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멤버 Biz:logue
“저기 보입니다!”
2022년 6월 2일 오전 11시30분 충남 보령항. 18만㎥급 초대형 선박 한 척이 둔중한 물살을 가르며 항구에 진입했습니다. 높이 27m에 선폭 46m, 길이는 300m에 달하는 이 배는 한 달 전 미국 남부 연안을 출발한 LNG 운반선이었습니다.
33일간의 항해 끝에 이 배가 육지에 닿는 순간, 항구 안팎에선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습니다. 평범한 유조선의 항해가 아닌, 사상 최초로 AI 자율운항을 통해 선박이 대양을 횡단한 기념비적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파나마 운하를 거쳐 태평양을 가로지른 2만km의 여정, 그 초반 일부를 제외하고 줄곧 이 배의 키를 잡은 건 ‘인간 항해사’가 아니라 바로 ‘인공지능 로봇 항해사’였던 겁니다.
‘AI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연 이 로봇 항해사의 이름은 하이나스 콘트롤. 업계에선 ‘바다 위 테슬라’로도 불리는 이 장치는 2020년 HD현대가 상용화한 자율운항 솔루션입니다. AI 딥러닝으로 주변 선박·암초를 정확히 인식하고, 증강 현실을 활용해 실시간 최적 항로를 도출하는 시스템이죠.
야간이나 해무가 낀 날씨에도 장애물을 식별하며 돌발 상황도 선박 스스로 대처합니다. 실제 대양 운항 당시 총 100여 차례의 충돌 위험을 전부 감지하고 회피해냈죠. HD현대는 올해까지 전 세계 350척 이상의 대형 선박들에 이 자율운항 솔루션을 수주했습니다.
“다가올 50년은 더 지속가능하고 더 똑똑하며 더 포용적인,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성장을 만들겠다.”
2022년 1월 CES 프레스 컨퍼런스에서 정기선 HD현대 부회장(당시 현대중공업그룹 사장)
대한민국 중공업의 상징 기업 HD현대, 옛 현대중공업그룹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굴뚝산업 대표 주자’란 이미지에서 벗어나 ‘첨단 기술 중심 솔루션 기업’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겁니다. 단적으로 창립 50주년인 2022년, ‘중공업’이란 글자부터 그룹명에서 사라졌습니다.
선언적 변화에만 그친 게 아닙니다. 선박 건조에만 주력하던 조선 부문은 이제 전 세계 운항 데이터를 실시간 수집, 최적의 항해 솔루션을 제공하는 해양 빅데이터 플랫폼 사업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건설기계 분야는 수천km 밖에서도 조종 가능한 무인 중장비들이 속속 개발돼 상용화를 앞두고 있죠. 친환경 트렌드에도 적극 대응해 올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탄소 배출 제로’ 선박을 수주했고, 거대 친환경 인프라 구축 사업도 본궤도에 올라 있습니다.
길었던 조선업 불황이 끝나며 HD현대는 유례 없는 대호황을 맞고 있습니다. 벌써 올해 선박 수주 목표의 90%를 달성하면서 그룹 시총은 반년 만에 무려 15조원이 늘었죠.
그럼에도 HD현대는 과거의 50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성장 방정식을 찾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미 공고히 장악한 기존 중공업 패러다임을 스스로 깨뜨릴 만큼 파괴적 혁신에 주력하며 말입니다. 과연 HD현대가 그리려는 새로운 성장은 무엇일까요?
Part 01
굴뚝 대신 기술로 첨단 스마트 중공업의 미래를 그리다
“That’s amazing!”
지난 1월 초 미국 동남부 애틀랜타의 한 공사 현장. 평범해 보이는 휠로더 한 대가 진흙밭 위를 지나갑니다. 곧이어 모래 더미 앞에서 바퀴를 멈추고 그 속으로 너비 2m쯤 되는 대형 버킷을 들이밀어 골재를 퍼 올립니다.
휠로더가 다시 진흙밭을 달려 마침내 목표 지점에 도착해 골재를 쏟아붓자, 현장에선 별안간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바로 그 순간, 이 휠로더의 운전석에서 감쪽같이 조종사가 사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각, 라스베이거스의 한 컨벤션 센터. 흡사 오락실 자동차 게임 부스처럼 생긴 운전석에 한 남성이 앉아 조이스틱 콘트롤러를 바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Hey, move on!”이라 외치며 그가 조이스틱을 기울이자, 전면의 LED 중계 영상 속 멈춰 있던 건설 장비가 다시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뒤 이번엔 그가 콘트롤러 위 버튼을 누르자 영상 속 장비가 순식간에 버킷을 들어 그 안의 골재를 와르르 쏟아냈습니다. 이윽고 들리는 위 건설 현장과 똑같은 감탄과 환호. 애틀랜타에서 사라졌던 휠로더 운전사는 서쪽으로 3000㎞나 떨어진 라스베이거스의 한 행사장에 있었던 겁니다.
3년 연속 CES 참여… 올해는 무인 AI 굴착기 등 제시해 주목
이날 라스베이거스에서 진행된 초장거리 원격 조종의 콘트롤 타워는 바로 세계 최고의 IT·전자 전시회인 CES. 1967년 이래 60년가량 이어진 최첨단 기술 박람회로 매년 150여 개국, 4000여 테크 기업이 최신 기술과 제품을 선보입니다.
아마존·엔비디아 등 글로벌 기업은 물론, 삼성전자·LG전자 등 국내 일류 기업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테크 기업이 총출동하는 자리죠. 이들의 신제품을 보고자 매년 전 세계 17만명이 넘는 바이어와 관람객이 모여들어 “세계에서 가장 핫한 첨단 제품 진열대”라 불리기도 합니다.
전기차·스마트폰 등 인기 소비재들의 틈바구니에서 올해는 이례적으로 중공업 제품이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엔 HD현대의 무인 건설 장비들이 있었죠. 앞서 소개된 원격 조종 휠로더, AI 무인 굴착기 등이 대표적이었는데요.
수천㎞ 떨어진 현장에서도 0.1초 이내 반응 속도로 중장비를 조종하고, 현장 도면을 시스템에 입력하면 굴착기가 알아서 작업을 처리하는 혁신적 장면들이 제시됐죠. 누구도 다치지 않으면서도 작업 가능한 시공간은 무한히 확장된, 꿈의 건설 현장을 일부 구현해낸 겁니다.
HD현대의 CES 데뷔는 2022년. 첨단 테크 기업의 각축장에 정통 중공업 기업이 등판했단 것만으로도 센세이션으로 평가되지만, 등장 못지않게 이들이 제시하는 기술 혁신은 꽤나 도전적입니다. 단순 성능 개량이 아닌, 기존 산업 판도를 뒤바꿀 ‘압도적 혁신’에 사활을 걸고 있는 거죠.
2024년 신년사에서 권오갑 HD현대 회장
10여 년 조선업 장기 불황… 압도적 기술력으로 다시 만든 기회
그 배경엔 최근까지도 지속된 혹독한 조선업 불황이 있습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교역이 줄고 해상 물동량이 급감하자 HD현대는 주력인 조선 사업에 심각한 타격을 받습니다. 2007년 연간 최고치였던 선박 발주량은 2년 만에 5분의 1 토막이 났고, 중국 조선사들은 저가 공세로 그 틈을 파고들며 시장 점유율을 잠식해 나갔죠.
위기를 다시 기회로 바꿔준 건 다름 아닌 압도적 기술 격차였습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 탈탄소 규제 도입이 본격화하며 친환경 항해 수요도 급증했는데, 이때 빛을 본 기업이 HD현대였던 겁니다. 친환경 선박은 웬만한 기술로는 구현이 어려운 상당한 고부가가치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HD현대는 2018년 세계 최초로 LNG 추진 대형 유조선을 인도하는 등 관련 시장을 선점합니다. 반면 후발주자들은 친환경 규제의 벽을 넘지 못해 줄줄이 고꾸라졌죠.
"지난 50년 세계 1위 십빌더(Shipbuilder)로 성장한 현대중공업그룹은 인류를 위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퓨처 빌더로 거듭날 것이다."
2022년 1월 CES 기조연설에서 정기선 HD현대 부회장(당시 현대중공업그룹 사장)
이 과정에서 HD현대는 기존 판도를 뒤흔들 초혁신만이 생존을 담보할 유일한 열쇠란 사실을 철저히 깨닫습니다. 이에 기술 혁신을 아예 지상 과제로 못박고 새로운 사업의 방향성을 구체화해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게 바로 2022년 1월 CES에서 전 세계를 향해 선언한 향후 50년 사업 비전, ‘퓨처 빌더(Future Builder)’입니다. 전통적 십빌더(Shipbuilder)에서 나아가 기술 혁신을 통해 전 중공업 분야의 미래를 주도해 나가겠다는 포부가 담긴 선언이었죠.
해상 산업의 미래를 그리다 “선박 건조 넘어 스마트 항해까지 책임”
새로운 비전 아래 HD현대의 향후 핵심 사업 전략도 하나둘 구체화됩니다. 먼저 이듬해인 2023년 조선·해양 부문 미래 전략 ‘오션 트랜스포메이션(Ocean Transformation)’이 제시됩니다. 선박 건조와 판매에만 집중하던 기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고객사들에 친환경 시대에 걸맞은 안전하면서도 효율적인 항해 솔루션까지 제공하겠다는 게 골자였죠.
2023년 1월 CES 기조연설에서 정기선 HD현대 부회장(당시 사장)
이 전략 기조에 따라 가장 먼저 구체화된 사업이 바로 해상 빅데이터에 기반한 AI 항해 지원 서비스, ‘통합 스마트십 솔루션’입니다. 전 세계 어디서든 효율적이고 안전한 운항이 가능하도록 AI가 선박의 생애주기에 걸쳐 운항·장비 현황을 실시간 점검하고 돕는 토탈 선박 케어 솔루션이죠.
특히 까다로운 탄소 배출 규제에도 최적의 연비로 운항할 수 있는 엔진 최적화가 강점으로 꼽힙니다. 이전까진 엔진 출력을 70%까지 낮추는 저속 운항 외엔 뾰족한 대응 전략이 없었기 때문이죠. 뾰족한 맞수가 없어 업계에선 “HD현대만이 할 수 있는 특유의 해상 혁신 사업”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미 사업화가 빠르게 진척돼 현재 해당 솔루션을 이용 중인 선박 수만 전 세계 430여 척에 이릅니다. 이 사업을 관장하는 HD현대마린솔루션은 2017년 매출 2400억원에서 작년 1조4000억원으로 6배의 매출 성장을 올렸습니다.
‘통합 스마트십 솔루션‘이 탑재된 전 세계 모든 선박의 운항 현황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는 HD현대의 디지털관제센터/HD현대마린솔루션
해양 빅데이터를 발판 삼아 개척된 또 하나의 혁신 사업이 앞서 소개된 ‘AI 자율운항 솔루션’입니다. 통상 자율운항은 기술 수준에 따라 총 4가지 레벨로 구분되는데, HD현대는 이미 최고 수준인 4단계(완전 무인 자율운항)를 달성했습니다.
관련 법제의 제약으로 상용화는 2단계 수준에 머물러야 하지만, 그 속도는 몹시 빠르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미 350척 이상 대형 선박들에 솔루션을 수주했고, 소형 레저용 선박 등에도 적용 범위를 넓혀 가고 있는 겁니다. 이 분야 역시 뚜렷한 적수가 없어 사업 전망도 유리합니다. 2021년 연매출 4억원이 채 안 된 아비커스는 2026년 연매출 2000억원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HD현대의 자율운항 부문 자회사 아비커스의 자율운항 시스템 ‘뉴보트 도크‘가 설치된 레저용 보트/HD현대
친환경 해상 규제에 원천 대응할 ‘탄소 배출 제로’ 선박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차세대 연료인 메탄올·암모니아 추진선 건조에 집중, 올해 1월 세계 최다인 43척의 메탄올 추진 컨테이너선과 36척의 암모니아 운반선 건조 계약을 따냈습니다.
이 같은 고부가가치 사업 성과와 대형 수주 호재들이 맞물려 HD현대는 올해 1분기 만에 연간 선박 수주 목표를 90% 가까이 달성했습니다. 올해 해상 분야에서만 1조원 이상의 영업이익이 예상됩니다.
차세대 육상 산업의 청사진을 제시하다 “무인 자율화로 건설 현장 고질병 해결”
올해는 육상 부문의 차세대 사업 전략 ‘사이트 트랜스포메이션(Xite Transformation)’도 제시됐습니다. 노동집약적 건설 현장(Site)을 기술집약적 스마트 일터(Xite)로 탈바꿈해, 건설 산업의 고질병인 비효율과 낮은 안전성을 앞장서 뿌리 뽑겠다는 취지입니다.
"AI와 디지털, 로봇 등의 첨단 기술이 더해진 HD현대의 Xite 혁신은 건설 현장과 장비의 개선을 넘어 인류가 미래를 건설하는 근원적 방식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2024년 1월 CES 기조연설에서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이 전략의 핵심은 ‘건설 현장의 무인화·자율화’입니다. 그 대표 구상이 HD현대사이트솔루션의 ‘콘셉트 엑스2’란 건설 관제 솔루션에 담겨 있습니다. 앞서 언급된 무인 중장비들을 활용해 지형 측량부터 기계 조작까지 건설 현장의 A-Z를 모두 무인 자율화하는 서비스죠.
가령, 드론이 3D로 현장을 스캔해 현장 지형을 파악한 후 건설 장비에 전송하면, 이를 반영해 해당 장비가 스스로 계획을 수립하고 작업을 처리하는 식입니다. 광각 센서로 주변을 식별해 사람이 지나가면 작동을 저절로 멈추는 등 만일의 위험에도 스스로 대비하죠. 5G 통신을 활용해 수천㎞ 떨어진 곳이나 해발 5000m 이상의 고지대에서도 작업이 가능합니다.
HD현대사이트솔루션의 건설 관제 솔루션 개념도/HD현대인프라코어
관련 국내 법제가 미비해 상용화엔 다소 시간이 걸릴 전망입니다. 그러나 기대 효과가 확실해 향후 사업성이 큰 분야로 평가되고 있고, 실제 해외 건설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상용화 논의가 활발히 추진되고 있습니다.
실질적 친환경 인프라를 세우다 “생산·유통·판매 포괄할 ‘수소 밸류 체인’ 구축"
나아가 육·해상을 모두 아우를 ‘친환경 에너지’ 혁신 사업에도 주력하고 있습니다. 기존 친환경 에너지 사업은 주로 연료 개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유통이나 판매, 활용까지 포괄할 기업이 거의 없다 보니 실질적 인프라 구축이 더뎌지는 아쉬움이 컸죠.
“수소 생산에서 운반, 충전, 저장 등 일련의 ‘수소 밸류 체인’을 구축할 것… 이를 바탕으로 ‘2030년 친환경 초일류 기업 도약’을 추진하겠다.”
2024년 1월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그러나 HD현대는 종합 중공업 기업의 이점을 살려 차별화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룹 내 각 부문 역량을 결집해 친환경 에너지 사이클 전 과정을 포괄하는 ‘수소 밸류 체인’ 구축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겁니다.
먼저 조선·해양 부문은 기존에 취약했던 수소 유통·저장 부문 기술 혁신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기체 대비 약 800배나 저장 효율이 높고 폭발 위험이 낮은 액화 수소 운반선을 2030년까지 개발해 상용화할 예정이며, 액화 수소를 대량 저장 가능한 16만㎥급 화물창도 4년 내 개발을 목표하고 있죠.
판매 사업은 에너지 부문을 중심으로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HD현대오일뱅크는 2030년까지 탄소 배출이 ‘0’에 준하는 블루수소 충전소를 전국 180여 곳에 설치할 예정입니다. 또, 건설기계 계열사들은 수소 연료 전지를 활용한 다양한 중장비 개발에 나서고 있습니다. HD현대사이트솔루션은 2020년 국내 최초 5t급 중형 수소 지게차 개발에 성공한 데 이어, 현재 1~3t급 지게차용 수소 연료 전지 파워팩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Part 02
소통·협업 중심 NEW HR로 지속 가능한 혁신 기반을 다지다
IT 허브 판교에 나타난 중공업표 최첨단 스마트 큐브?!
국내 IT 기업들의 허브로 통하는 경기 성남 판교. 재작년 말 이곳에 새로 문을 연 한 R&D센터가 있습니다. 17만㎡(5만평) 부지에 동서남북 어디에서 봐도 똑같은 정육면체, 가로·세로·높이 모두 90m의 거대 큐브식 건물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특히 네 면에 걸쳐 밖으로 돌출된 160여 개의 수직·수평 기둥이 직조해낸 1600여 격자무늬 외관은 단연 압권입니다.
외관만큼 내부 구조도 독특합니다. 1층 입구를 지나 로비인 4층에 도착하면 꼭대기인 20층까지 건물 한가운데가 구(口)자형으로 뻥 뚫린 보이드를 마주하게 됩니다. 각 귀퉁이에 배치된 전망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면, 층별로 돌출된 직사각 휴게 공간과 서른대가량의 엘리베이터 수직 골조들이 묘한 기하학적 공간감을 자아냅니다. 이윽고 다시 로비에 내려와 마주치는 정면의 가로 30m 초대형 LED 디스플레이와 화면 속 입체 영상들은 미래형 첨단 공간을 방불케 합니다.
경기 성남 판교에 위치한 GRC의 전경/HD현대
하지만 첨단 공간으로서 이 건물의 진가는 따로 있습니다. 외형도, 인테리어도 아닌 바로 스마트 설계입니다. 기둥을 외부로 배치한 덕에 공간 효율이 극대화된 건 물론, 기둥 격자들이 차광막 역할을 해 여름 복사열이 60%나 차단됩니다. 각 층 천장에 여름엔 냉수를, 겨울엔 온수를 흘려보내는 자연친화적 특수 냉난방까지 더해져 여느 대형 오피스 건물 대비 에너지 소모도 40%가량 절감됩니다. 등장과 동시에 국내외 유수 언론들로부터 ‘최첨단 스마트 큐브’란 별칭이 붙은 이유입니다.
언뜻 글로벌 IT 기업 본사를 연상케 하는 이 건물은 글로벌 R&D센터, 일명 GRC라 불리는 HD현대의 신사옥입니다. HD한국조선해양, HD현대오일뱅크, HD현대사이트솔루션 등 주요 17개 계열사 인력 5000여 명이 한데 모인 HD현대의 기술 싱크탱크죠. 계열사별 각개 전투를 벌이던 업무 방식을 근본적으로 탈피, 융복합이 필요한 첨단 기술 연구에 걸맞은 최적의 스마트 근무 환경을 구축하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됩니다.
새로운 공간에서 이뤄지는 HR 혁신
실제 GRC에서의 근무는 다소 경직된 ‘정통 중공업’스러운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우선 전무 이하 임직원 전원은 지정된 별도 사무 공간이 없습니다. 매일 출근 전 각자의 업무 공간을 앱으로 예약해야 하죠. 때문에 여기선 서로 다른 계열사 직원끼리, 전무와 말단 사원이 지근 거리에서 근무하는 게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회의실도 직원 규모당 국내 최다 수준인 700여 개로 언제 어디서든 미팅이 가능합니다. 수용 규모도 1인, 5인, 8~12인, 20인 등으로 회의 목적에 맞게 다양할 뿐 아니라, 근무 데스크 형태도 일(ㅡ)자형부터 니은(ㄴ)형이나 디귿(ㄷ)형, 리을(ㄹ)형까지 각양각색입니다. 다양한 스타일의 소통에 맞게 크고 작은 동선 변화까지 고려한 디테일한 공간 설계가 돋보입니다. 입주 2년이 채 안 됐지만 저마다 입을 모아 “공간이 달라지니 일하는 방식도 확 바뀌었다”고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위와 같은 근무 혁신은 HD현대의 기술 혁신을 지속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룹 내 대다수 신사업 추진이 사옥 이전 후 더욱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해양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 사업은 GRC 디지털관제센터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정보 집약적 사업 특성상 계열사를 초월한 적시 소통이 필수였는데, “GRC에서만 가능한 유연한 근무와 자유로운 협업 방식이 가장 주효했다”는 평이 나옵니다.
사실 중공업 기업을 향한 대중적 인식은 과거와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 다소 보수적이고 경직된 기업 문화를 떠올리죠. 그러나 HD현대는 이러한 대외 이미지 쇄신보단, 기술 혁신의 선결 과제로서 HR 혁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수동적 업무 관행들을 개선하고 능동적 조직 DNA로 탈바꿈해야만 급변하는 산업 트렌드에 발맞춘 지속 가능한 대응 역량이 길러진다고 보는 것이죠. GRC로 표상된 일련의 변화도 결국 HD현대가 주력하는 HR 혁신의 한 단면입니다.
HR 혁신 1st 테마: 일하는 방식의 혁신
HD현대의 HR 혁신, 그 첫번째 테마는 바로 근무, 즉 ‘일하는 방식’의 혁신입니다. 올해 4월 시작된 근무 기조 혁신 프로젝트 ‘WHY Campaign’이 그 대표 사례입니다. HD현대의 20개 전 계열사 임직원이 직급 관계없이 누구나 참여하는 전사 차원의 캠페인입니다.
이 캠페인의 골자는 3가지입니다. [Think WHY] 어떤 일이든 시작 전 해당 업무의 목적과 본질을 고민해야 하고, [Explain WHY] 개념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Ask WHY] 이해가 안 될 땐 주저 말고 질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매업무 과정마다 그 이유를 자문하며 능동적으로 일하도록 근무 체질을 완전 탈바꿈하잔 취지인 것이죠.
캠페인 시작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질의 응답이 없는 일방향적 회의는 자취를 감췄고, 관행적 보고·결재가 간소화되면서 생산성이 15% 이상 늘었다는 내부 분석이 나옵니다.
계열사들의 자체 근무 혁신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조업 중심의 보수적 기풍으로 유명한 건설기계 3사는 월 1회 ‘리더가 없는 날’을 선제적으로 도입했습니다. 이날은 오롯이 자신의 핵심 과업에만 골몰하거나 업무 능력을 계발하는 시간으로 활용되고 있죠. 매주 금요일 오후 회의도 폐지했습니다. 무분별한 회의 대신 한주 업무를 차분히 돌아보고 스스로 개선점을 찾는 데 집중하잔 취지입니다.
“일·가정 양립은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핵심과제…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조직문화를 통해 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들겠다.”
2023년 12월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HR 혁신 2nd 테마: 일할 맛의 혁신
HD현대의 두번째 HR 혁신 테마는 사내 복지, 즉 ‘일할 맛’의 혁신입니다. 사실 일할 맛 나는 일터의 중요성을 모르는 기업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상당수의 기업 복지가 보여주기식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가 많죠. 사내 복지를 시혜적 태도로만 접근하기에 그렇습니다.
반면 HD현대는 시선을 조금 달리해, 업무 몰입도를 극대화할 최적의 방법론으로서 복지 혁신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직원의 업무 몰입을 방해하거나 북돋는 요소라면 무엇이든 논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고민한다는 것이죠.
이 같은 맥락에서 의식주는 물론 출산, 육아, 자녀 교육, 결혼까지 직원 개개인의 사적 이슈가 아닌 함께 고민할 문제로 바라보고 지원책을 제시합니다. 우선 GRC에선 끼니 걱정이 전무한 환경이 구축돼 있습니다. 하루 세끼 무상 지원은 물론, 급식 업체 간 경쟁으로 맛과 영양까지 담보됩니다.
GRC 구내 식당에서 나오는 점심 메뉴. ‘명랑핫도그’ 등 유명 프랜차이즈 식품과의 컬래버를 통해 다양한 메뉴가 제공된다./HD현대
운동 걱정도 없습니다. 1000여 명이 동시에 입장 가능한 무료 피트니스 센터가 있기 때문이죠. 전문 트레이너들이 상주해 있으며, 저연차 직원들도 마음 편히 운동하도록 임원 출입은 아예 금지입니다. 이외에도 다목적 공연장을 직원 결혼식장으로 활용, 각종 비품과 주차비는 물론 대관비까지 무상 지원 중입니다.
GRC 내 초대형 피트니스 센터(왼쪽)와 직원 결혼식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GRC의 다목적 공연장 아산홀/HD현대
각종 출산 지원책도 속속 도입 중입니다. 임신 초·말기엔 근로 시간 단축, 전면 재택근무가 허용되며, 법정 휴가 외 1달의 출산 휴가가 추가로 부여됩니다. 임신·출산 땐 각각 500만원의 축하금도 지급됩니다.
육아 지원을 위한 사내 어린이집도 활발히 도입되고 있습니다. GRC는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운영하는 어린이집을 도입했고, 여타 지방 사업장의 어린이집 운영도 확대 중입니다. 이밖에도 법정 휴직과 별개로 최장 6개월의 추가 휴직이 허용됩니다. 아울러 3년간 1800만원에 이르는 유치원 교육비를 지급하며 고교나 대학 학자금도 상당 부분 지원합니다. 최대 1억원의 주택 구매 자금을 15년간 저리로 대출할 수 있는 혜택도 주어집니다.
직원 사기를 북돋을 음악쇼나 패션쇼 등 이색 문화 행사도 선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외부 콘서트홀 등을 대관하는 다른 기업들과 달리, HD현대는 유독 사옥이나 자사 작업장에서 행사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작년 3월과 10월 JTBC 음악 프로그램 ‘비긴어게인’과 공동 기획한 버스킹 공연은 각각 GRC와 전남 목포 HD현대삼호 조선소 작업장에서 열렸죠. 같은 해 5월 고급 패션 브랜드 8곳이 참여한 패션쇼도 GRC에서 진행됐습니다. 이제 일터란 더이상 일만 하는 재미없고 경직된 장소가 아님을 보여주려는 것이죠.
HR 혁신 3rd 테마: 채용 방식의 혁신
HD현대가 그리는 HR 혁신의 마지막 키는 채용, 즉 ‘일할 인재를 뽑는 방식’의 혁신입니다. 최근 더 빨라지는 거시 경제·산업 변화에 따라, 시행착오를 줄이고 더 핏한 인재를 찾으려는 기업 노력이 커지고 있죠. 평생 직장 인식이 사라지면서 대기업들마저 채용에 훨씬 공을 들여야 하는 상황인데요. 이에 HD현대도 전통 신입 공채 위주에서 벗어난 다양한 인재 유치·발굴 시도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작년 하반기 HD현대는 그룹사 차원 최초로 채용 연계형 인턴십을 도입했습니다. 계열사별로 필요에 따라 진행하던 소규모 인턴십을 확대 개편한 거죠. 나아가 작년부터는 대학생 커리어 멘토링도 시작했습니다. 실무진은 물론 임원까지 적극 참여해 작년 5월 서울대 기계공학부 학생 멘토링엔 정기선 HD현대 부회장, 이동욱 HD현대사이트솔루션 사장 등이 직접 멘토로 참여했습니다.
2023년 5월 서울대 기계공학부 학생 150여명을 초청해 GRC에서 진행한 커리어멘토링. 당시 정기선 HD현대 사장도 직접 참석했다./HD현대사이트솔루션
유튜브 영상을 활용해 기업 철학과 속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하는 등 대중과의 소통에도 적극 힘을 쏟고 있습니다. 작년 5월엔 정주영 창업자의 ‘해봤어?’ 정신을 유머러스한 감성으로 풀어낸 ‘못 바이러스 vs 현대인’ 유튜브 영상을 공개, 기업 홍보 콘텐츠로선 이례적으로 1000만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지난 연말엔 MZ 직원들의 실제 소개팅을 소재로 한 로맨스 예능 ‘출근하는 사이’를 선보여 젊은층 사이 높은 인기를 끌기도 했죠.
이 같은 HD현대의 HR 혁신은 성과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작년 HD현대의 채용 지원자는 전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한 반면, 직원들의 이·퇴직률은 눈에 띄게 감소했고 잠재적 이직 의향도 크게 줄었습니다. 특히 오랜 기간 하락 추세에 있던 대학생, 저연차 직장인들의 취업 선호도도 최근 증가 추세로 전환했습니다.
국내 주요 기간산업을 반세기 넘게 이끈 한국 대표 기업 그룹, HD현대. 1972년 출범 이래 올해로 창립 52주년을 맞은 HD현대는 연매출 60조원을 넘게 벌어들이는 세계 1위 종합 중공업 그룹입니다.
그럼에도 HD현대는 혁신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미 장악한 기존 산업 판도마저 다시 뒤엎을 파괴력으로 말이죠. 단순 기술 부문만이 아닙니다. 정통 중공업의 로직에 맞춰 진화된 기존의 업무 수행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지속 가능한 기술 혁신을 뒷받침하기 위한 새로운 방식의 HR 혁신에도 사활을 걸고 있죠.
“기업의 성공에는 모든 모험적인 정보, 모든 모험적인 노력, 모든 모험적인 용기가 필수적이다.”
범현대가 창업주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HD현대의 전방위적 혁신 노력은 50여 년 전 이들의 첫 시작을 어렴풋이 떠올리게 합니다. 변변한 선박 기술은 물론 조선소마저 없는 처지에 덜컥 초대형 선박을 수주해내고, 불과 2년 뒤 선박 건조와 조선소 준공을 동시에 이뤄낸 세계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도전을 말입니다.
‘왕회장’ 정주영표 모험 정신을 DNA에 새긴 듯, HD현대는 지나간 성공에 안주치 않고 내일의 더 큰 성공을 위해 또 한번 과감한 혁신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들의 노력이 얼마나 큰 성과와 산업 혁신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입니다. 다만 반세기 전 창업주가 그랬듯, 그 어떤 상황에서도 혁신의 끈을 놓지 않으리란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리가 한국 중공업의 대장 기업, HD현대의 새 도전과 혁신을 계속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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