국에선 경험 못해봤을 정도로 독특했죠. 단적으로 시험 기간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건 죄다 아시아 애들뿐이었어요. 유럽 애들은 대화로 배우는 게 더 크다며 파티를 벌였죠.
그만큼 ‘성공’을 바라보는 시각도 굉장히 느긋하고 다양했어요. 한국이나 미국, 일본은 개인이 높은 위치로 올라가는 걸 성공으로 보잖아요. 기업도 빠르게 매출을 올려야만 성장으로 보고. 헌데 유럽은 꼭 그렇게만 성공을 평가하지 않아요. 자신만의 비전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봤느냐, 어떤 문화를 만들어 조직에 기여했느냐 등이 모두 성공의 척도가 될 수 있죠. 이런 기풍이 제게도 스며들어 훗날 저만의 삶의 가치와 비전을 정립하는 데 정말 큰 영향을 줬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2008년 BCG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복귀합니다. 왜 다시 컨설턴트였나요?
더 잘할 거란 자신이 있었어요. 구체적 스킬을 배우고 온 건 아니지만, 경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과 고민 요소를 알게 된 만큼 시야가 넓고 깊어졌거든요. ‘컨설턴트 강혜원 2.0’으로 거듭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달까요? (웃음) 게다가 BCG에선 IBM 때와는 다른 속성의 프로젝트들을 맡았어요. 이전엔 ‘효율화’ ‘체계화’에 주력했다면, BCG에선 ‘매출 상승’ ‘고객 증대’ 등 사업 전략을 많이 고민하게 됐죠. 의뢰 산업 분야도 제가 좋아하는 유통·소비재 쪽이 많았고요. 훨씬 재밌고 새로 배우는 것도 많았어요.
5년 뒤 다시 BCG를 관두면서 10년 이상의 컨설턴트 생활을 끝마치셨습니다. 어떤 각오셨나요?
어느날 대기업 다니던 남편이 갑자기 헐리웃으로 음악 공부를 하러 간다는 거예요, 나이 마흔에! (웃음) 나름 여기서 입지를 잘 다져가던 터라 막판까지 정말 망설였지만, 결국 저도 함께 가기로 했죠. 미국에서 노는 건 쉬워도 직장에 다니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일 거잖아요? 그 경험에 베팅 해본 거죠. 그렇게 BCG에서의 마지막 2년은 미국 LA 오피스에서 근무했습니다.
한국보단 워라밸이 좋은 편이라 어느 정도 쉬면서 생각 정리를 많이 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오니 왠지 더는 컨설턴트를 못 하겠더라고요. 유학 시절 만난 친구들이 자꾸 생각나면서 ‘‘강혜원’만의 성공은 대체 뭘까’란 고민이 맴돌았죠. 한참 고민한 끝에 답을 내렸습니다. ‘그래 컨설팅은 할 만큼 했고 배울 만큼 배웠다. 이젠 다른 길에서 그 성공을 찾아보자!’
롯데마트 보틀벙커 서울역점에서 인터뷰 중인 강혜원님/리멤버
Chapter. 3
외식 사업가로 대변신! 그러나 연거푸 찾아온 2번의 좌절
CJ서 미국 비비고 매장 맡아 매출 3배↑
퓨전 한식 와인바 프랜차이즈화 추진도
그러나 사측과 견해차로 2연속 조기 퇴사
2013년 CJ푸드빌 상무로 발탁되셨습니다. 뚜레쥬르·빕스 등을 거느린 CJ의 외식 전문 계열사죠. 어떤 계기로 이런 외식 사업에 합류하게 되셨나요?
컨설턴트 때 CJ 쪽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인연이 돼 제안을 받았습니다. ‘한식 세계화’란 비전이 멋있어서 합류했어요. 입사 3개월쯤 지나 CJ푸드빌의 전략 담당 상무로 발령이 나면서 본격적인 경영 업무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당시 CJ푸드빌은 실적이 정말 안 좋았어요. 비비고 레스토랑들이 손실을 많이 내고 있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비비고는 가공 식품 브랜드가 아니라 비빔밥을 파는 한식당이었습니다.) 해외에서도 손해가 컸고 그중 미국이 제일 심했어요. 이 식당들이 전부 LA에 있었는데 제가 거기 살아본 데다 컨설턴트 출신이니 사업을 되살릴 적임자일 거란 이유로 다시 미국에 가게 됩니다.
가보니 어떠셨나요?
당장 기본 운영부터 벅차더라고요. 식당 일꾼 대부분이 히스패닉 이민자들이었는데 문화 코드가 다르니 합을 맞추기 정말 어려웠어요. 설상가상 미국은 식품 관련 법규부터 외식 패턴, 습관, 자잘한 행동 양식까지 전부 한국이랑 다르잖아요. 이 모든 걸 딛고 LA 한복판에서 비빔밥을 팔아대야 하니 처음엔 골머리를 엄청 앓았습니다.
해결책을 찾으셨나요?
한국 유학생이나 주재원의 관점을 버리고 하루 온종일 LA 현지인의 시야로 바라보려고 노력했어요. 어느날 식당을 둘러보는데 현지인은 한 명도 없고 주재원들만 들어차 있더라고요. 반면 현지인들은 어쩌다 들어왔다가도 그냥 나가버리는 거예요. 붙잡고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뭘 시켜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어렵다”고 답하더라고요. 이걸 단서로 연구해 확실한 통찰을 얻었죠.
애초에 비비고의 지향점은 비빔밥계의 ‘서브웨이’였어요. 밥이면 밥, 토핑이면 토핑! 딱 간편하게 고를 수 있도록 해서 주문부터 서빙까지 굉장히 빠르게 이뤄지게요. 그런데 이 지향점이 완전히 뒤틀려버린 거예요. 당장 주재원들이 많이 오니까 한국식 입맛에만 맞춰서 사이드 메뉴가 덕지덕지 붙은 복잡다단한 한국식 반상을 대접했던 거죠. 그러니 잘될 턱이 있나요?
빠르게 음식을 고르고 받도록 철저히 메뉴를 간소화했어요. 대신 돌솥 플레이팅으로 제법 근사하게 대접하며 한식의 엣지는 충분히 살렸죠. 그랬더니 결과가 바로 나왔습니다. 리뉴얼 직후 시범 매장 매출이 한두달만에 3배로 뛴 거예요.
밥부터 토핑까지 간편하고 빠르게 고를 수 있도록 리뉴얼했던 미국 LA 비비고 매장/CJ푸드빌
그럼에도 1년 반 만에 관두게 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이 프로젝트가 재밌어서 계속 하고 싶었어요. 리뉴얼한 방식을 다른 매장들로도 확산시키면 승산이 컸을 거라고 지금도 믿어요. 하지만 회사에선 상무씩이나 되는 사람이 고작 레스토랑 몇개 실적에만 매달리는 게 탐탁지 않았던 듯해요. 한국에 돌아와 다른 사업 부문을 맡길 원했는데, 딴 선택지들 중에선 그다지 끌리는 게 없었습니다.
2015년 돌연 퓨전 한식 와인바 ‘와인주막차차’의 공동대표가 되십니다. 어떻게 된 사연인가요?
CJ를 관두고 잠시 쉬던 기간에 이 식당에 들른 적이 있는데 카피부터 너무 맘에 드는 거예요. “와인에 떡볶이가 어때서?” 카피에 딱 맞게 와인 안주로 떡볶이·차돌구이 같은 게 나오는데 진짜 맛있고 잘 어울렸어요. 게다가 와인 추천도 어찌나 센스 있던지요. 맛이나 바디감에 따라 ‘사다리 타기’로 쉽게 고를 수 있게 메뉴판을 짜놨더라고요. ‘와! 와인을 이렇게 쉽게 풀어낸다고?’ 감탄하며 식사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여기 대표님과 얘기할 기회가 생겼어요. “이 사업에 반했다. 같이 키우고 싶다. 혹시 도울 게 있다면 뭐라도 알려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선뜻 공동대표 자리를 제안하시더라고요. 직영점 몇개 있는 자영업 수준을 넘어서 어엿한 프랜차이즈로 기업화하는 게 당시 목표였는데, CJ에서 했던 일과 비슷해서 잘할 수 있겠단 생각에 합류했습니다.
<“일이란 게 마음처럼만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긴 웅크림의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7개월 만에 물러나십니다. 무슨 이유였나요?
부푼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일이란 게 막상 마음처럼만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창업자와 큰 방향성엔 서로 공감했지만 사업 속도를 두고 의견차가 좀 있었습니다. 저는 좀 더 교과서적인 입장이라 직영점의 수익성을 어느 정도 증명하면서 가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창업자는 더 빠른 속도를 원하셨어요. 점점 제가 동의할 수 없는 의사 결정들이 쌓이면서 스스로 물러나는 게 맞겠단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정녕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고민하는 긴 웅크림의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강혜원님이 공감했던 와인주막차차의 카피/와인주막차차
Chapter. 4
무계획 여행·라이브바 창업… 프리랜서 5년이 선사한 터닝 포인트!
무작정 떠난 북유럽 5개국 80일 배낭 여행
“마음이 끌리는 대로 경험해보자” 결심 후
남편과 와인바 열고, 자문·강의 등 다양한 활동
2016년부터 장장 5년간의 프리랜서 생활이 시작됩니다.
와인주막차차를 그만두고 80일간 남편이랑 북유럽 5개국 배낭 여행을 갔어요. 그때 저답지 않은 아주 놀라운 변화가 생겨요. 아까 제가 파워 J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오죽하면 신혼여행도 30분 단위로 전부 계획표를 짜서 다닐 정도였는데요. 놀랍게도 북유럽 여행 땐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어요. 첫날 숙소만 잡아놓고 이후론 그때그때 끌리는 대로 다녔죠. 파워 P(즉흥형)로 재탄생한 겁니다. (웃음)
<“마흔살까진 치밀한 계획형으로 살았죠. 하지만 이후론 뭔가 계획하고 움직일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변화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비단 여행에서만 생긴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25살 무렵 아버지 조언에 따라 향후 20년간을 상상해서 미래 이력서를 쓴 적이 있었어요. 마지막에 ‘유통·소비재 기업의 전문 경영인’이 돼 있을 거라 예측했는데 기가 막히게 맞더라고요. 나머지 커리어도 얼추 맞았습니다. 목표 달성에 필요한 경험과 역량을 계획적으로 착착 쌓아왔던 거죠.
그러나 이 시점부턴 미래 이력서란 게 더이상 필요 없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대신 ‘강혜원다운 성공’을 찾는 데 주력해야할 시점이라고 봤죠. 아무리 거창하게 세워본들 남들도 떠올릴 법한 뻔한 목표라면 그건 저만의 성공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거잖아요? 때문에 이젠 뭔가를 계획하고 움직이기보단, 순간순간 제 마음이 뾰족히 끌리는 데 집중해 살아보자고 결심했죠. 아무렴 마흔 넘은 사람이 계획 좀 없이 산다고 그간 쌓은 커리어가 어디 다 사라지는 건 아닐 거잖아요. (웃음)
그 때문인지 이 기간 각종 스타트업 자문, 대학 강의 등 다양한 활동을 하셨습니다.
헛산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웃음) 다행히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들이 있어서, 한 군데 적을 두기보다 여러 집단에서 프로젝트 단위로 일했습니다. 그러면서 IT·스타트업·요식·투자 등 정말 다양한 업계 사람들과 교류했어요.
그리고 이 시기가 제겐 참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이전엔 맨날 컨설턴트들, 대기업 임직원들이랑만 만났거든요. 다소 획일적인 삶의 목표와 성공들만 보고 있다가, 기존엔 못 봤던 정말 다양한 종류의 비전이나 꿈을 접하게 된 거죠. 프랑스 유학 시절 유럽 친구들에게서 관찰한 다양한 성공의 척도가 제게 다시 되새겨지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외식 사업자 포럼에서 사업 기획 관련 강의를 하고 있는 강혜원님/본인 제공
이 무렵 남편과 홍대에 라이브바도 여셨다면서요?
북유럽 여행이 끝나고 딱 2달 만에 오픈했어요. 작정하고 단숨에 밀어붙인 거죠. 저는 와인을 좋아하고 남편은 음악을 맘껏 할 수 있으니 너무 끌렸거든요.
그저 돈 많이 버는 게 목표였다면 ‘실패’라고 평가됐을 거예요. 진작 문 닫았을 거고요. 하지만 진짜 목표는 저희 부부와 친한 뮤지션들이 함께 아지트로 삼을 만한 그런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그런 면에서 저희는 완벽히 ‘성공’한 거죠. 코로나 때 뮤지션들이 진짜 힘들었잖아요. 이들과 그 시기를 꿋꿋이 잘 버텨서 지금까지 영업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이처럼 5년간 원없이 마음이 끌리는 대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일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저만의 성공을 발견하기 위해 무언가에 홀린 듯 자석처럼 이끌릴 준비가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마침내 그 자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편(맨오른쪽)과 함께 연 라이브바에서 북유럽 여행기 발간 기념 북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는 강혜원님/본인 제공
Chapter. 5
“와인으로 찾는 일상의 설렘” 보틀벙커로 이룬 꿈
롯데마트 새 와인 매장 브랜드 적임자로 발탁!
초대형 와인샵 ‘보틀벙커’로 연매출 200억↑
크고작은 유통사들 따라오며 업계 혁신 주도
그 자석은 무엇이었나요?
와인을 소재로 한 ‘신의 물방울’이란 일본 만화가 있었어요. 스토리가 황당무계해 호불호가 갈렸지만 저는 너무 재밌더라고요. 총 40권이 넘었는데 10번은 넘게 돌려봤던 것 같아요. 자연스레 거기 소개된 와인들까지 궁금해져서 이것저것 찾아 마셔봤죠. 그러면서 점점 와인에 매료됐어요. 프랑스나 미국에 있을 땐 저녁마다 친구들이랑 와인을 즐기고 각종 와인 산지로 함께 관광을 다닐 정도였죠. 각각의 와인에 저만의 스토리까지 얽히니까 더 빠져들게 되더라고요.
프리랜서가 되니까 맨먼저 생각난 것도 와인이었어요. 아예 와인 스터디를 해 산지·품종별 특징 등을 죄다 공부했습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재밌어서 5년을 넘게 했어요. 나중엔 스터디 친구랑 와인 클래스도 작게나마 열어보고, 클럽하우스에서 와인 토크도 진행해봤죠. 마치 취해가듯 점점 더 와인에 이끌려 가고 있더라고요.
2021년 롯데마트 상무(주류 부문장)로 전격 발탁되십니다. 와인 덕분이었나요?
맞아요. ‘언젠간 어떻게든 와인으로 사고 한번 쳐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롯데마트·슈퍼 대표님께 제안이 온 거예요. 대표님도 BCG 출신이셨는데 후배 중 와인에 홀린 애가 있단 걸 아셨던 겁니다. 와인을 메인으로 한 새 사업을 구상 중이셨는데 적임자로 느껴지셨나 봐요. 컨설턴트 출신으로 기업 경영에 밝고 외식 사업 경험도 있는데, 와인도 이만큼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을 거잖아요.
저로서도 이전의 그 어떤 기회들보다 전율이 스치는 제안이었어요. ‘이건 해야만 한다. 어쩌면 강혜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는 생각이 들었죠. 고민 없이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맡겨진 과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나요?
3가지 미션이 있었어요. 첫째, 압도적으로 큰 와인 매장을 만들어라. 둘째, 이 매장 때문에 롯데마트에 오게 해 점포 매출을 견인해라. 셋째, 이 모든 걸 연내에 이뤄라. 제 입사가 5월이었거든요. 곧바로 멘붕이 왔죠. 그치만 인생 뭐 별 수 있나요. 미친 듯이 하는 수밖에요.
일단 급히 팀부터 모았습니다. 외부 인사라 직원들을 잘 모르니 사내 공모를 써먹었어요. 여기서 뽑힌 팀원들이 아주 에이스였습니다. (LG홈쇼핑 시절의 저도 그랬잖아요? (웃음)) 경쟁사들이 알면 안 되니 팀 이름도 암호명처럼 독특하게 지었어요. 와인을 가리키는 ‘W’만 대표 문자로 따왔죠. 그렇게 ‘프로젝트W’란 팀이 탄생했습니다.
프로젝트W팀의 성공 비전은 어떤 것이었나요?
‘왜 와인이어야 하나’에서 시작했어요. 저부터 설득돼야 소비자들도 설득할 수 있을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내가 왜 와인을 좋아했을까’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더라고요. 찬찬히 와인에 얽힌 제 삶의 순간들을 되돌아보니 서서히 감이 잡혔어요.
식탁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매일 하루 2~3번씩 마주하는데 지루하려면 한없이 지루해요. 그런데 평범한 밥상도 와인 한 잔만 올려놓으면 분위기가 확 달라져요. 그저 그런 한번의 끼니를 근사한 저녁 식사로 바꿔낼 줄 아는 게 바로 와인이었던 거예요.
결국 제가 와인을 사랑한 이유도 ‘일상을 특별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그 힘’ 때문이었던 거죠. 그걸 깨닫고 나니 구현해야할 비전도 아주 명확해졌어요. 와인 자체의 어려움에 가려진 이 힘을 소비자들도 일상적으로 체감할 수 있도록 와인을 아주 쉽게 대중화하는 것이었어요.
그 대중화 전략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나요?
일단 무엇이 와인을 어렵게 만드는지 낱낱이 알아야 했습니다. 단기간에 200명 정도의 고객들을 인터뷰했어요. ‘와인은 언제 어디서 사는지’ ‘와인 쇼핑 때 불편한 점은 무엇이었는지’ 등 국내 와인 소비의 A-Z를 죄다 물었습니다. 집요하게 캐묻고 에세이 시험 보듯 줄글로 아주 세세한 답변까지 받아냈죠. 결과를 살펴보니 단계별로 공통적 고민점들이 있으시더라고요. 맞춤식 솔루션들을 하나씩 개발했습니다.
먼저 와인을 아예 잘 모르는 ‘와린이’분들은 푸드 페어링 관점에서 접근하기로 했어요. 이분들은 와인을 언제·왜 먹어야 하는지 전혀 관심이 없거나 모르셨거든요. “삼겹살 먹을 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이 와인 드셔보세요”하는 식으로 아주 쉽고 명쾌히 추천해주는 게 최적의 답이 될 수 있었죠. 와인을 음식·계절별로 추천하는 코너를 마련했고 이게 완전 적중했습니다.
보틀벙커의 푸드 페어링 코너를 홍보하는 이미지/보틀벙커
와인을 좀 아시는 분들을 위해선 큐레이션에 힘을 썼어요. 이분들은 지역·품종별로 와인을 살펴보고 싶어 하시는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와인샵이 그런 정리가 안 돼 있었어요. 저희는 모든 와인을 분류별로 진열하고 전부 인덱싱까지 하기로 했습니다. 매장뿐 아니라 앱에서도 검색을 하고 수량과 위치를 파악해 찾아오실 수 있게끔요.
마지막으로 공통적으로 갖고 계신 고민이 바로 ‘맛’이었어요. 아무리 지역이 어떻고, 품종이 어떻고 간에 맛 없으면 낭패잖아요. 그래서 2가지를 도입했죠. 먼저 모든 와인의 가격표에 모바일 QR 코드를 달아놔서 그걸 인식시키면 맛을 상세히 알려주는 설명서가 나타나도록 했습니다. 그래도 잘 모르겠다 싶은 분들을 위해선 아예 와인을 조금씩이라도 마셔볼 수 있는 ‘테이스팅 탭’이란 코너도 도입했어요.
이렇게 준비해 딱 반년 만에 롯데마트의 와인 전문 매장 ‘보틀벙커’를 출범시킵니다.
와인을 조금씩 마셔볼 수 있는 보틀벙커의 테이스팅 탭/보틀벙커
<“국내 와인 유통의 판도를 바꿨다 자부합니다. 모두의 일상에 와인을 한걸음 더 가까이 오게 한 듯 해 뿌듯합니다.”>
출범 1년 만에 연매출 200억원을 넘기고, 입점 점포는 주류 매출이 6배 이상 늘게 됐습니다. 신세계·현대 등에서도 앞다퉈 초대형 와인샵을 내놓게 됐고요. “보틀벙커가 와인 유통 업계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까지 나왔습니다.
개인 강혜원으로선 저희 고객뿐 아니라 와인에 호기심이 생긴 모두의 일상에 와인을 한걸음 더 가까이 오게 한 것 같아 뿌듯해요. 대형 마트는 물론, 작은 와인샵들도 보틀벙커식 큐레이션을 도입하는 곳들이 정말 많아졌거든요. 국내 와인 유통의 구조를 혁신했다고 자부합니다.
임원 강혜원으로선 보틀벙커를 통해 롯데마트 점포 전체 매출을 끌어올렸단 게 가장 뿌듯했습니다. 대표님이 제시한 3가지 미션 중 핵심이었으니까요. 고객 절반 이상이 보틀벙커 때문에 롯데마트에 오시고, 나머지 매장에서 장을 보고 가세요. 대형 마트를 찾을 수밖에 없는 오프라인만의 역할을 보틀벙커가 충실히 해낸 거죠.
작년 롯데그룹 사내 시상식인 롯데 어워즈에서 보틀벙커 성공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업·마케팅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강혜원님과 동료들/본인 제공
Chapter. 6
“나랑 장보러 갈래?”가 데이트 신청이 된다?!
올해 초 롯데마트·슈퍼 마케팅 총괄로 발령
또다른 보틀벙커식 성취 만들어내는 게 미션
“장보기, 취향 곁들인 문화생활로 만들고파”
올해 초부턴 롯데마트·슈퍼의 마케팅을 총괄하게 되셨습니다.
보틀벙커의 성취를 다른 곳으로도 확대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생각해요. 특히 보틀벙커는 MZ세대 팀원들이 주축이 돼 아주 신나고 에너지 넘치게 일으켜 세운 브랜드예요. 이 동력을 롯데마트·슈퍼의 기존 브랜드들에도 발휘해보자는 거죠.
제2, 제3의 보틀벙커식 성취를 이뤄내라는 미션이군요. 이에 걸맞는 새로운 비전이 있으실까요?
살면서 가장 즐거웠던 때가 프랑스나 미국에서 살던 시절이에요. 해외라서 마냥 좋았던 건 아닙니다. (웃음) 그보다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전혀 진부하거나 단조롭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중 하나가 바로 ‘장보기’였어요. 매일 놀이터 가는 기분으로 장을 보러 갔죠.
특히 LA에 있을 땐 ‘파머스 마켓’이란 게 종종 열렸어요. 농부들이 직접 나와 본인들이 기른 작물을 파는 장이었는데요. 신기하게 같은 야채나 채소도 어떤 사람이 파느냐에 따라 맛이나 식감이 묘하게 다르더라고요. 음식이란 게 꼭 혀로만 즐기는 게 아니니까 그랬을 겁니다. 아주 사소한 경험만으로도 그저 그런 장보기가 취향이 곁들여진 문화 생활로 탈바꿈될 수 있단 걸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치 와인 한 잔에 밥상이 확 달라진 것처럼요.
그런데 한국에선 장보기가 떨어진 냉장고나 채우러 가는 귀찮은 일상으로만 여겨지죠. 여기엔 대형 마트들의 책임이 커요. 아마 간판만 가리면 고객들이 이 마트가 어느 마트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거예요. 이 반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봐요. “마트 갈까?”란 평범한 한마디가 “놀이공원 가자!”는 특별한 데이트 신청처럼 들리게 하는 것, 이게 제 비전입니다. 그런 장보기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게 제 사명이고요.
파워 J라고 하셨는데, 혹시 다음 스텝도 계획돼 있으실까요?
아니요, 없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내놓은 ‘커넥팅 닷츠’란 유명한 개념이 있잖아요. 과거에 본인이 이뤄놓은 일들을 선으로 잘 연결해 더 멋지게 살아가란 뭐 그런 뜻인데요. 제 커리어 여정과도 어딘가 잘 맞닿아 있는 말 같아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있어요. ‘만약 남편을 따라 LA에 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외식 사업을 하러 미국에 나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경험이 없었다면 프리랜서로 살아보는 일도 없었겠죠. 그럼 이만큼 와인 애호가가 돼 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보틀벙커도 해볼 수 없었을 거예요.
음악하는 남편과 만나신 것도 중요한 점들 중 하나였겠네요.
예? 그렇죠…? (웃음) 여하간 어느 정도 한 분야에서 역량과 경험을 쌓은 이후라면 자기가 온마음을 다해 빠져들 일을 찾아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만 헌신할 수 있으니까요. 과거의 점들이라는 게 그냥 이어지지 않더라고요. 치열함이란 아교가 필요한 거죠.
<“프로란 죽은 경력이 아닌 살아있는 경험, 과거의 타이틀이 아닌 현재의 비전으로 이야기하는 사람”>
강혜원님이 생각하시는 ‘프로’란 무엇인가요?
“그 사람이 마케팅 담당 임원이래. 그런데 진짜 프로야”란 문장을 보면, 앞부분(임원)과 뒷부분(프로)은 전혀 다른 의미잖아요. 그 사람의 경력과 타이틀만으로는 프로가 될 수 없다는 거죠. 결국 ==프로란 죽은 경력이 아닌 살아있는 경험, 과거의 타이틀이 아닌 현재의 비전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인 거예요.
아무리 회사 실적이 좋아도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게 없다면 껍데기죠. 반대로 사정이 안 좋아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성과를 내거나, 개선할 구조라도 세팅할 수 있다면 그건 아주 생생한 경험이 됩니다.
롯데마트 보틀벙커 서울역점에서 인터뷰 중인 강혜원님/리멤버
그냥 앉아만 있는다고 다 경험이 되는 게 아니죠. 무지막지한 치열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치열함을 가능케 하는 게 바로 꿈이에요. 어린 날의 순진한 동경이 아니라, 내 발자취와 역량이 이끄는 비전 말입니다.
“사랑이란 찾는 것이 아니다. 단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신의 물방울’ 속 명대사죠. 매순간 온마음을 다해 치열하게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간절히 꿈꿔온 삶도 어느새 거기 놓여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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